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서문 

    1992년 여름, 나는 아제르바이잔Azerbaijan과 아르메니아Armenia간의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트랜스코카시안Transcaucasian지역의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를 방문하면서 앞서 구유고슬라비아에서 관찰한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발칸의 과거로의 퇴행이 아니라 전세계의 탈 공산주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현재의 특수상황이었다. 집에서 만든 유니폼을 입은 젊은이들, 절망적인 망명자와 약탈자, 신참 정치인들이 자리잡은 크닌Knin(당시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안 공화국의 수도라고 스스로 공포한)의 거친 서부적 기류와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는 꽤 독특해보였다. 그 이후에 나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의 성격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아프리카에서의 체험적 경험을 가지고 있던 동료를 통해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와 같은 곳에서 발생한 전쟁들과 내가 동유럽에서 주목했던 점들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타지에서 겪었던 전쟁의 경험은 발칸과 구소련에 대한 나의 이해를 설명할 수 있게 하였다.

    내 중심 논의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특히 아프리카와 동유럽에서 새로운 종류의 조직화된 폭력organized violence이 최근 지구화시대의 한 흐름이 되었다는데 있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폭력을 '새로운 전쟁 New war'으로 묘사한다. '새로운 new'이라는 이 용어는 2장에서 개괄하게 되는 이전 시대로부터 도출된 지배적인 전쟁에 대한 인식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다음 장에서 좀 더 분명하게 구별되겠지만 새로운 전쟁이란 용어가 전쟁(보통 국가간, 또는 정치적 동기를 위해 조직된 정치적 집단들 간의 폭력으로 정의되어진), 조직화된 범죄(사적인 목적들, 통상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사적으로 조직된 집단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 그리고 인권에 대한 광범위한 폭력들(정부나 정치적으로 조직된 집단들이 개인에게 저지르는 폭력)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지만, 새로운 종류의 폭력의 정치적 본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쟁 war'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대부분의 문헌에서 새로운 전쟁은 내전, 아니면 '저 강도 전쟁 low-intensity conflict'으로 묘사된다. 설사 이러한 전쟁의 대부분이 지역화 되어있다고 해도, 이들은 무수한 다국적 관계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내부와 외부, 침략(해외로부터의 공격)과 억압(국가 내부로부터의 공격), 심지어 지역적과 지구적 사이의 구별은 지속되기 어렵다. '저 강도 전쟁' 이라는 용어는 게릴라 전투나 테러리즘을 설명하기 위해 냉전 시기에 미군에 의해 만들어졌다. 비록 냉전 시기의 소위 저 강도 전쟁으로부터 새로운 전쟁의 진화를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들은 사실상 포괄적인 용어안에 뭉뚱그려져도 구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저자들을 새로운 전쟁을 사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전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폭력의 사유화가 이러한 전쟁의 중요한 요소인 반면, 실제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정부와 비정부, 비공식과 공식, 경제적인 이유로 또는 정치적인 동기로 행해진 것 사이의 구별은 쉽게 적용될 수 없다. 더 적절한 용어는 아마도 몇몇 논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탈(후기) 근대'일 것이다. '새로운 전쟁'과 같이, 그것은 이러한 전쟁을 고전적인 근대성의 특징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전쟁으로부터 구별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또한 가상의 전쟁과 사이버공간에서의 전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더구나 새로운 전쟁은 전 근대적인 요소와 근대적인 요소 또한 포함하고 있다. 결국 마틴 쇼는 '퇴보된 전투 degenerate warfare'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십세기의 총력전과 그들의 집단학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용어는 특히 군사력에서의 국가체제의 쇠퇴를 주목하게 한다.

