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바라봄 가톨릭문화총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지음, 김형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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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의 이해

 신의 존재는 신념의 영역인가? 그렇다. 신의 존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일단 신은 세계에서 표상하고 추론할 수 있는 대응물이 없다. 무한자인 신은 인간의 유한한 인식 능력(=오성)으로 포착할 수 없다. 과학처럼 수많은 실험을 통해 신의 존재의 실증성을 담보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Non-Sense)하다. 물론 신은 특정 언어 사용자들의 언어 게임 안에서는 모순으로 무너질 수 없는 다리처럼 말해질 수는 있다. 이 경우 신은 언어 사용자들의 사적 언어로써 필요에 의해 사용되는 개념이 될 것이다. 새로운 언어 사용자에게 신이 필요 없다면 다리는 무너진다. 이러한 신은 무한자라고 말할 수 없다.


2. 신의 입장에서 존재의 평등함

 무한자인 신은 전지전능해야만 한다. 전지전능한 신은 물질과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신의 바라봄은 모든 거리와 방향을 무시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풀 한 포기와 인간 한 명의 신과의 거리는 서로 동등하다. 다시 말해, 신의 입장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인간과 생물 사이의 우위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떠한 지식과 지위를 가지든 자신의 위대함을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


3. 인간의 입장에서 존재의 평등함

 인간이 만든 모든 지식과 지위는 임의로 정해진 사회의 인정을 근거로 한다. 이 지식과 지위에는 '인간 A는 인간 B보다 뛰어나다' 내지는 '인간은 어떤 생명체 A보다 뛰어나다'가 해당한다. 이런 사회의 인정은 인간의 인식능력에 의해 종합된다. 즉, 사회의 인정은 종합 명제이고 인간의 인식능력은 분석 명제이다. 한편 종합 명제는 수많은 분석 명제를 분석하여 정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분석 명제는 말의 의미를 근거하여 참인 명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순환적이다. 결국 의미를 가진 모든 명제를 경험적인 명제들만으로 환원하여 정당화하려는 발상은 실패한다. 모든 명제는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반증될 수 있다. 따라서 분석 명제의 옳음(참)으로 종합 명제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에서도 인간의 뛰어남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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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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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이라는 우주를 건너

 모옌은 한국식으로 발음하면 막언이다. 해석하자면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뜻일테다. 으레 문학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으로만 말하여야 한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그는 이걸 자신의 예명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처럼 현대 중국사 지식이 그냥 어렴풋이 흐름만 아는 수준인 독자조차 슬픔이 전달되니 아무래도 그의 고집스러움은 성공한듯 싶다. 혹자는 모옌이 역사적 문제에 대해 너무 모호하게 대응하는 행동이 불만을 토로한다. 다시 말해, 그가 중국 정부를 너무 의식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의 태도는 반정부 인사로 찍혀 현재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노벨상을 받은 가오싱젠과 비교하면 상당히 미온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모옌의 소설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2. 도깨비 뿔을 가진 악마?

 흔히 60년대 반공 만화를 보면 북한과 관련된 등장인물은 모조리 뿔 달린 악마로 묘사되거나 괴물 비스무리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악랄함과 전혀 무관하게 정말 뿔 달린 악마처럼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이것을 문학적 표현으로 돌리더라도 이러한 인물에 대한 피상적인 묘사는 그다지 설득력을 가지지 않는다. 어떤 인물이든 하나의 역사를 이루고 있고, 그것은 그 인물이 매 사건마다 끊임없이 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옌이 그리는 중국 현대사의 인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여겨지지만, 한편으로 언제나 사건에 사로잡혀 있는 무력한 존재이다. 이것이 그 인물의 선행과 악행을 정당화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인물의 모습을 오롯이 바라보려는 시선을 유지할 때, 감상자는 비로소 그에 대한 가능성과 한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3. 당신에게 쓰는 편지

