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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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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레프

 알레프는 아랍 문자와 히브리 문자의 첫번째 글자이다. 이 글자의 발음을 읽을 줄 몰라서 황병하가 번역한 알레프인지 아니면 송병선이 번역한 알렙인지 더 가까운 발음을 알 수 없지만, 나는 좀 더 익숙한 알레프라 부르겠다. 이 글자가 어떻게 생긴지 궁금하다면 칸토어의 초한기수 기호를 떠올리면 혹은 찾아보면 될 것이다. 초한기수가 무한집합의 원소의 기수를 나타내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알레프는 무한을 상징하기도 한다.

 

2. 무한의 모티브: 인간의 불멸

 알레프에서 가장 빈번하게 차용하는 모티브가 있다면 그것은 무한일 것이다. 먼저 죽지 않는 사람들에 나타나는 무한의 모티브인 인간의 불멸에 대해서 살펴보자. 죽지 않는 것. 이것은 인류가 오래도록 (역사상 거기에 가장 가까운 현대에서도 유효한지 모르겠지만) 꿈꿔온 이상이다. 이처럼 인간은 생물학의 관점에서 필멸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어떨까? 현대의 인간은 언어를 통해 과거의 투탕카멘을 요청할 수 있다. 더 과격하게 바라보면 인생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는가? (멕베스) 이런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필멸이라기 보다는 역사 속에서 부유하는 불멸의 그림자나 다름 없다. 루이스 보르헤스의 통찰은 바로 이런 유명론을 극한으로 활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무한의 모티브: 픽션의 불멸

 아스테리온의 집은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르스의 신화를 페러디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는 영웅 테세우스의 관점이 아닌 미궁에 갇혀 있는 미노타우르스의 관점으로 전개된다. 픽션의 운명은 언제나 주어져 있다. 제아무리 해석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더라도 어떤 사건은 종결되고 어떤 인물은 죽는다. 이것은 독자의 시선이 아니다. 이것은 픽션의 시선이다. 픽션은 고독하다. 픽션은 항상 독자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불멸의 생을 살아간다. 픽션 미노타우르스는 자신의 죽음을 꿈꾸며 독자 테세우스를 기다린다. 설사 픽션은 죽임을 당할지라도 새로운 테세우스가 나타나면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따름이다. 루이스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문학의 세계는 찰나멸과 윤회의 세계이다.

 

4. 무한의 모티브: 세계의 불멸

 소설집의 제목과도 같은 알레프에 나오는 소재 알레프는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이면서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빛나는 형상의 2~3센티미터의 물질이다. 혹자는 이것을 현대 물리학의 초끈 이론 속 다중 우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알레프가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낸 지식 체계라고 본다. 나는 알레프가 있던 집이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무너지면서 동시에 알레프가 사라졌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알레프는 소멸했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집이 무너지는 시점으로부터 소설의 다음 문장은 적힐 수 없다. 알레프의 소멸은 곧 세계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알레프는 단지 눈 앞에서 사라진 것에 불과하다. 알레프는 물리적으로 사라질 수 있는 한 권의 책이다. 유형의 책이 파괴된다고 해서 무형의 지식이 파괴될 수 없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어떤 사람은 인간의 지식 체계는 불완전한 체계인데 어떻게 그것이 알레프의 정의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냐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물으려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인간이 바라보고 인식하는 세계는 모두 언어의 표상과 추론으로부터의 세계이다. 세계를 넘어서고자 아무리 바벨탑을 밟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도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그 지점까지가 (인간의) 세계이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만약 불멸에 대한 이해가 무한한 시간이 아닌 시간 자체의 소멸을 가리킨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세계는 불멸이다. 인생은 한계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길이다. (논리 철학 논고 6.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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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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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번 읽게 만든 책

 루이스 보르헤스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반드시 들어볼만한 인물이다. 나 역시 그랬으며 지금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그 놈의 좋아하는 것의 완전 정복에 대한 갈망때문에 처음부터 가장 유명하고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픽션들'에 도전하였다. 그의 소설집을 처음 읽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나의 경우에는 '두려움'이었다. 그 감정은 소설이 가지는 난해함이나 생경함이 아니라 주제가 가지고 있는 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당시 픽션들이 가지는 극도의 유명론적 사고관에 대해 어떤 공포심을 느꼈다. 그 때에 나는 생각에 대한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으므로 무의식적으로나마 학교에서 배운 대로의 지식을 보편타당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나의 충격은 과거에 이 책을 도저히 완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몇 년 후 나는 알레프를 경유하고 나서야 진정으로 보르헤스 월드의 시민이 되는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2. 허구들

 픽션들. 한편으로는 이 얼마나 건방진 제목인가. 아니 소설이 허구인지 모르고 읽는 독자들이 과연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은 허구들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그 이야기들이 유래 없이 현실을 기만하는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3. 허구들 속 허구들 

 메타 픽션들은 픽션들인가. 픽션들을 읽고 이 문장에 대해 고민에 빠지게 된다면 당신은 루이스 보르헤스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상자 속의 상자는 바깥 상자로만 인식될 수도 있다. 또한 상자 속의 상자는 상자 속의 상자라는 두 상자의 의미로 정의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독자가 바라보고자 하는 지평 만큼 보여지는듯 하다가 사라진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에서는 무한 개의 상자가 주어져 있다.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로 드리워진 문자를 통해 어떻게 무한한 허구의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소설에서 허구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달려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이 전부 사이비 명제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4. 동일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서 사용한 소설 장치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내가 읽는 판본의 '픽션들'과 동일한 판본들의 그것은 모두 적혀있는 문자가 일치할 것이다. 이것은 이 책들이 모두 동일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모두 같은 픽션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마 보르헤스는 아니라고 지적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5. 모순에 기초한 다리는 무너지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서점에 있는 '픽션들'을 보고 모두 그렇게 부르며 동일한 책이라는 생각을 가지 있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동일한 공정을 통해 생산되었다고 말하는 한 판본의 책은 모두 동일하다.'라는 모종의 언어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진리에 의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 사용을 통해 확립되기 때문이다.


