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번역 문제에 관해 한 마디 해두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미 고전이 된 발터 벤야민의 [번역가의 과제]에서처럼 심오한 언어철학에 관한 논의는 아니며, 또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이미 진부해진 문구를 되풀이하면서 번역의 어려움에 관한 개인적 소회를 털어놓자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스피노자 철학의 몇 가지 중심 개념들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이것이 나름대로 중요성을 갖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하는 점이다.

 

최근 들뢰즈나 네그리, 또는 알튀세르나 발리바르 등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면서, 이들의 스피노자에 관한 저작이나 논문이 번역,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로서, 이들의 스피노자 연구는 이들 각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꼭 소개,연구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공교롭게도 이들의 저술이 주로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번역,소개되다 보니까 번역의 질에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번역에서도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이는 물론 스피노자에 관한 책들을 번역한 사회과학자들의 개인적 역량을 폄훼하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다만 그 분야의 책을 번역하거나 저술하려고 할 때는 그 분야에 관한 좀더 충분한 지식과 이해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또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처럼, 스피노자 연구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책들의 번역이 문제일 경우에는 더욱 중요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국역된 스피노자 관련 서적들의 번역이 지닌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 철학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지만, 그 개념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걸맞게 제대로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용어들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스피노자의 다른 개념들의 번역 문제라든가, 국역본들의 번역의 문제점들에 관한 논의는 다른 자리에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스피노자의 저서나 스피노자에 관한 저서를 번역할 때 유념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도 비슷하겠지만, 특히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된 책들을 번역할 때는 다음과 같은 원칙은 필수적으로 지켜져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역사적,이론적 맥락을 고려한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스피노자만이 아니라, 철학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요 철학자들의 번역에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이는 좀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철학자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자신만의 고유한 용어 또는 개념들을 전혀 만들어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려서부터 당대의 철학적, 지적 흐름과는 동떨어진 교육을 받았고 늦은 나이에야 거의 독학으로 당대의 선진 학문을 습득한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매우 독특한 글쓰기 전략과도 관련이 있다.

 

스피노자는 스타일이 없는 철학자라고들 한다. 다시 말해 늦은 나이에 라틴어 문법을 익히고,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이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려다 보니―실제로 스피노자는 자신의 모국어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훨씬 더 자신의 사상을 잘 표현했을 거라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매우 초보적이고 교과서적인 표현법만을 사용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들뢰즈가 잘 간파한 사실이지만, 겉보기에는 매우 건조한 수학적 논증방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윤리학』의 경우에도 정의와 공리, 정리 등으로 이어지는 엄격한 합리적 논증의 글쓰기 외에도, [서문]과 주석, [부록] 등에서 나타나는 매우 격렬하고 풍자적인 논박의 글쓰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지성교정론』과 『소론』,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및 『형이상학적 사유』, 『신학정치론』과 『윤리학』, 『정치론』 같은 스피노자의 저작들은 각 저작마다 상이한 글쓰기 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의 저작 안에서도 부분별로 상이한 스타일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글쓰기가 매우 의도적이고 고도로 계산된 것임을 잘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사용할 수 있는 언어나 어휘에 관해 매우 제한적인 선택의 여지밖에 없었지만, 이를 매우 적절하게, 또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던 철학자였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게 많은 철학적 어휘들을 빌려오지만, 논증과정에서 이것들을 상이하게 활용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실제로는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전환시킨다. “실체”와 “속성”, “양태” 같은 개념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 “형상적formalis-표상적objectivus”이라는 개념쌍이나 “적합한adaequatus”이라는 개념, “원인 또는 이유causa sive ratio”라는 개념 등도 그 사례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는 그의 철학의 성격과도 매우 잘 들어맞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나 홉스처럼 창시적인 철학자, 곧 철학사에서 어떤 새로운 혁명적 단절을 이룩한 철학자로 볼 수는 없지만, 대신 그는 이 혁명 속에서 이 혁명을 개조하려는 철학자, 또는―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혁명 속에서 혁명을 수행하려고 했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고유한 점은 데카르트나 홉스가 이룩한 혁명을 환영하고 여기에 동조하면서도[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들에 거스르는 중세 철학의 모습을 보려는 일부 해석가들의 관점은 지극히 부적절한 생각이다], 이들이 원래 추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 이를 활용할 줄 알았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어휘들이 데카르트나 홉스가 사용하는 어휘들과 동일하면서도 어떻게 의미가 달라지는지를 세심하게 따져봐야 하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그의 철학에서 어떤 독자적인 규정들을 부여받고 있는지 잘 검토해야 한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여러 개념들은 그의 후배 철학자들에게 전승되면서 또한 새로운 굴절과 변화를 겪게 된다. 뒤에서 우리가 살펴볼 “adaequatio”나 “adaequatus” 같은 개념이 그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스콜라철학에서 매우 전형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이 개념에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지만, 다시 이 개념은 라이프니츠를 거치면서 스피노자가 부여한 것과는 상이한 의미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데카르트에서 스피노자, (아르노의 매개를 거쳐) 라이프니츠 및 로크에 이르는 adaequatio 개념의 의미 변용의 역사는 대륙 합리론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그리고 경험론과의 쟁점을 이해하는 데―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에서도 아직 충분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라이프니츠 이후 adaequatio 개념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다가 후설의 현상학에서 다시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는 이유에 대한 해명은 근대 철학사를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 본문에서 마슈레가 상세하게 검토하고 있는 “규정” 개념이나 “자기원인” 개념이 헤겔에서는 매우 상이한 의미를 얻게 되는 것도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후의 이론적,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철학사 속에서 스피노자의 위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울 것임은 자명하다.

