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그런데 네그리 같은 사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론󰡕에서 처음으로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개념이 단지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윤리학󰡕을 포함하는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 전체를 재정초하는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곧 네그리에 따르면 대중들의 역량 개념은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절대적인 국가imperium omnino absolutum”라고 부른 이유를 해명해줄 뿐만 아니라, 󰡔윤리학󰡕 1, 2부에서 볼 수 있는 사변적인 존재론을 넘어서 스피노자 철학이 실천적인 구성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주춧돌을 마련해 준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네그리는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스피노자 철학의 혁신적인 의의(스피노자 철학의 “야생의 이례성” 또는 “야생의 별종”으로서의 스피노자)를 집약하고 있고,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을 측정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라는 개념에 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에 대한 평가에서도 네그리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운데, 이는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대중들의 역량 개념이 󰡔정치론󰡕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개념은 󰡔정치론󰡕에서 총 4차례 사용되고 있는데, 우선 국가의 권리 또는 통치권에 대한 정의에서 등장하고 있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주권imperium1)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TP 2장 17절)


그 다음 3장 2절에서는 대중들의 역량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처럼 인도되는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TP 3장 2절).


이 두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통치권 또는 주권을 정의하는 매우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신학정치론󰡕의 경우 주권을 주권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정치론󰡕의 이 두 구절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 구절들은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통치권의 기초로 명시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전개한 “역량의 존재론”과 좀더 부합하는 정치학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 실제로 󰡔정치론󰡕 2장 3-4절의 논의는 두 저작 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자연 실재들이 실존하고 활동하는 역량은 충만하게 현존하는 신의 역량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권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신이 모든 실재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고, 신의 권리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된 신의 역량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자연적 실재는 실존하고 활동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만큼의 권리를 자연적으로 지닌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실존하고 활동하는 역량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신의 역량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연권을 자연의 법칙들 자체로, 또는 모든 실재가 생산되는 규칙들, 곧 자연의 역량 자체로 이해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자연 전체의 자연권 및 따라서 각 개체의 자연권은 그것의 역량이 미치는 곳까지 연장된다atque adeo totius naturae, et consequenter uniuscujusque individui naturale Jus eo usque se extendit, quo ejus potentia. 결과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자연]의 법칙들에 따라 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최고의[주권적] 권리에 따라 하는 것이며, 그는 자연에 대해 자신의 역량만큼의 권리를 갖는다.(TP 2장 3-4절)