    미전략가들 사이에 군사혁신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에 대한 논의가 있다. 이 논의는 정보 기술의 도래가 미래의 전투에 대한 심오한 암시와 함께, 탱크와 비행기의 출현만큼이나 의미심장하고, 심지어 마력에서 기계적인 힘으로의 이동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혁신은 군대와 전쟁의 세습된 제도적 구조에 속하는 논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쟁을 새로운 기술이 과거로부터 대체로 단선적인 확장 안에서 발전한다는 전통적인 모델로 상상한다. 더구나 그 기술들은 냉전 시대의 상상된 전쟁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유지하기위해 디자인되고 자국의 사상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이들은 대형의 공중폭격 spectacular aerial bombing을 선호했는데 , 왜냐하면 이것이 공중파괴라는 고전적 전쟁의 양상을 재현하면서 지상에서의 현실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보드리야르Baudrillard의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유명한 논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은 많은 시민 사상자를 초래했음에도, 상대적으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며 이라크에서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헤르체코비니아와 소말리아에서도 사용되었다.  

    군사혁신이 있었다는 시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사회관계에서의 변화가 새로운 기술의 사용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전투의 사회적 관계에서 혁명이지, 기술에서의 혁명이 아니다. 수백, 수천의 쿠르드인과 시아파가 죽은 1991년의 이라크전쟁의 경우도 웅장한 전시적 효과보다 나의 새로운 전쟁의 개념으로 더 잘 설명이 되는 실제적 전쟁들real wars이 있다.

    나는 새로운 전쟁이 지구화라고 알려진 과정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의미하는 지구화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문화적인 지구적 상호연결interconnectedness의 강화이다. 내가 근대 혹은 그 이전의 시기에 그 근원이 있다는 논의를 받아들이더라도, 나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지구화를 최소한 부분적으로 정보 기술의 혁명과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처리에서의 극적인 향상의 결과로서 설명될 수 있는 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상호연결의 심화 과정은 통합과 분열, 균질화와 다양화, 지구화와 지역화 모두를 포함하는 모순적인 과정이다. 새로운 전쟁은 종종 지구적 문제world affairs의 과도기에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힘의 공백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냉전 종결의 결과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잉여 무기의 유효,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 전체주의 제국의 붕괴, 초강대국에 의지하는 종속체제에 대한 지원철회와 같은 냉전종결의 결과가 새로운 전쟁의 중요한 방식으로 공헌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냉전 종결은 동시에 동부권이 영토 절대주권의 마지막 보루의 해체라는 피할 수 없는 지구화의 침략에 굴복하여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문을 연' 그 순간과 같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구화의 영향은 새로운 전쟁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가시적이다. 이 전쟁의 지구화적 실재는 국제기자, 용병부대와 군사고문, 이주자 집단의 자원봉사자와 진정한 국제 에이전시 부대인  옥스팜Oxfam,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s, 인권감시협회Human Rights Watch, 국제적십자the International Red Cross과 같은 비정부기구(NGO)들부터 유엔난민고등판무관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UNHCR), 유럽연합the European Union(EU), 유니세프the United Nations Children's Fund(UNICEF), 아프리카통일기구the 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OAU)와 유엔United Nations(UN)과 같은 국제기구와 평화유지군까지 포함하는 범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전쟁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고, 팩스, 이메일과 위성 텔레비전에 접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달러나 독일 마르크 또는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지구화된 계급의 일원과 지구화 과정에서 배제되고 전자의 박애주의적 도움을 받거나 그들이 팔거나 교환한 것으로 살아가며, 길 위의 바리케이드, 비자와 여행 경비에 의해 활동이 제한되는 사람들, 그리고 포위, 강제된 기아, 지뢰 등의 희생자가 되는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종류의 지구적/지역적 분리를 함축하고 있다.