 

둘째는 스피노자 철학 체계 전체를 고려해서 번역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스피노자의 글쓰기 스타일에 관해 언급했지만, 스피노자 철학은 『지성교정론』에서부터 『윤리학』이나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변화하지 않고 처음부터 똑같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윤리학』으로 축소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윤리학』으로 완성되거나 완결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용어들이나 개념들은 각각의 저작들에 따라 상이한 의미로 쓰이는 때도 있고, 한 저작 내에서도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제대로 감안하지 못하면,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개념들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스피노자의 사상 자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

 

예컨대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notio communis”―보통 “공통 개념”이나 “공통 관념”으로 번역되는―라는 개념은 스토아학파나 데카르트에서 나타나는 같은 단어들과 어떻게 다른지, 또 『신학정치론』에서 사용되는 이 개념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이 개념의 의미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사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potentia”(많은 경우 “역능”으로 번역되는) 및 “potestas”(많은 경우 “권력”이나 “능력”으로 번역되는) 개념은 『지성교정론』에서 사용될 때와 『윤리학』에서 사용될 때, 또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에서 사용될 때 같은 의미를 갖는가 다른 의미를 갖는지, 또는 이 개념들은 『윤리학』 1부에서 사용될 때와 『윤리학』 5부에서 사용될 때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또는 『윤리학』에서 사용되는 “religio”와 “pietas”는 『신학정치론』에서 사용되는 이 개념과 동일한 의미인지 아닌지, 또 차이가 있다면, 이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의가 있는 것인지, 이런 점들이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면, 스피노자의 철학이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마지막 세번째 원칙은 우리말로 된 번역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말 번역이어야 한다는 이 원칙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해서 굳이 원칙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이 세번째 원칙이 위의 두 가지 원칙보다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하여 우리말에 없는 용어들이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쉽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스피노자의 “potentia/puissance” 개념을 사람들은 자주 “역능”이라는 말로 옮기는데, 이 번역어가 스피노자의 개념이 지닌 의미를 정확히 제시해 주는지 여부―내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제쳐두더라도,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은 이 단어를 우리말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affectus”를 “정동”으로 옮긴다든가 “appetitus”를 “욕동”으로 옮기는 것, “essentia singularis”를 “특이적 본질” 등으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가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또 이를 옮겨줄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우리말에 없다면, 이는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스피노자는 새로운 용어를 전혀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기존에 사용되던 철학어휘들을 빌려 사용하면서 이 어휘들에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했을 따름이다. 그러니 굳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도 않는 억지 단어들을 만들어내어―그런데 이것들 중 상당수는 일본식 용어들이다―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스피노자 철학용어들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낸다면, 대중들에게 그의 철학을 널리 이해시키는 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 철학이 이전의 철학 및 이후의 철학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도 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이전의 철학자들이 쓰던 어휘들을 계속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는 이를 전혀 다른 용어로 번역한다면, 스피노자의 개념이 어떤 철학을 어떻게 변용시키고 있는지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 후대의 철학자들이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또 어떤 식으로 차용해서 어떤 식으로 변용시키는지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스피노자와 관련된 철학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면 말이다.