이 구절의 핵심 논점은 신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자연권의 존재론적 기초로 제시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1편에서 살펴봤듯이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주권자의 권리가 주권자의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고 말함으로써, 홉스 주권 개념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하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역량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과 자연권에 대한 규정 사이의 체계적 연관성이 분명히 해명되지 않고 있는 데 반해, 위의 구절에서는 이를 연역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자연 전체의 역량이 신의 역량과 다르지 않고 인간을 포함하는 각각의 자연적 권리가 그가 보유하고 있는 자연적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면, 대중들이 한 사회, 한 국가의 통치의 권리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더 나아가 2장 17절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인민의 역량”으로 이해하게 하고, 따라서 대중들의 역량을 민주주의 자체와 동일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부정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인민의 역량, 인민 자신의 통치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 또는 적어도 그 기초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스피노자는 위의 구절에서 분명히 통치권의 기초로서 대중들의 역량과 이러한 통치권을 실행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역량 자체가 아니라, 통치권이 실행되는 세 가지 형태 중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곧 통치권이 한 사람의 군주에 의해 행사되면 군주정이고, 법적으로 명문화된 규정이 아니라 주권의회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특정한 사람들(반드시 소수일 필요는 없다)에 의해 행사되면 귀족정2)이며, 반대로 법적 규정들에 따라 선출된 사람들이 통치권을 행사한다면 이는 민주정이다. 역으로 대중들의 역량은 민주정 국가만이 아니라 귀족정 국가 및 군주정 국가의 통치권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대중들의 역량 자체는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이러한 분류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형식적, 법적 규정에 불과할 뿐이며, 따라서 이런 근거 위에서 대중들의 역량과 민주정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은 일리가 있는데, 이는 특히 8장 3절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고려해볼 때 그렇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앞에서 우리가 말한 것과는 달리 대중들의 역량을 민주주의의 직접 연결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귀족정이 의지해야 하는 기초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으려면 먼저, 단 한 사람에게 양도된 통치권imperium과 충분히 큰 규모의 회의체로 양도된 통치권 사이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실로 상당히 큰 차이점이다. 첫째, (우리가 6장 5절에서 보여준 것처럼) 단 한 사람의 역량으로 통치의 부담을 전부 감당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충분히 큰 규모의 회의체concilio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회의체가 충분히 큰 규모다라고 긍정하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통치의 부담을 감당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에게는 자문관들consiliariis이 필요하지만 회의체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둘째, 왕들은 유한하고 회의체들은 영속적이다aeterna. 따라서 일단 회의체로 양도된 주권은 결코 대중들로 복귀하지 않는다atque adeo imperii potentia, quae semel in concilium satis magnum translata est, numquam ad multitudinem redit. 우리가 7장 25절에서 보여준 것처럼 군주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셋째, 왕의 통치는 왕의 연소(年少)함이나 질병, 연로함이나 다른 원인들 때문에 종종 취약한 경우가 있는 반면, 이런 종류의 회의체의 역량은 항상 하나로 동일하게 유지된다. ...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진 회의체에 부여된 통치권은 절대적이라고, 또는 이러한 조건에 아주 근접한다고 결론내리게 된다. 만약 절대적인 통치권imperium absolutum이 실존한다면, 이는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quod integra multitudo tenet일 수밖에 없다.(TP 8장 3절)


이 구절에서 스피노자는 집약적으로 군주정과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의 경우를 비교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볼 때 군주정의 취약점은 왕들의 유한성에 있는데 비해, 귀족정의 강점은 회의체들을 통해 영속적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지는 한에서 절대적 통치권에 근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처럼 충분한 다수가 절대적 통치권에 접근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면,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은 당연히 절대적 통치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은 민주정과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면, 민주정은 곧 절대적인 통치권, 절대적인 정체의 실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사회계약론을 사용하지 않은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제시될 수 있는 듯하다. 곧 사회계약은 어떤 식으로 제시되든 간에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권의 양도, 곧 자신의 역량으로부터의 소외와, 법적으로 형성된 초월적 권력인 주권자에 대한 예속―노예와, 신민 또는 시민 사이의 차이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을 함축하고 있는 데 반해, 방금 제시된 구절들의 논의에 따르면 󰡔정치론󰡕은 적어도 경향적으로나마 초월적인 주권적 권력에 대한 개인들의 예속을 전제하지 않는 정체, 곧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권력”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으며, 이를 “완전하게 절대적인 국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소 성급한 결론인데, 대중들의 역량 개념의 나머지 두 가지 용법들을 검토해보면 그 이유를 좀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가장 강력하고 자신의 권리를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국가는 이성의 기초 위에서 설립되고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국가다. 왜냐하면 국가의 권리는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처럼 인도되는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들의 연합은, 만약 국가가 건전한 이성이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바에 따라 최대한 운영되지 않는다면 결코 인식될 수 없다(TP 3장 7절).


국가의 권리가 대중들의 공통적인 역량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국가의 역량 또는 권리는 시민들 대부분이 국가에 맞서 결탁할 만한 이유들을 제공하는 한에서 감소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TP 3장 9절).


