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연구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자살률은 흔히 실업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안녕과 건강의 정도를 대변하는 척도인 것처럼 얘기된다. 그러나 자살을 사회의 보살핌 속에서 예방되어야 할 정신 질환 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책에 따르면, 아테네에서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독약의 공급을 행정장관이 관리했는데, 죽고 싶은 사람은 그 이유를 원로원에다 진술해서 공식 허가를 받기만 하면 되었다고 한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인의 방침은 이렇게나 쿨하다.

   
  누구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자로 원로원에 나아가 그 사유를 진술하여, 허가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일이다. 삶이 혐오스러우면 죽어라. 비운에 사로잡혔을 땐 독약을 마셔라. 비탄에 빠지면 목숨을 버려라. 불행한 자는 자신의 불행을 상세히 열거하고 행정장관은 그 치료법을 제공할진저, 그러면 그의 불행이 끝나게 되리라. -p.92  
   

그리스인들에게 자살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책이었다면, 로마인들에게 자살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영예(노예는 자살할 수도 없었다고)이자 뛰어난 의지를 보여주는 영웅적인 행위였다. 그들에게 자살은 용감하고 고상하게 죽을 수 있는 최상의 길이었다. 초기 기독교 시절에도 자살은 덕행이었는데, 그 시절 대표적인 자살행위였던 순교는 천국으로 직행하는 열쇠였으므로 언제나 동경과 찬미의 대상이었다. 자살이 본격적으로 심한 도덕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이후의 일이다. 죄악이고 범죄였던 자살은, 뒤르켐의 <자살론> 이후 사회적 분석대상이 된다. 프로이트는 자살을 질병으로 만들었다.

유사 이래 자살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이토록 다양한 까닭은 자살의 동기나 경위가 몹시 개별적이고 복잡난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폐쇄된 자기논리 속에서 자살을 감행한다. 예를 들어 이 책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실비아 플라스라는 여류시인은 생의 감각을 극도로 일깨우기 위해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자해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주기적으로 자살을 감행하고 또 용케도 살아난다. (물론 그녀는 불사신이 아니었다. 3회차에 죽었다.) 그녀의 자살 시도는 구조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 행위였다. 마치 원시 부족의 소년들이 맹수 사냥에 성공하여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그녀는 자기를 파멸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고 또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생의 감각을 회복했던 것이다.

예전에 어머니가 근무하시던 한 중학교에서 한창 목조르기 놀이라는 게 유행했었다. 어머니는 학생의 안전을 책임진 교사로서 이 듣보잡의 세기말적 유희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학생들 사이에서 이 놀이의 명성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숨이 막혀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서로의 목을 졸라주거나 또는 자기 목을 조르는 이 놀이는, 일시적인 산소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별의 별 자살의 경위가 다 있음을 실감케 하는 놀이가 아닐 수 없다. 

자살에 대한 내 생각은 그리스인의 그것과 비슷하다. 영웅적이기까지는 아니어도, 자살은 자기 삶을 불의의 습격에 방치하지 않고 스스로 적절한 순간에 완결 짓는 나름의 합리적인 행위가 아닐까. 자살은, 만약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성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한 종류라면, 길 가다 차에 치여 죽거나 건물에 깔려 죽느니보다 훨씬 더 품위 있고 위엄 있는 죽음의 한 방식일 것 같다. 이때의 자살은, 그 어떤 죽음의 경로 가운데서도 인간의 존엄이 가장 잘 유지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딜레마는 이와 같은 이성적인 자살이 다분히 ‘이상적인 자살’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수양이 잘 되어 자살의 그 냉혹한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현대인으로서 그같이 수련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괴물과 같은 존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자살이 실제로 논리적일 경우, 그것은 논리적인 만큼이나 또한 비현실적인 것이 되기 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탈리아 작가 파베제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자살을 왜 하느냐고? 왜 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살에의 충동은 동시에 끊임없이 살 이유를 생각하고 실존적 의문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확실히 생에 유익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정신의 피폐를 보여주는 증상이라고 일축할 일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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