6. 픽션들과 인간들

 어릴 적 엘리베이터의 양면 거울을 보면서 저기 비치는 내 모습이 어디까지 이어질까 두려워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건 실로 간단하였다. 바로 내가 보고자 하는 곳까지 볼 수 있다. 이 예시에서는 거울과 '나'만 있기 때문에 유아론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집으로 발표되어 이미 수많은 독자들과 작가의 언어게임으로 확장된 '픽션들'의 경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픽션들은 그 의미를 파악할 때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대놓고 명시한다. 그것이 픽션들을 우아한 신전의 기둥으로 보이게 만드는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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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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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이스 보르헤스

 현대적인 소설가란 누구인가? 아마도 많은 지지를 받을 인물 중 하나에는 반드시 루이스 보르헤스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함께 세계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라틴 아메리카 작가로 손꼽힌다. 플로베르 이후 많은 작가들이 현실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 즉, 스타일에 대해 많은 천착을 보였다. 그러나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만큼 불필요한 이야기 나열을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깔끔하게 열어젖히는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2. 예술적 재구성의 대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그의 소설들 중에서 가장 이른 연대상에 위치한다. 그만큼 루이스 보르헤스의 스타일이 상당히 불완전하게 구현되어 있다. 실제로 필자의 경우, 그의 전집을 다 읽고 나서 가장 손이 가지 않는 소설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소설집에서조차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로 사용된 그의 스타일은 예술 작품을 다시 예술적으로 재구성하는 패러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 그가 보기에 모든 문학은 다시 쓰기에 불과하다. 새로운 소재 발굴과 묘사는 시대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데에 비하여 작가가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모든 문학 작품들이 전부 고만고만해지는 결과를 암시한다. 이러한 측면은 20세기 구조주의의 발전에 따라 플롯을 분석하는 방법이 점차 극한에 달하면서 더욱 부각되었다. 그는 이러한 한계를 탈피하기 위하여 다양한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이 소설집에서는 그것이 패러디 기법인 것이다. 원작과 패러디를 모두 읽는 독자에게 패러디 기법은 그 특성상 한데 어우러져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글을 쓸 때에 스타일에 좀 더 치중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3. 불온당한 세계사와 온당한 소설의 한붓그리기

루이스 보르헤스가 세계사라고 붙인 이 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와 같은 부분은 사실상 없다.” 만약 독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루이스 보르헤스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모든 역사는 필자에 의해 세련되게 표현된 그러나 편향적인 기록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소설과 세계사는 하등 다를 바 없다. 혹자는 역사에 대한 이런 해석이 너무나 회의적이므로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지적 무정부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실용적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역사관은 역사를 무작정 거짓이라고 회의하면서 거부하고자 함이 아니라 재구성된 현실이라는 인식 속에서 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발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합하다. 또한 이 소설집은 한편으로 온당한 소설의 역할도 한다. 이것을 읽는 내내 허구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들은 때때로 그의 소설답지 않게 이야기 살짝 늘어지는 측면도 있지만, 배경 설정이나 등장 인물들의 매력으로 보완하고 있다. 사실 그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고 소설을 읽으면 꽤 흥미로운 작품들도 몇몇 보인다. 오히려 그의 뛰어남에 대한 선입견으로 작품을 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원작과 패러디, 불온당한 세계사와 온당한 소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재주를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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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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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짜 이야기

 소설 바우돌리노는 주인공인 바우돌리노가 자신의 이야기를 양피지에 직접 기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놀라운 점은 바우돌리노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내비치고 있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다! 우리의 바우돌리노는 괘씸하게도(?) 자신의 거짓말을 이렇게 길게도 풀어놓고 있다.


2. 진짜 이야기

 그런데 우리가 여지껏 들어왔던 이야기는 모두 진짜인가? 실은 그렇지 않다. 설령 실제로 경험한 일을 온전히 담았다는 이야기일지라도 그건 화자의 당시 감정, 사회적 위치, 기억의 오류 등으로 모조리 새롭게 재탄생된 것일뿐이다. 그렇다면 이 책 바우돌리노도 실은 진짜 이야기가 아닐까? 바우돌리노가 적은 그것이 전부 그의 상상에서 나온 것에 다름 없을지라도 바우돌리노 나름의 신념과 생각을 훌륭하게 재구성하고 있지 않는가.


3. 이야기의 힘

 이쯤 도달하면 사실 이야기를 읽을 가치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에 빠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인간은 지금까지 잘도 이야기를 즐겨왔다. 왜? 간단하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즐겁고, 그것에 대한 정보를 주고,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사건에 대해서조차 다음은 어떻게 될까 상상하는 힘을 길러준다.


4. 허허실실의 허와 실

 인간은 단지 이 이야기를 가지고 현실과 착각하지 않으면 된다. 결국 이야기에 현실을 구태여 대입할 필요가 하등 없다. 그것의 본질은 현실이 아닌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냥 보고 즐기면 된다. 즐거운 마음은 진짜다! 이렇게 보면 몹쓸 거짓말쟁이 바우돌리노는 어느새 꿀잼 보장해주는 샤방한 이야기꾼으로 보인다. 어이쿠, 그래 이거 에코가 쓴 소설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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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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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실실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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