대중들의 역량을 직접 민주정과 일치시키고, 이로써 대중들의 역량을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과 동일시하는 관점은 스피노자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항상 유지하고 있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자(주권자는 꼭 인간 개인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차이를 대립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및 인간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정확히 해명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일차적인 문제는 존재론에서부터 인간학,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 철학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하지만 결코 각각의 영역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포텐샤potentia와 포테스타스potestas 개념3)의 구분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제한된 지면 안에서 이 두 가지 개념이 지니는 모든 차이점을 다 해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들은 지적되어야 할 듯하다. 우선 존재론적으로 볼 때 포텐샤/역량은 어떤 것을 생산하는 현행적이고 실제적인 힘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 이 힘의 실행의 필연성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권능은 초월자(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 한다)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곧 존재론의 영역에서 두 개념의 핵심적인 차이는 역량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4), 권능 개념은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주체의 의지의 무한성을 함축한다는 점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당대의 신학 및 존재론(특히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제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 17의 주석이나 1부 정리 33의 따름정리 2 같은 곳에서 역량의 관점에서 권능의 신학ㆍ 존재론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초월적 권능을 중심으로 자연 또는 실재를 설명하게 되면, 자연을 구성하는 실제적인 인과관계 및 그 일부로서 인간 자신의 본성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움직이는 초월적 신이나 주권자에 대한 맹목적인 예속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이는 특히 󰡔윤리학󰡕 1부 「부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학의 영역(또는 독특한 실재들로서의 “유한 양태들”의 영역)에서 역량은 코나투스 개념으로 표현된다5). 이처럼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의 차원에서 유한 양태들의 차원으로 옮겨올 경우 역량은 현행성actuality과 잠재성virtuality(또는 “영원성”)으로 분화되며, 능동과 수동의 갈등적인 경향 속에 기입된다. 현행성과 잠재성의 차이 또는 잠재성으로부터 현행성의 분화, 독립은 개체들의 개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량의 형상적 한계를 수반하며, 이러한 한계 내에서 역량의 양적 차이, 강도의 변이가 전개된다. 따라서 능동과 수동의 경향적인 분화는 현행성과 잠재성의 분리가 산출한 강도적 차이의 공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능동과 수동의 구분은 또한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윤리학󰡕 3부 정의 2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곧 (앞의 정의 1에 따라)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어떤 것이 따라나올 때, 나는 우리가 활동한다[능동적이다]nos tum agere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생겨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나올 때, 나는 우리가 활동을 겪는다[수동적이다]nos pati라고 말한다.”(E III D2)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볼 때 이 정의의 요점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1부의 마지막 정리 36이 말하듯이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실재는 그것이 실존하는 한 항상 원인으로서 어떤 결과들을 생산하며, 이것이 그의 역량을 구성한다. 따라서 모든 실재는 최소의 능동성을 함축하고 있다. 둘째, 하지만 이러한 역량의 실현은 적합하거나 부적합하게, 곧 “우리의 본성만으로” 이루어지거나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방식으로(또는 “완결적”이거나 “단편적이고 혼합적[곧 부분적]으로mutilus & confusus”) 이루어진다. 따라서 능동과 수동의 차이는 원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이 우리를 통해 산출된 결과들과 맺는 관계들의 차이를 가리킨다. 우리가 이 결과들을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전유(專有)할 때 우리는 수동적이며6), 우리가 완결되게 전유할 때(“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능동적이다. 따라서 수동에서 능동으로, 또는 그 이전에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운동은 해방의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존재론적ㆍ인간학적인 영역에서 사용되는 역량 개념을 (네그리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학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할 때 발생한다. 이 경우 󰡔정치론󰡕에 나타나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자의 권력 사이의 차이는 역량과 권능 사이의 차이로 이해되어, 역량은 긍정적이고 해방적인 힘으로 나타나며 주권자의 권력은 부정적이고 기생적인 지배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문제가 있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존재론이나 인간학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역량 개념을 부지불식간에 “주체/기체(基體)subjectum” 또는 개체의 모델에 따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 관점은 “신의 역량”이나 독특한 실재/인간의 역량에 대해 사고할 때 (자생적으로) 개체를 모델로 삼는 경향이 있으며, 이에 따라 신이나 독특한 실재들을 고립된 개체들로서, 그리고 신의 역량이나 실재들의 역량은 개체 또는 주체의 능력(주체의 의지에 따라 실행하거나 실행하지 않을 수 있는)으로 사고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에 고유한 관계의 존재론(또는 오히려 비(非)존재론meontology7))과 어긋나는 관점인데, 이러한 개체론적 관점은 처음부터, 개체에 구성적인, 그리고 개체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들로부터 개체를 분리시켜 사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령 네그리 같은 사람들이 “다중”을 구성의 “주체”로 설정할 때 문제가 되는 것8)은 단지 이러저러한 문헌학적 문제점들이나 네그리의 관점이 함축하는 막연한 낙관적 전망만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관점이 자칫 주체의 목적론에 빠져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학이 함축하는 진정으로 혁신적인 의의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9).

