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1호 - 창간호 다언어 문화이론 및 번역 총서 흔적 1
문화과학사 편집부 엮음 / 문화과학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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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흔적>은 각국의 지식인들이 필자로 참여하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곳곳에 동시적으로 발간되는 잡지라고 한다. 직접 구해 보지는 못하고 일부만 복사본으로 읽어보았는데, 그 중 펭 치아의 <보편적 지역- 변화하는 세계에서의 아시아 연구>라는 글은 ‘지역학’이라는 학문을 주제로 한 글로, 지역학이라는 게 있는 지도 몰랐던 나로서는 이 글 자체가 무시무시한 ‘수면의 지역학’이었다.  

네이버에서 ‘지역학’이란 것을 치면 이렇게 나온다: 어떤 특정 지역에 대한 타자성의 인식 아래 그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혹은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활동을 총칭. 엄밀히 말해서 ‘지역학’이란 용어보다는 ‘지역연구’가 더 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지역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고유한 방법론이 부재하고, 지역 연구의 특성상 다른 분과 학문 즉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방법론과 연구 성과를 이용해야 하는 실정에 있기 때문이다. 지역연구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략적 필요에 의해 미국에서 제일 먼저 발달해 왔다. 그러던 것이 전쟁의 종결과 함께 순수한 학문의 분야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결론적으로 지역연구란 그 지역의 언어를 바탕으로 각각의 분과학문의 방법론과 연구 성과를 이용하여 그 지역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업적을 쌓는 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 

펭 치아는 분과학과 지역학이 보편자-개별자 구도를 이루어 상호 작동하는 양상을 주목하면서, 지역학이 현지조사를 거쳐 비-서구라는 타자를 포획해 오면 분과학은 포획된 타자를 자기 방식으로 소화해 버리는 이러한 학문적 메커니즘이야말로 서구유럽이 타자를 인식하는 지극히 헤겔스런(?) 태도라고 비난한다. 헤겔적 시각에서의 보편성이란, 언제나 개별자 가운데 제일 힘세고 포악한 하나가 나머지 다른 개별자들을 무참하게 포섭 장악하는 방식으로써만 전유될 수 있는 성질인 바, 이런 점에서 보편 이론의 정립을 목표로 하는 (그리고 그것을 비-서구에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분과학문은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의 절대정신을 구현하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지식 가공 방식인 것.

문제는 이런 방식이 선진적이고 정통적이고 일반적인 학문 연구 방식으로 전 세계에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비-서구로서의 아시아는 언제나 서구에 기반을 둔 학자들에 의해 가공되어야 할 원자료, 원천이 되고 만다. 비-서구 출신 아시아 학자들이 자신의 출신 지역을 연구하기 위해 ‘원주민 정보제공자’로서 서구로 유학 오는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이다. 왜 그들은 자기네 사회를 서구 지식의 구조와 방법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어버렸나.

펭치아는 ‘보편-특수’라는 코드로 인간의 활동을 인식하는 것이 결코 절대적인 학문 방식은 아님을 강조하면서 개별자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자의 개념 또한 파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보편성을 데리다의 사유를 빌려 “특수한 영토적 신체들 혹은 지역들 간에 공유하는 중단 없는 운동 속에서 거듭 절합되고 재정의되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보편성은 어떤 한 특수한 개별자에 의해 전유될 수 있는 정태적인 실체가 아니라, 각각의 개별자들의 끊임없는 연쇄에 의한 계열화 운동, 개별자들의 중단 없는 공유 운동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편은 '수렴'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하나의 '모범', '전범'으로서의 가치로 전환된다. 이렇게 펭 치아는 헤겔적 색채가 강했던 기존의 낡은 보편-특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앞으로의 아시아 연구에 있어서 서구적인 보편성의 유령을 몰아낼 것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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