제주역사기행
이영권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제주. 이제는 ‘홍대 옆 동네’라는 섬. 요즘이야 올레길 개통에 힘입어 보헤미안의 신대륙으로 각광받는 곳이 되었지만, 기실 제주만큼 사연 많은 땅이 또 있을까. 제주를 그저 미지의 땅 엘도라도나 풍광 좋은 휴양지로만 여기는 외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제주를 좀 더 입체적으로 조망해볼 것을 권한다. 삼별초 항쟁에서부터 4.3 사건에 이르기까지 제주를 무대로 벌어졌던 굵직한 역사적 국면에 관해 일별하고 나면, 제주의 눈부신 경치가 마냥 이국적일 수만은 없음을, 실은 제주 곳곳에서 묻어나는 특유의 정취가 오랜 세월 아픔과 상처 속에서 담금질되어온 것임을 알게 된다.

 

토박이 역사학자가 쓴 책이니만큼 제주민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제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탐라’라는 고유의 지명을 빼앗겼을 때부터 제주 수난의 역사는 시작된다. 탐라에게는 고려와 몽골 둘 다 외세에 다름 아니었다. 목호의 난을 진압하며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고려 영토를 수복하는 데 일조했던 공민왕 시절의 최영 장군도 탐라인들이 볼 때는 어디까지나 대학살을 자행한 외지의 권력자였을 뿐. 백여 년에 걸친 원나라 통치 기간 동안 몽골인과 제주인의 경계가 모호해졌던 까닭에, 당시 제주 사람들은 고려 말에 이미 또 다른 4.3 사건을 겪었던 셈이다. 소수자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역사도 이렇게 달리 보인다.

 

▲ 오래 전 제주 말미오름에서 찍은 사진. 이 책을 읽고 나니 풀 한포기도 다시 보인다.  

 

제주는 삼천리 밖으로 내쳐져야 할 중죄인들의 유배지였고, 관리들조차 부임을 꺼리는 변방의 척박한 섬이었으며, 국제 관계에서는 언제나 전략적 요충지로서 정치적 비극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실로 고난의 땅이었다. 그러나 또한 제주는 그 어떤 지방보다 민중적 저항운동이 거세었던 곳이기도 했다.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으나 광복 후 빨갱이로 몰려 제대로 대접조차 받지 못한 채 잊혀져버린 지난날 제주 지식인들의 이름을, 저자는 후손된 자의 의무감으로 하나씩 불러 헤아리고 있다.

 

옥황상제의 딸 설문대 할망이 성산일출봉에 빨랫감을 쌓아놓고 우도 위에서 빨래를 한다는,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땅 제주. 제주는 격동의 한반도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표본 공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오지랖일까만은 향토애가 곡진하게 느껴지는 이 정성스런 책이 새로 출간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묻히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더욱 제주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추사 유배지, 이재수의 난, 4.3 현장 등 각각의 테마를 중심으로 하루 일정의 여행 루트를 소개해놓고 있어 책 들고 여행하기에도 편하도록 구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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