  따라서 이러한 주체의 목적론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체나 주체의 모델에 따라 파악된 역량론을 정치의 영역에 적용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관계론의 관점에서 역량 개념을 다시 사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정치의 영역은 역량 개념을 관계론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한 특권적인 장소가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국가의 기초를 더 이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의 기초 위에서 사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신학정치론󰡕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정치론󰡕 2장에서 좀더 체계적으로 전개된 전자의 관점은 법적 형식주의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규정하지 않고 역량의 관점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와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초월(론)적 정치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10). 하지만 이 관점은 역량의 문제를 여전히 개체론의 틀에 따라 사고한다는(또는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아직 일관된 관계론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여러번에 걸쳐 “주권자의 권리는 주권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학정치론󰡕은 주권의 문제를 주권자 개인(또는 집합적 개체)의 역량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는 반면, 󰡔정치론󰡕에서는 주권자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에 따라 주권의 문제를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나오게 된다11). 이런 의미에서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가 근대 자연권 이론과 단절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표일 뿐만 아니라 관계론적 관점에서 역량의 문제,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려는 스피노자의 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역량 또는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는 지배권력에 맞선 인민대중의 비판적인 힘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라는 좀더 근원적인, 그리고 좀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이 개념은 그 자체로 능동적인 것도 실정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하이데거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현사실적인faktisch”, 곧 어떤 원인도 목적도 없이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실존적(이 경우에는 사회의 실존이겠지만) 사태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대중들(의 운동)이란 정서적ㆍ관념적 연관망들의 집합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중들의 역량은 항상 능동성과 수동성의 갈등적인 경향 속에 들어 있으며, 항상 희망과 공포의 정서적 동요를 보여준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정치적인 의미의 역량, 곧 어떤 국가의 제도적 틀 안에서 존재하고 행사될 수 있는 역량이 아니라 법적ㆍ정치적 제도 바깥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힘(또는 폭력)이며, 이러한 힘은 항상 제도를 동요시키거나 전복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역량은 결코 안정된 지속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의 유지와 보존을 위한 기초로 사용될 수도 없다12).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자연적 역량이 실효성 있는 정치적 역량으로 표현되려면 항상 제도적 매개가 필요하다13)

  그러므로 이러한 법적ㆍ제도적 매개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이고 필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법적ㆍ제도적인 매개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자생적으로는 정념적이고 갈등적인 존재들로 남아 있는 개인들 및 대중들이 마치 이성적인 존재자들이 행위하듯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행위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으며, 스피노자는 이를 “마치 ~처럼veluti”이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대중들은 본성적으로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정신에 의해 실제로 인도되지는 않지만, 대중들의 역량이 국가의 보존과 안전을 위해 적절하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대중들은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것처럼, 법적ㆍ제도적 매개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국가의 근본 과제를 “국가의 평화와 안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국가의 평화와 안전은 “국가 형태의 보존imperii formam conservandam”(TP 6장 2절)에 달려 있으며, 국가 형태의 보존을 위해서는 대중들의 (정념적) 동요가 낳는 불안정성을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이라는 개념들은 상호 대립하는 개념들이 아니며, 주권은 초월적이고 기생적인 지배권력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처럼 두 개념을 상호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홉스가 설정한 구도의 (거울반영적인) 전도에 그칠 우려가 있다. 곧 홉스가 정치 권력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이를 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대중들을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하여 정치의 영역 바깥으로 몰아내야 했다면, 반대로 이와 같은 관점은 대중들 자체를 해방적인 주체, 또는 진정한 정치의 주체로 만듦으로써, 제도적인 정치의 공간 자체를 해체하고 말소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결코 주권이라는 개념을 부정적으로 폄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권의 절대성”이라는 홉스 정치학의 핵심 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개조하려고 노력했다14).