 

이런 원칙들을 염두에 두고, 이제 두 가지 용어만 고찰해 보기로 하자. 내가 살펴보고 싶은 것은 “singulraritas”나 “essentia singularis”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singularis”라는 개념과, “adaequatio”나 “adaequatus”라는 개념이다[이외의 다른 개념들은 역주나 <용어해설>을 참고할 수 있으며, 스피노자의 인간학 및 정치철학과 관련된 개념들, 곧 “potentia” 및 “potestas”, “multitudo” 등과 관련된 문제는 발리바르의 『대중의 공포.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실린 <용어해설>에서 좀더 자세히 논의할 생각이다].

 

“singularis”라는 용어는 편지를 포함하는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주로 “사물”이라는 의미의 res와 결합하여, 복수 형태인 “res singulares”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singulraritas”나 “essentia singularis”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singularis”라는 용어는 『윤리학』에서 총 94번(2부에서만 57번) 사용되고 있으며, 이 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과관계 이론이나 유한양태 및 개체 일반에 관한 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선 이 개념을 “특수한”이나 “특수한 사물들”과 혼동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번역은 『윤리학』에서 단 두 차례 사용되고 있는 “res particulares”라는 표현에 어울리지, “res singulares”라는 스피노자의 고유 개념을 표현하는 데는 부적합하다[“res particulares”라는 표현은 스피노자 저작 전체에서 불과 4차례(『형이상학적 사유』에 1번, 『윤리학』에 2번, 『신학정치론』에 1번) 사용되고 있을 뿐이며, “particularis”라는 단어는 『윤리학』에 한 차례, 그리고 스피노자 저작 전체에는 불과 10번 등장할 뿐이다. 아울러 그 용례 역시 스피노자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표현하는 데는 쓰이지 않고, 데카르트 철학을 가리키거나 비전문적인 논의 맥락에서 등장할 뿐이다]. “특수한 사물들” 같은 표현은 보편, 특수, 개별이라는 스콜라철학적 분류법을 따르고 있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분류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 “res singulares” 같은 개념들은 이러한 분류법을 대체하기 위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뒤에서 그 이유를 살펴 보겠지만, 이 개념을 알튀세르의 『철학과 맑스주의』 국역본에서처럼 (일본식 용법을 따라) “개체”로 번역하거나 강영계 교수의 『에티카』에서처럼 “개물”로 번역하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 번역된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라는 들뢰즈 책의 국역본에서 이진경 교수와 권순모 씨는 스피노자 개념의 불어식 표현법인 “singularité”나 “essence singulière”라는 개념을 “특이성”과 “특이적 본질”로 번역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과 들뢰즈(가타리) 자신의 철학은―긴밀한 연관성이 있긴 하지만―별개의 문제이니까, 여기서는 “특이성”이나 “특이적 본질”이라는 번역어에 관해서만 논의를 한정하면, 나로서는 이들이 어떤 의미에서 이 개념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고 있는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특이성”이나 “특이적”이라는 표현은 매우 “낯설고 이상한”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리고 사실 불어의 일상 어법에서 “singularité”나 “singulière”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하지만 많은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이 개념은 일상적인 어법에서 쓰이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을 뿐더러,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의 의미와는 더 거리가 멀다[들뢰즈의 경우에는 수학이나 천체물리학에서 사용하는 “singularity” 개념을 자신의 철학 안으로 적극 수용하는데, 국내 자연과학계에서는 이를 “특이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얼마간 애매성이 있긴 하지만, 들뢰즈 철학에서 “singularité”를 번역할 때는 “특이성”이라기보다는 “독특성”으로 이해해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에서 “독특한 사물들res singulares”이라는 개념은 사실은 중세적인 “실체적 형상” 개념 및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근대적인 개체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며, 따라서 스피노자의 개체화 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자연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가 “가장 단순한 물체들”corpora simplicissima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전통적인 원자 개념 또는 개체 개념과 동일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른 내포를 갖는다는 데 있다.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명칭 자체가 가리키듯이,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더 이상 분할이 불가능한 원자 또는 개체―나누어질 수 없는in-dividuus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고려할 때―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스피노자에게 이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비실재적인 것, 따라서 사고상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에게 개체란 오히려 항상 복합적인 물체들이다. 여기서 아주 역설적인 결론이 나온다.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가장 단순하지만 비실재적이고, 반대로 복합 물체들은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이지만, 그것을 분할할 경우 그보다 더 하위의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분할-불가능한 것, 곧 개체들이다.