    지구화에 대한 연구의 주요한 관심은 영토에 근거한 주권의 미래에 대한- 즉, 근대 정부의 미래에 대한- 지구적인 상호연결의 함의와 연결되어야한다. 새로운 전쟁은 정부의 자주성의 쇠퇴와 정부의 해체라는 몇몇 극단적인 경우에서 등장했다. 특히 이는 합법적으로 조직화된 폭력의 독점이 쇠퇴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 독점은 위에서부터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붕괴되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동안에 시작된 군사력의 초국가화에 의해 위에서부터 침식되어왔고, 냉전 동안의 블록 시스템에 의해서, 그리고 전후 시기에 발전한 무장력들 사이의 무수한 초국가적 결합들에 의해서 제도화되었다. 다른 국가에 대해 일방적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성장하는 군사 기술의 파괴성과 특히 군사부분에서의 국가와의 증가하는 연계성이라는 실질적인 이유에서 기인한다. 오늘날에는 1, 2차 세계대전 동안 경험한 것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는 큰 규모의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는 개별적 정부나 일련의 정부 집단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 더구나 군사 동맹, 국제적인 무기 생산과 교역, 다양한 형태의 군사 협력과 교환, 무기 통제 협정 등이 지구적 군사 통합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국제적 규칙의 진보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일방적인 공격이 위법이라는 원칙은 1928년의 켈로그-브리앙Kellog-Briand 조약에서 처음으로 성문화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후, UN 헌장과 도쿄와 뉘른베르크Nuremberg의 전범 재판에서 사용된 논증을 통해 강화되었다.

    동시에, 조직화된 폭력의 독점은 사유화에 의해 침식된다. 정말 '새로운 전쟁'이 근대국가가 전개해온 과정들의 전복의 과정에 속하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2장에서 주장하듯이, 근대국가의 성장은 전쟁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지배자들은 조세와 차관을 증대하고, 비효율성, 부패, 범죄의 결과로서의 낭비를 제거하며, 무장군대와 경찰의 조직화, 사병철폐, 경제력과 인력 육성을 위해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이 국가의 배타적인 분야가 됨에 따라 다른 국가에 대한 전쟁의 파괴성의 성장은 안보의 성장과 대응해갔다. 따라서 '시민'이라는 말은 국내를 의미하게 되었다. 새로운 전쟁은 경제의 하락으로 인해 세입이 줄고 조직화된 폭력의 증대와 준군사 집단의 등장, 정치적 합법성의 소멸의 결과로 급속히 사유화된 범죄, 부패, 비효율성, 그리고 폭력이 확산된 국가에서 발생한다. 외부적인 미개함barbarity과 내부적인 문명성civility 사이의 구별, 합법적인 무기 소지자로서의 전투부대와 비전투부대 사이의 구별, 군인이나 경찰, 범죄자 사이의 구별이 무너지고 있다. 국가간 전쟁의 잔인함은 아마도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조직화된 폭력의 새로운 유형은 더욱 만연하게 되겠지만 아마도 덜 극단적일 것이다.

  3장에서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전쟁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을 새로운 전쟁의 주요 특징을 설명하기위한 예시로 사용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은 다른 지역에서의 전쟁과 많은 특징들을 공유한다.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것은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어떤 새로운 전쟁보다도 많은 물자- 정부, 비정부적인- 들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일면으로는 이것이 사례 연구로서 전형적이지 않음을 뜻한다. 반면에 그것은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상이한 경험들이 도출되는 일반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예가 되고, 동시에 새로운 전쟁을 관리하는 다른 방법들이 실험되는 연구실이 된 것이다.

    새로운 전쟁은 목표, 전투수단, 자금조달 방법에서 이전 전쟁과 대비될 수 있다. 새로운 전쟁의 목표는 이전 전쟁의 지정학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목표와 대조적으로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에 대한 것이다. 4장에서 나는 지구화의 맥락에서 이전 시기의 영토적/이데올로기적 분할이 내가 세계시민주의라고 부르는 보편주의자, 다문화적 가치들을 포함한 것과 특수주의적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particularist identities 사이에서 등장한 정치적 분할에 의해 대체되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할은 지구화의 진행부분과 여기서 배제된 두 부분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분할의 두가지 방식)이 동일하게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지구화된 계급은 배타적 정체성에 기반한 초국적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이다. 반면에 지역적 수준에서 분리주의 정치를 거부하는 용감한 개인들도 많다.