  이러한 노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치론󰡕에서 집요하게 나타나는 (數)의 논리, 또는 대중들이라는 개념의 통계학적/국상학적(國狀學的)statistical 활용이다(이에 관해서는 특히 Balibar 1997b 참조). 통계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대중들은 다수, 더욱이 하나의 통일된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수의 독특한 실재들, 개인들을 의미하며, 한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 이러한 다수는 국가의 생존을 뒷받침하는 물리적 기초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통치권 내지는 주권의 정치적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곧 이러저러한 주권자(그리고 이 주권자가 구현하고 있는 각각의 정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대중들 중 가장 큰 부분maximae partis multitudinis의 분노”를 자극해서는 안되며(TP 3장 9절, 7장 2절, 10장 8절 참조), 주권이 대중들의 손에 넘어가도록(“대중들로의 복귀”) 해서도 안된다(이에 관해서는 7장 25절 참조). 이는 사회적 관계, 국가 형태의 해체로 귀결되거나, 또는 적어도 국가 형태의 안정과 역량의 강화가 아니라 동요와 역량의 감소를 낳을 뿐인, 한 국가형태(또는 정체)에서 다른 국가형태로의 교체로 귀결될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통계학적/국상학적 관점에서 파악될 때 민주주의란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정체(政體)regime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으로 나아가려는 운동, 곧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람들을 통치 영역 안에, 회의체 안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는 예컨대 군주정에서는 군주 개인(또는 실질적으로 그를 조종하는 조신(朝臣)들과 권력가들)의 독단과 무능력에 따라 통치가 좌우되는 것을 막고, 민회에 심의권을 부여해서 가능한 한 다양한 의견들을 수합하고 왕은 결정권을 보유함으로써 주권의 통일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표현된다(이에 관해서는 특히 TP 6장 18-19절 참조. 그리고 7장 1절에 나오는 사이렌의 유혹에 맞서 자신의 몸을 묶은 율리시즈의 사례에 관한 스피노자의 논평 참조). 그리고 귀족정의 경우에는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진 회의체”를 구성해야 하며, 심지어 “대중들 전체integra multitudo가 귀족의 지위에 오를 수도 있다”(TP 8장 1절)는 거의 모순적인 주장에서 이런 사고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주권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존재론적 기초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대중들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확대할(또는 절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지만, 대중들의 역량을 합리화하고 그것에 결여된 유사-통일성(“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한 것처럼”)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정치, 곧 국가 형태의 보존의 기술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 정치학의 강점 중 하나는 이러한 대중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가 모든 국가의 근저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쉽게 보수주의적인(또는 엘리트주의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거나 홉스식의 인공주의적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또 더 나아가 그 이후의 혁명주의적인 전통과 달리 대중들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맹목적인 낙관으로 지성의 비관을 보충하려고 하지도 않고서도,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의 변증법을 통해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또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장치의 변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사고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11장 1절)로서의 민주주의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결론: 사회계약론의 해체와 정치학의 새로운 과제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의 모호성을 정정하면서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전제들과 양립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 원리, 곧 인간의 본성적 사회성이라는 테제를 제시하고 있다. 2) 이런 측면에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제시한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윤리학󰡕 3부 정리 27 이하에서 등장하는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정서적 관계망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들의 사회화 경향은 항상 이미 반사회화 경향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우리는 스피노자의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원초적 계약이라는 관념은 처음부터 성립 불가능하며,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중요한 문제는 사회계약론과는 달리 사회의 원초적 구성이나 법적 정당화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기초지음과 동시에 위협하는 정서적 관계, 곧 대중들의 운동을 조절하는 문제임을 알 수 있게 된다. 3)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치론󰡕에서는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중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을 수용하는 주요한 이론적 동기는 우중의 이성적ㆍ정치적 무능력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정치론󰡕에 등장하는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그가 계약론의 문제설정을 완전히 포기하고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이론적 기초 위에서 사고하려고 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이론적 노력의 핵심은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의 변증법을 통해 민주주의를 국가장치 변혁의 과정으로서 파악하려고 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정치론󰡕에 이르러 󰡔신학정치론󰡕에 남아 있던 당대의 자연권 이론의 요소들을 해체하고 관계론적 관점에서 정치학의 과제를 재정립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원초적인 개인 대 국가라는 추상적인 이원적 관계로 설정된 고전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구도는 해체되며, 이러한 정치철학의 핵심 요소로서 부르주아 법이데올로기가 은폐하는 자유주의 정치의 근본 과제, 곧 개인(주체)들의 생산과 재생산15)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스피노자 정치학은 아직 또다른 대결을 남겨 두고 있는 셈이며, 아마도 이러한 대결 이후에야 우리는 대중들의/대중들의 공포의 아포리아를 넘어선 스피노자 철학의 좀더 근본적인 이론적 기여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