 

이는 스피노자가 부분과 전체 관계에 대해 기계론적인 합성 모델―본문에서 마슈레가 구축 개념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대신 동역학적이고 상대론적인(물리학적 의미에서)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결과다(『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의 자연학 소론과 편지 32 참조. 따라서 이를 좀더 정확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갈릴레이 물리학이 이룩한 혁신과의 관련 속에서 논의해야 하지만, 이는 다른 논문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애매한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연을 일종의 위계적 체계,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에서부터 하나의 개체로 표상되는 자연 전체에 이르기까지, 복잡성의 정도에 따라 순서적으로 배열되는 개체들의 체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연장extensa을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는 특성(스피노자의 의미에서)에 따라 동역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 안에 내적 역동성을 부여하고, 개체들을 원초적 요소가 아닌 인과연관connexio의 (잠정적인) 결과들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위와 같은 결론,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비실존적인 사고상의 존재이며, 개체들은 항상 이미 복합적이라는 결론을 역설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기계론적인 관점이나 목적론적인 관점으로밖에는 자연을 설명하지 못하는 철학자들의 한계―스피노자에게 이는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데카르트를 의미한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자연학적 관점을 철학적으로 좀더 정밀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독특성 개념이다. 이는 스피노자 자신이 독특한 사물에 대해 제시하는 정의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윤리학』 2부 정의 7에서 독특한 사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사물들을 독특한 사물들로 이해한다. 만약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동일한 활동에 협력하여 그것들 모두 하나의 동일한 결과의 원인이 될 때,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이런 한에서 동일한 하나의 독특한 사물로 간주한다.”

 

스피노자의 이 정의는 세 가지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다. 1) 이 개념은 개념적인 또는 의미론적인 층위에서 볼 때 유일한 것, 단독적인 것, 개체인 것은 원초적인 실재가 아니라, 어떤 복합적인 원인들, 따라서 어떤 규정된 관계들에서 파생된 결과라는 점을 지시한다. 곧 두번째 문장이 가리키듯이, 엄밀한 의미에서 독특한 사물, “res singularis”란 다수의 개체들이 동역학적 인과관계 속에 개입해서 어떤 결과를 산출했을 때 형성되는 것이다.

 

2) 더 나아가 이 정의는 인식론적(또는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는 res singulares, 곧 독특한 사물들이나 개체들을 원초적으로 분할-불가능한 것,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은 결과들만을 표상하고 원인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상상적 사유에 불과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이를 “개체”나 “개물”과 같이 번역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독특성 개념이 함축하는 비판적 효과를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올바른 번역으로 볼 수 없다.

 

3) 이 정의는 또한 화용론적인 측면에서는 singularis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를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바로 이러한 사용을 통해 이 단어의 철학적․이데올로기적 전제의 가상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라틴어에서 singularitas나 singularis는 말 그대로 하면 “홀로 있음”, “단독성”, “따로 떨어진”, “단 하나의” 등을 의미하며, 여성명사로 쓰인 singularis는 “과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정의에서는 이러한 일상적인 의미가 지닌 가상적 성격이 두 개의 문장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독특한 사물” 개념을 적절하게 번역하려면 이러한 효과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스피노자 철학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의 글쓰기의 고유성 역시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여기서 스피노자 철학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곧 이러한 내적 균열의 전략은 결국 계속해서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지반 위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여기에 손상을 줄지는 몰라도 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분명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스피노자는 전체적으로 데카르트와 홉스라는 근대 철학의 두 시조가 만들어놓은 이론적,이데올로기적 지반 위에서 출발하여 이를 내재적으로 교정하고 개조하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철학이 없었다면,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또는 적어도 그 합리적인 표현방식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는 이들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또한 스피노자가 비록 이들과는 매우 상이한 철학적 노선을 잠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그는 아직 그것을 현행적으로 전개하고 표출할 만한 개념적 장치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이론적 잠재력을 발굴해서 온전하게 전개시키려는 이론적 노력이 바로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발리바르나 네그리 등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 철학을, 그것의 고유한 한계로부터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스피노자 철학은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 속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파악할 수 있을 때, 스피노자 철학을 독자적으로 전유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adaequatio 또는―이 명사는 스피노자 저작에서 나타나지 않으므로―adaequatus나 adaequate라는 개념을 살펴 보자. 강영계 교수가 번역한 『에티카』에서 이 개념은 “타당한”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는 “적실適實한”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다른 한편 이 개념은 후설의 현상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국내의 현상학자들은 이를 “충전성充全性”, “충전적充全的”이라고 옮기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는 일본식 번역어로서[이를 우리말의 “충전充電”, 곧 “전기를 축적한다”는 단어나 “충전充塡”, 곧 “빈 곳이나 공간 따위를 메움”이라는 단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일본에서는 현상학에서뿐만 아니라 『윤리학』 번역에서도 이 용어가 그대로 사용된다. 하지만 현상학의 경우라면 몰라도, 적어도 『윤리학』 번역에서 이런 식의 용어가 그대로 사용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윤리학』 국역본에서 쓰이고 있는 “타당한”이라는 번역은 매우 특이해서, 역자가 무슨 의도로 이렇게 옮겼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반면 “적실한”이라는 말은 얼마간 절충적인―내가 왜 절충적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이다―번역어인 것으로 보인다. 곧 이 번역어는 『윤리학』 국역본의 “타당한”이라는 용어나 국내에서 일부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적합한”이라는 용어를 피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적합한”이라는 용어를 피하는 이유는 이 번역어가 스피노자의 adaequatus라는 개념이 거리를 두는 “대상과의 일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적합”이라는 말보다는 “內實”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적실”이라는 말이 스피노자의 adaequatus 개념을 표현하기에 더 적절하지 않느냐는 의도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적합”보다는 “적실”이 더 적절한 표현일까? 여기에 관해 역자들은 아무런 해명이 없는데, 사실 이는 대부분의 번역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을 번역한 박기순 씨는 예외다. 그가 제시한 몇 가지 번역어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는 “역주”나 <옮긴이 해제>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개념 번역에 관한 좋은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adaequatus나 adaequate는 “적합한”이나 “적합하게”로 번역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며, 이 번역본에서도 줄곧 이 역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이 역어가 적절한, 또는 적합한 번역어인가?