 개구리는 모옌의 작품 중에서도 압도적인 걸작이다. 이 소설은 일본인 지인에게 편지를 쓰는 부분과 말미의 희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 몇몇 리뷰어의 말마따나 중국사에서 일본이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주인공 커더우(한국어로 '올챙이')가 일본인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비록 일기 다음으로 개인적인 글인 편지의 형식으로 쓰여졌지만,  그가 쓴 여타의 소설처럼 이것도 치밀한 묘사와 몇몇 환상적인 부분이 어우러져 술술 읽힌다. 이야기에 푹 빠져 등장 인물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의 작품이 포크너와 마르케스를 함께 보는 것 같다는 평이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4. 남겨진 희곡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커더우가 쓴 희곡을 읽으면 장르의 변화에 따라 갑자기 호흡이 느려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환각적인 요소에서 벗어나 작품 주제 자체에 대해 좀 더 낯설게 보라보는 시선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나는 일종의 소격효과를 느꼈다. 브레히트나 베케트가 사용한 일반적인 소격효과처럼 희곡 안에 부조리한 성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장르의 변화 만으로 이런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참신하다고 생각한다.


5. 미생 커더우

 소설 제목인 개구리와 달리 주인공 커더우는 앞서 밝힌 것처럼 올챙이라는 의미이다. 모옌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미성숙한 존재인 올챙이라는 이름을 화자에게 부름으로써 역사에 대한 깊은 반성 없이 신격화시키기에 바쁜 사람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은 동아시아 전체가 가지고 있고 한국을 살아가는 나 역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끊임없이 고민하여야 완생에 조금 가까워지는 자아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무한한 미생에 대한 깨달음이 곧 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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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 진리를 향한 주체
피터 홀워드 지음, 박성훈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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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디우에 대한 회상

 어린 시절 니체주의자였던 나는 막연하게 현존하는 최전선의 철학자가 궁금해졌다. 한국 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수용되는 현대 철학이라고 여겨졌던 것은 프랑스 철학이었고, 그 때 접한 것이 바로 바디우였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바디우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라고 곧잘 불리는 포스트 구조주의 안에서도 특이한 지점에 속한다. 피터 워홀드가 쓴 이 해설서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최고의 저서임은 분명하다. 바디우의 주요 저서인 '존재와 사건'이 품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번역 역시 최악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위한 선언은 그나마 볼만하다. 지금은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독특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 플라톤과 라캉의 기묘한 만남

 바디우는 철학자 플라톤과 바디우가 정의한 반철학자 라캉의 후예이다. 현재 내가 그의 철학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생각이 플라톤의 인식론과 정반대에 속하고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애초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플라톤적인 면모는 현대 집합론으로 해석하는 그의 존재론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존재의 실존을 모두 무한 집합의 원소로 보았다.


3.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의 진리들

 플라톤과 바디우가 다른 점은 바디우는 하나의 이데아로부터의 진리가 아닌 다수의 진리'들'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이 진리를 생산하는 영역이라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진리들은 후기 하이데거에게서 영향을 받은 용어인 '사건(철학에의 기여 국역본에서 쓰인 새로운 번역어에 따르면 생생한 고유화)'을 통해 출현한다. 철학은 이 영역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그가 정치, 과학, 예술, 사랑만이 진리를 생산한다고 보는 당위성을 알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철학이 Ad Hoc(라틴어로 그것에 대해서)을 설명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Ad Hoc 자체는 정말로 대안을 없을 경우에 논증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긴 라캉을 인정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의 수용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다.


4. 사랑의 단상

 이런 비관적인 관점에도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사유는 인상적이었다. 즉, 사랑은 하나로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마치 둘이서 춤을 출 때 짝을 이루면서 움직이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로 보이지만 전적으로 '둘'이라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겸손한 그의 태도는 한번쯤 곱씹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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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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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타일리스트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는 소설 작법부터 기존의 여타 소설들과 다른 방법을 취하였다. 플로베르는 신문 기사에 나온 기존의 이야기를 토대로 자신의 고유한 문체 스타일을 구사하여 이야기를 완성하였다. 그의 문체는 발자크에게서 물려받은 듯한 세밀한 묘사와 동시에 사물에 항상 그림자가 지듯 독자가 상상해야하는 여지를 남겨둔다. 특히 이러한 부분은 보바리 부인이 탄 마차 안에서 벌어지는 성애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문학 연구자들은 '언어의 물질성'이라고 표현하던데 사실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잘 와닿지 않는다.