1) 스피노자가 “주권”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은 대개 “숨마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특히 󰡔정치론󰡕에서 “imperium”이라는 용어(이 용어는 대개는 “국가”를 의미한다)를 “주권” 내지 “통치권”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이 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summa potestas”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imperium”을 “통치권”으로 번역하겠지만, 양자 사이에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정치론󰡕에서 “imperium”의 번역 문제에 관한 좋은 논의는 Ramond 2002 참조.

2) “우리는 단 한 사람이 아니라 대중들 가운데 선발되고selecti 우리가 이제부터 “귀족들Patricios”이라고 부를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의 수중에 통치권이 놓여 있는 국가를 귀족정이라 불렀다. 나는 분명히 일정한 숫자의 선발된 사람들의 수중에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이 국가와 민주정 국가의 주요한 차이점이기 때문이다. 귀족정 국가에서 통치에 참여할 권리는 오직 선출에 의존하는 반면, 민주정 국가의 경우에는 특히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권리나 우연(우리가 적절한 장소에서 설명하게 될 것처럼)에 의존한다.”(TP 8장 1절) “민주정과 귀족정 국가의 차이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곧 귀족정에서는 어떤 사람이 귀족위원이 되는 것은 오직 최고의회의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누구도 세습적인 투표권이나 공직담임권을 갖지 못하며, 우리가 이제 논의하려는 국가에서처럼 누구도 이러한 권리를 스스로 법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TP 11장 1절)

3) potentia는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 온 “역량”이라는 용어의 원어고, “potestas”는 우리말로는 “권능”, “능력”, “권력”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고전 라틴어나 중세 라틴어의 용법에서 이 두 가지 용어는 특별한 의미상의 차이 없이 함께 사용되었으나, 스피노자(및 홉스)에서는 상당히 뚜렷한 의미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두 개념의 구분은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피노자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 개념들이 어떻게 다르고 스피노자 철학 전반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견해가 다소 다르다. 들뢰즈의 경우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구분은 변용들을 생산하는 힘과 변용들을 수용하는 능력의 구분에 해당한다(특히 Deleuze 1969, 14장 참조). 네그리의 경우 이 두 가지 구분은 “다중”의 구성적이고 생산적인 힘 대 지배세력의 기생적이고 소외시키는 권력의 구분에 상응한다(Negri 1990; 1994). 그리고 최근의 몇몇 연구자들은 좀더 문헌학적으로 엄밀한 검토에 기초하여,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걸쳐 이 두 가지 개념이 구분되는 양상들을 해명하고 있다(특히 Terpstra 1994; Ramond 1998; Barbone 1999; Rice & Barbone 2000; Zourabichvili 2002 등 참조). 반면 영미권 연구자들은 (라이스와 바본을 제외한다면) 이 두 가지 개념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연구자들의 구분 노력에 대해 이전에는 매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던 에드윈 컬리Edwin Curley 같은 이는 최근 들어 이 두 가지 개념들이 존재론 및 정치학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Curley 1997). 이하의 논의는 이러한 차이점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에 관한 간단한 고찰이다.