 

서양 철학사에서 adaequatus나 adaequatio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표준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에 관한 전통적인 규정에서 유래한다[물론 관념과 대상, 언어와 실재 사이의 일치에서 진리의 본성을 찾는 것은 훨씬 더 오래된 일이다. 여기서는 다만 adaequatio 또는 adaequatus라는 용어가 도입된 유래를 고려하고 있을 뿐이다]. 곧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를 “사물과 지성의 합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De veritate q.1, a.1; De veritate: Premiere question disputée de la vérité, Vrin, 2002, p.54)로 규정하는데, 이 때의 adaequatio라는 단어는 ad-aequare, 곧 “동등하게 만들다”는 뜻을 지닌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들뢰즈나 이 책에서 마슈레는 마치 adaequatus가 스피노자에게만 고유한 개념인 것처럼, 또는 데카르트에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또는 그런 인상을 주고 있지만), 사실은 데카르트에서도 이 개념은 매우 체계적인 용법을 지니고 있다. 다만 데카르트에서는 이 개념이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핵심 저작들에는 나타나지 않고, 『“성찰” 반박에 대한 답변』이나 『뷔르만과의 대화Entretien avec Burman』 같은 곳들 또는 일부 편지들에서 드물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데카르트는 이 개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데카르트는 이 개념을 아퀴나스처럼 “동등하게 만들다”, 또는 “적합하다”는 의미로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물에 대한 적합한 인식cognitio adaequata rei”은 대상이 되는 사물과 완전히 일치하는 인식, 곧 “알려진 사물 속에 실존하는 모든 특성들을 포괄”(『“성찰” 네번째 논박에 대한 답변』; AT판 7권, p.220)하는 인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경우에만 인식과 인식된 사물 사이에는 완전한 동등성adaequatio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과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근원적 양의성equivocité이라는 관점에서 이 개념에 고유한 신학적 규정을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완결성completio과 완전성perfectio 개념의 구분이다. 곧 데카르트는 유한한 피조물에게 적합한 인식, 사물이 지닌 특성들을 완전하게 파악하는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의미의 적합한 인식은 오직 신에게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적합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유한한 지성에게 참된 인식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또 참된 인식을 위해 꼭 적합한 인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은 얼마든지 완결된 인식, 곧 다른 관념들과의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AT판 7권 p.223 이하 참조).

