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세기 독일의 역사는 19세기 맑스주의자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충분히 성숙한 이후에도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의 발전적 이행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파시즘이 태동할 무렵 독일 사회에서 중산계층은 이미 경제적으로 충분히 비참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은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아닌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을 지지했다. 대중은 왜 진보를 두려워하고 극단적으로 반동적이 되었을까. 물질적 궁핍 속에서 노동하는 대중들은 왜 자신들의 사회적 상황과는 괴리된 정치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은 왜 현실에선 실패했을까. 

파시즘이 태동할 당시 독일의 중산계층은 자기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선명하게 혁명적이거나 선명하게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혁명적 태도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상황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도출된 두 가지 심리적 구조의 충돌을 겪고 있었다. 이것은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으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의식이 그의 경제적 존재에 의해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도식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경제에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했으며, 역으로 경제적 발전(물질)이 이데올로기의 발전(의식)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은 간과했다.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 존재하는 대중의 심리구조라든가 이데올로기, 언어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내밀한 욕구, 욕망, 리비도적 에너지, 주술과 광기에 의해 견고해지는, 신비주의적인 대중의 무의식적 경향성과 같은 일체의 정신의 영역이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모두 관념적 형이상학일 뿐이었다. 그들은 물질적 토대를 너무나 중시한 나머지 정신의 자체적인 힘을 사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와 경제 구조 사이의 모순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이데올로기를 역사를 추동하는 힘으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라이히는 맑스의 유물론을 통속적 맑스주의자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는 대중의 무의식적 심리 구조야말로 경제 구조와 불편한 역학 관계를 맺는 또 하나의 유물론적 토대라고 주장한다. 즉, 사회적 구조는 경제학적 요인뿐만 아니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구축된다. 먼저 사회적 구조의 변동은 인간의 원초적, 생물학적 요구를 변화시킨다. 구조의 변동에 맞추어 변화한 인간의 성격구조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적 구조를 재생산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질서는 ‘대중들에 대한 지배’라는 자신의 주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성격구조를 그 사회의 구성원인 대중들 속에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속에 스스로를 재생산해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생산된 이데올로기가 모순된 방식으로 행동하는 인간에게 활동적 힘, 즉 물질적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발원한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경제 구조 뿐만 아니라 대중의 심리 구조 또한 유물론적 토대를 구성한다는 것.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은 간과한 이 지점에서 라이히는 정치심리학이 필요성을 언급한다. 정치심리학은 계급사회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특정한 시대에 인간의 성격구조는 어떠한가,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인간 존재의 모순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인간은 이런 존재에 어떻게 대처하려 하는가 등을 탐구할 수는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의 심리 구조가 경제 조건과 더불어 또 하나의 유물론적 토대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탐구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인간의 사고의 기저를 형성하는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하고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심리구조. 라이히는 이것이 인간의 억압된 성생활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사회는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구조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가부장제를 통해 개인으로 하여금 성의 억제와 억압을 내면화하도록 요구한다. 권위주의적 가족제도 속에서 성적 억압 구조에 길들여진 인간은 권위를 두려워하고 순종적인 인간 유형으로 사회화된다. 사실상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목적은 고통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말 잘 듣는 노예 같은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권위주의적인 가족제도 속에서 성적 억압을 내면화한 ‘도덕적 인간’은 열악한 노동착취의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보적 변화나 현실에 대한 반역을 두려워하게 된다. 

성적 억압은 대중들을 순종적이고 억압에 익숙한 상태로 만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권위주의적 질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심리 구조 또한 만들어 낸다. 권위주의적 질서의 첨단을 보여주는 국군주의적 의식은 얼마나 섹시한가. 파시즘이 섹시한 이유는 사실상 억압된 성욕이 제도적으로 승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의 억압은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조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비판능력을 무화시키고, 오히려 그에 반(反)하여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변화시킨다. 독일 대중의 반동적 정치 성향의 근원을 라이히는 이러한 성의 억압 구조 속에서 발견한다.       

억압된 성 생활이 내면화된 인간, 권위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인간, 자유와 해방을 두려워하는 인간. 이런 인간들에게 달라붙어 ‘고삐 풀린 살인충동을 만끽하는 흡혈귀’가 바로 파시즘이다. 사실 파시즘은 순수한 반동적 운동이 아니라, ‘반역적 정서’와 ‘반동적 사회사상’의 결합이다. 초자아에 대해 엄청나게 반항하는 마음과 엄청나게 복종하는 태도의 기이한 결합이 파시즘인 셈이다. 권위를 갈망하는 동시에 반역적이라는 점에서 파시스트의 심리 상태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노예상태에 있는 ‘소심한 인간’의 심리상태와 동일하다. 한편으로 파시즘은 종교와 닮아 있다. 파시즘은 말하자면 종교적 신비주의의 극단적 표현이다. 파시즘은 성적 도착에서 생기는 종교성을 옹호하며, 가부장적인 수난의 종교가 지닌 마조히즘적 성격을 사디즘적 종교로 변형시킨다. 그 결과, 파시즘은 종교를 고통철학이라는 ‘내세의 영역’에서 가학적 살인이라는 ‘현세’로 변화시킨다.  

*

제국주의가 강제한 식민지 체제, 뒤이은 분단과 냉전, 한국전쟁이 결과한 반공 규율 체제, 유신 독재 정권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대사는 파시즘이 일상적 분위기로 굳건하게 뿌리내릴 수밖에 없는 비극의 역사였다. 매카시즘의 상흔이 깊게 남아있는 사회, 군사문화에 길들여진 사회, 권위와 규율에의 복종이 익숙한 사회, 엄숙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파시즘의 망령은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파시즘은 사회경제적 과정이나 구조를 넘어서 대중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감정이나 정서, 내면적 심리에 그 힘의 원천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재정권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지 오래인 오늘날 한국 사회에 파시즘의 잔재는 여전히 일상의 기류로 존속하고 있다.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서슬 퍼렇게 살아있으며, 선거철마다 지역주의적 선동이 반복되고,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학교 교육 또한 여전하다. 최근의 황우석 교수 사태에서 드러난 대중의 광기는 또 어떤가.

폴라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며, 사회는 이러한 모순을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한다고 말한다. 두 가지 방식이란 다름 아닌 사회주의와 파시즘이다. 전자는 재산과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진보적으로 철폐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원칙을 경제에까지 확장시키는 방법으로, 후자는 민주적 정치영역을 철폐해버리고 오로지 경제생활만을 남겨놓는 방법으로 모순을 극복한다. 굴곡진 한국근대사가 낳은 파시즘의 일상적 기류 속에서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유례없이 견고해져가고 있다. 어쩌면 고도자본주의 사회와 파시즘의 밀월 관계를 가장 뚜렷이 관찰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바로 이곳, 한국 사회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