2. 돈과 사랑의 인생사

 돈과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이다. 마담 보바리를 지나치게 구조적으로 읽다 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 편이다. 플로베르가 단지 돈과 사랑 둘 다 추구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낭만적인 소설의 주인공이 으레 보여주는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식의 이야기는 별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은 허구로 만들어진 소설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며 포착하기 어렵다. 실제로 마담 보바리 안에서는 돈과 사랑을 동시에 잡는 사람은 없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한 대상에 쉽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의사인 샤를 보바리는 돈 많은 미망인과 결혼했으면서도 엠마 보바리와의 진정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엠마는 돈 많은 샤를과 결혼했으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꿈꾼다. 엠마는 불륜을 위하여 몰래 돈을 물쓰듯이 마구 썼고 결국 이를 책임질 수 없어 자살하기에 이른다.


3. 통속적인 세계를 요청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다

 혹자는 마담 보바리를 들어 엠마의 단순한 막장 불륜이야기라고 지적하면서 이 소설의 가치를 낮추어 바라보기도 한다. 플로베르가 겪은 당시의 반응은 이보다 훨씬 녹록치 않았다. 그의 통속적인 이야기는 종교적 관습에 벗어난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당시의 현실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한편으로는 통속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과 오늘날의 막장 드라마를 비록 스타일의 강조라는 점에서 동등한 범주에 놓을 수는 있어도 1) 그 스타일이 새로운 경험으로서 얼마나 독창적인 가치가 있는가 2) 다루는 주제가 시대상을 적시한 시선에서 바라보는가 라는 점을 비교했을 때 분명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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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평전 - 천재의 의무 Meaning of Life 시리즈 8
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 필로소픽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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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정 인간에 대한 성찰의 의미

 어떤 인물의 평전은 쓴다는 것은 무모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어떤 평전이든 기껏해야 한 시선만을 오롯이 담아낼 뿐이고, 남겨진 삶의 부분은 깎여나가 버리기 마련이다. 사케를 마시면서 그것의 기원인 쌀의 향취를 더듬는 과정이랄까. 그러나 이런 점을 견지하더라도 이 평전은 일급의 작품에 속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를 비교적 적합하게 해석할 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까지 함깨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철학자는 사상가인가

 철학자의 삶을 아는 것이 필요한 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위의 소제목에 대한 생각에 달려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그의 철학이 기존의 어떤 철학보다 반동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는 왜?'라는 의문부호를 계속 달게 된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이 살던 배경이 서양 역사상 많은 변화를 표출하던 지점 중 하나인 20세기 말의 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어떤 창작물을 두고 그 제작자를 환원시키려는 행위가 무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산뜻한 의문감을 해소하기 위해 들게 되었던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3. 철학 의사(Philosophy Doctor) 비트겐슈타인

 속된 말로 '의심병'이라는 표현이 있다. 모든 철학자는 의심병 환자이다. 그것은 가끔씩 우리의 삶이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것 같은 경첩과도 같기 때문이다. 와닿지 않은 사람을 위해 예시를 언급하자면 '왜 사는가?'같은 식의 의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중에서도 심한 편에 속했던 것 같다. 그에게 논리학과 윤리학은 단순히 하면 좋은 게 아니라 의무였다.(바이닝거) 이런 관점에서 그의 철학은 치유적 행위나 다름없다. 비록 그는 자신의 병리적 의문에 대한 해소를 위해 철학을 하였지만, 그가 남긴 치열한 기록은 후대의 많은 이들을 치료하였다.


4.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

 평전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발자취를 추적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유언을 들으면 마치 그가 이 한 마디를 위해 평생을 살아온 것 마냥 느껴질 정도이다. 모든 삶은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보여져야만 한다. 삶은 실천이다. 그는 끊임없이 행동을 실천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인간이다. 땅에서 새하얗게 솟아나 햇살에 맑은 얼굴 비추는 풀 한 포기의 인생을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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