4) 이런 의미에서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니체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

5)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스스로 존속하려는 노력은 이 실재 자신의 현행적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E III P7) “충동appetitus ... 은 인간의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 따라서 욕망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충동을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의 사람들과 관련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충동과 욕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E III P9s)

6) 따라서 수동성의 극한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우리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곧 이러저러한 타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량이 전유될 때다.

7) 이에 관해서는 Balibar 1993; 1996의 시사적인 언급들을 참조.

8) 대중들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 네그리의 입장에 관해서는 Negri 1990; 1994 참조.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multitudo”라는 스피노자의 용어는 “다중”이라는 용어로 번역하는 게 좋을 것이다. 스피노자 정치학에 관한 이러한 입장은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제국󰡕 및 󰡔다중󰡕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9) 사실 네그리 자신은 이러한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다중” 개념을 항상 “독특성” 개념과 결부시켜 사고하려고 한다(특히 Negri 1994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다중”을 “주체”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10)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Balibar 1997a pp. 72-78 참조.

11) 하지만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사이에 단면적인 단절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5장, 7장)은 스피노자가 이미 󰡔신학정치론󰡕에서 당대의 자연권 이론과 달리 관계론적 관점에서 정치적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 단절 관계가 성립한다면, 이는 경향적이고 다면적이지, 확정적이고 단면적인 단절 관계는 아니다. 

12) 󰡔신학정치론󰡕에서부터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가 당대의 대중운동들, 특히 폭군의 제거와 군주정의 폐지 등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인 운동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3) 스피노자가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권력”이라고 말할 때, “포텐샤potentia” 대신 “임페리움imperium”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4) 반면 󰡔신학정치론󰡕에서 “주권의 절대성”이라는 원리는 세속 권력과 구분되는 영적 권능의 공간을 마련하고(“국가 속의 국가”), 이에 기반하여 새로운 신정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당대의 칼뱅주의 신학자들에 맞서 종교적 권력을 정치적 권력에 종속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동원되었다.



참고문헌


1. 홉스와 스피노자 저작


Hobbes, Thomas(1994). Leviathan, ed., Edwin Curley, Hackett.

      (1998). On the Citizen, ed. & trans., Richard Tuc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Human Nature and De Corpore Politico, ed. & trans., J.C.A. Gaskin, Oxford University Press.

Spinoza, Benedictus de(1925). Spinoza opera, vol. 1-4, ed., Carl Gebhardt, Carl Winter.

      (1978). Traité politique, trans., Pierre-François Moreau, Réplique.

      (1999a). Tractatus-Theologico-Politicus/Traité théologique-politique, ed., Fokke Akkerman ed., trans., P.-F. Moreau & Jacqueline Lagrée, PUF.

      (1999b). Ethik, trans. Wolfgang Bartuschat, Felix Meiner. 

      (2000). Political Treatise, trans., Samuel Shirley, Hackett.

      (2002). Spinoza: Complete Works, trans. Samuel Shirley, Hackett.



2. 2차 문헌


마슈레, 피에르(2004).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진태원(2004).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 [철학사상] 제19집,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편.

Balibar, Etienne(1993). From Individuality to Transindividuality, Eburon: Delft.

      (1996). “Individualité et transindividualité chez Spinoza”, in Architectures de la raison. Mélanges offerts à Alexandre Matheron, P.-F. Moreau ed., ENS Editions;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

      (1997a). Spinoza et la politique, PUF(19851).