 

따라서 데카르트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적합한 인식을 여전히 사물과 관념, 사물과 표상을 “동등하게 만들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만, 신과 피조물 사이에 적합한 인식과 완결된 인식, 또는 명석판명한 인식의 차이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지성교정론』 같은 초기 저작에서부터 말년의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이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 곳은 『윤리학』 2부 정의 4이다. “나는 대상과의 관계 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내생적 특성 또는 특징을 갖고 있는 관념을 적합한 관념으로 이해한다.” 스피노자는 이 정의에 다음과 같은 “해명”을 덧붙이고 있다. “나는 외생적 특징, 곧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를 배제하기 위해 내생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우선 “적합한adaequatus”이라는 개념과 “합치convenientia”라는 개념을, 각각 참된 관념의 내생적 특징과 외생적 특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적합한 관념은 대상과의 합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스피노자는 이미 1부 공리 6에서 “참된 관념은 자신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인 한에서 대상과의 합치라는 특성을 항상 이미 함축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이를 합치와 구분하여 말하려는 바는, 합치는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곧 스피노자의 적합성 개념의 핵심은 참된 관념을 참된 관념으로 만들어주는 내생적 특징, 또는 내재적 원인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본문에서 마슈레가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이를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만, 데카르트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좀더 지적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먼저 스피노자가 adaequatus 개념과 관련하여 데카르트가 공유하고 있는 점은 이 개념이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동등하게 만들다”라는 의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유한한 지성은 그 자체로는 적합한 인식, 곧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는 점 역시 공유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2부 정리 22 이하에서 전개하고 있는 부적합한 인식에 관한 논의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유한한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결코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일차적으로 데카르트가 신과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존재론적 간극을 설정하고 있는 데 비해, 스피노자는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무한자와 유한자, 실체와 양태 사이에 일의성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에 가깝게 말하면, 스피노자는 유한한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원인으로서의 무한 지성과 “동등하게 됨”으로써, 곧 적합한 원인causa adaequata(3부 정의 1)이 됨으로써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인식의 문제는 항상 윤리의 문제, 곧 능동화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관점은 또한 그 나름대로의 난점을 지니고 있지만,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adaequatio 또는 adaequatus 개념은 원래 이 개념에 부여된 의미, 곧 “동등하게 만들다”는 의미를 계속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이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사물과 표상, 또는 사물과 개념이 동등하게 되는지, 적합하게 되는지, 또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지에 관해서 그럴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철학사적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러한 흐름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독특성을 적합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용어상의 통일성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두 개의 개념에 관해 얼마간 장황하게―또는 너무 간략하게―논의했지만, 우리가 이처럼 긴 지면을 할애해서 이 문제를 논의한 목적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폄훼하자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스피노자라는―또는 다른 어떤 철학자나 이론가이든 간에―서양의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는 한 철학자, 하지만 국내에는 지금까지 거의 소개되지 못해온 철학자를 좀더 의미있게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간략하게나마 점검해 보자는 데 있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외국의 사상, 특히 서양의 사상을 소개하고 전유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값진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덕분에 국내의 지적인 환경이 놀랄 만큼 풍요로워졌다. 이제 그 노력들을 스피노자를 비롯한 다른 사상가들을 수용하고 전유하는 데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믿는다.

 

이 책을 번역하는 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이제이북스의 전응주 사장님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은 3년 전에 초역을 마쳤지만, 그 동안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다가 전응주 사장님의 도움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 철학과 관련하여 상업성을 노린 졸속 출판과 엉터리 번역이 횡행하는 세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좋은 책을 엄선하고 정성스러운 편집을 고집하는 전사장님의 이해와 배려가 없었다면 이 책이 이처럼 빛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이북스 직원 여러분들, 특히 서영심 편집장님과 김현경 씨의 노고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처음 이제이북스에서는 원전을 일일이 대조해서 교정을 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으레 내세우는 말이거니 했지만, 실제로 교정을 보면서 이 말이 전혀 허튼 소리가 아님을 실감했다. 국내에 생소한 스피노자 철학의 원고를 붙들고 오래 고생했을 이 분들에게 다시 감사드린다.

 

1999년 겨울에서 2000년 여름까지 이 책과 관련한 공부모임에 참석해서 내용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번역과 관련해서도 매우 유용한 제안을 해준 김문수, 김은주, 박상욱, 안소현, 이찬웅, 조현수, 한형식에게도 감사드린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루한 번역과 힘에 부치는 공부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처음 구입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책에 한 문장씩 서툴게 번역하던 게 1992년 여름이었고,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쁨이 결국 스피노자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 기쁨을 많은 독자들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나로서는 그보다 큰 보람이 없겠다.

 

 

200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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