      (1997b). “La crainte des masses: Spinoza-l'anti-Orwell”, in Idem, La crainté des masses, Galilée;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

      (2005).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근간).

Barbone, Steven(1999). “Power in the Theologico-Political Treatise”, in Paul Bagley, ed.(1999). Piety, Peace, and the Freedom to Philosophize, Kluwer.

Barbone, Steven & Rice, Lee(2000). “Introduction”, in Spinoza(2000). 

Bové, Lauren(1996). La stratégie du conatus. Affirmation et résistance chez Spinoza,Vrin.

Chaui, Marilena(1997). “La plèbe et le vulgaire dans le Tractatus Politicus”, in Humberto Gianini et al.(1997) ed., Spinoza et la politique, Harmattan.

Curley, Edwin(1994). “Troublesome Terms for Translators in the TTP”, in Spinoziana, ed., Pina Totaro, Leo S. Olschki, 1997.

       & Moreau, P.-F.(1990) eds., Spinoza. Issues and Directions, E.J. Brill. 

Deleuze, Gilles(1969).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Den Uyl, Douglas J.(1984). Power, State and Freedom: An Interpretation of  Spinoza's Political Philosophy, Van Gorcum.

Feuer, Lewis(1958). Spinoza and the Rise of Liberalism, Beacon Press.

Giancotti Boscherini, Emilia(1970). Lexicon Spinozanum, Martinus Nijhoff.

Lazzeri, Christian(1998). Droit, pouvoir et liberté. Spinoza critique de Hobbes, PUF.

Macherey, Pierre(1995).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troisième partie. La vie affective, PUF.

Matheron, Alexandre(1969). Individu et communauté chez Spinoza, Minuit.

      (1990). “Le problème de l'évolution de Spinoza du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au Traité politique”, in Curley & Moreau(1990).

Montag, Warren(1998). Bodies, Masses, Power: Spinoza and His Contemporaries, Verso.

Moreau, Pierre-François(1994). Spinoza: Expérience et éternité, PUF.

      (2003). “La place de la politique dans l'Ethique”, in Chantal Jaquet et al., Fortitude et servitude. Lectures de l'Ethique IV de Spinoza, Kimé.

Negri, Antonio(1990). The Savage Anomaly, trans. Michael Hard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19811).

      (1994). Spinoza subversif: Variations (in)actuelles, Kimé(19921).

Prokhovnik, Raia(2004). Spinoza and Republicanism, Palgrave Macmillan.

Ramond, Charles(1998). Spinoza et la pensée moderne, Harmattan.

      (2002). “La souveraineté chez Spinoza”, in Yves Charles Zarka, ed., Penser la souveraineté à l'époque moderne et contemporaine, 2 vols., Vrin, 2002. 

Remaud, Olivier(1997). “La question du pouvoir: Foucault et Spinoza”, Filozofski Vestnik, no.2, 1997. 

Rice, Lee(1990). “Individual and Community in Spinoza's Social Psychology”, in  Curley & Moreau(1990).

Terpstra, Marin(1994). “What Does Spinoza Mean by “potentia multitudinis”?”, in E. Balibar et al. eds., Freiheit und Notwendigkeit, Königshausen & Neumann, 1994.

Tosel, André(2000). “La philosophie politique au miroir de Spinoza”, Actuel Marx  28.

Zourabichvili, François(2002). Le consérvatisme paradoxale de Spinoza, PUF.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poria 2004-12-2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이 글에는 각주 15번이 빠져 있네요.

릴케 현상 2004-12-24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을 쓰시느라 그렇게 뜸하셨군요. 저도 하루하루 들어오는 태클들을 피하느라 좀 뜸한 편입니다만^^

balmas 2004-12-2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어떤 태클들을 당하시는지 궁금하네요.^^

크리스마스 연휴에 조금 있으면 연말연시인데, 아무쪼록 애인분과 잘 보내시고, 내년에도 건강하고 직장생활 잘 하시기를 ...


2004-12-25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