    나는 분리적 정체성 - 국가, 종족, 종교, 언어적 - 에 기반한 그 주장이 정체성의 정치에 의해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정체성의 충돌을 포함한다. 그러나 나의 관점은 이러한 이전의 정체성들이 국가 이익의 개념이나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하는지에 대한 미래지향적 사고와 관련되어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유럽의 민족주의나 탈식민적 민족주의는 해방운동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는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과 관련된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개념들의 표지들에 기반하여 힘을 북돋는 주장에 대한 것이다. 때론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는 냉전이나 식민주의에 속박된 이전의 증오들의 부활일뿐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의 정치의 서술이 기억과 전통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1세대 탈식민 지도자들의 국가 건설 수사학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과 같은 정치적 합법성의 실패라는 상황에서 재창조되었다. 이러한 퇴행적 정치 프로젝트는 미래지향적 프로젝트의 부재 속에서 등장한다. 모든 것에 열려있고 따라서 통합하는 경향이 있는 정치와는 달리 정체성의 정치의 이러한 유형은 태생적으로 배타적이며 따라서 분열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지구화와 관련된 정체성의 정치의 새로운 흐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첫 번째 흐름은 지구적-지역적, 국가적-초국가적인 것이다. 다수의 경우, 향상된 교통, 통신으로 영향력이 매우 강화된 주요한 이주자 공동체들이 있다. 발전한 산업국이나 산유국에서 이질적인alienated 이주자 공동체는 계획과 자금과 기술을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아주 다른 상황에 그들 자신의 환상과 좌절감을 강요한다. 두 번째로, 이 정치는 새로운 기술의 사용을 가능케 한다. 미디어에 의해 정치적 동원의 속도는 급속히 증가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TV와 라디오, 비디오의 영향력은 거대하다. 새로운 정치의 주역들은 특수한 문화적 정체성의 상표를 드러내는 표지로 구성된 지구적 대중 문화의 상징- 벤츠, 롤렉스 시계, 레이반 선글라스- 들을 보여준다.

    새로운 전쟁의 두 번째 특징은 전투 방식의 변화이다. 새로운 전쟁의 전략은 게릴라전과 게릴라 진압군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비록 그들은 매우 다르지만. 통상적인 전쟁에서 목표는 영토의 포획이다. 군사적인 의미에서 전투는 전쟁의 중대한 장encounter이다. 게릴라전은 전쟁의 일반적인 특징인 군대의 대규모의 밀집을 피하는 방법으로 발전해왔다. 게릴라전에서 영토는 군사적 진출보다는 주민들의 정치적 통제를 통해 획득된다. 그리고 전투는 가능한 피한다. 새로운 전쟁 역시 전투를 피하고 주민들의 정치적 통제를 통해 영토를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게릴라전은 최소한 이론적으로 마오쩌둥과 체 게바라와 관련되어있고, '가슴과 마음hearts and minds'을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전쟁은 진압군으로부터 '공포와 증오fear and hate'를 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요의 기술을 빌려온다. 목표는 모든 이들의 상이한 정체성identity과 의견들을 제거함으로서 주민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쟁의 전략적 목표는 정치적, 심리적, 경제적인 위협 기제인 집단학살, 강제적 재정착과 같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민 추방이다. 이것이 이러한 모든 전쟁들에서 피난자, 이주자들이 극적으로 증가하고 대부분의 폭력이 민간인civilian들에게 행사되는 이유이다. 세기의 전환기에 민간인 사상자에 대한 군인의 비율은 8:1이었다. 오늘날 이는 거의 역전되었다. 즉 1990년대 전쟁에서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간의 비율은 대략 1:8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성문화된 전시법과 전쟁의 고전적 규약에 따라 금지된 비전투원에 대한 잔혹한 행위, 포위, 역사적 기념물 파괴와 같은 행위들이 이제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 전략의 핵심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낡은 전쟁의 전형인 종적으로 조직된 위계적 단체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런 단체들은 준군사조직들, 지역 군벌들, 범죄집단들, 경찰력, 고용된 무장력과 반체제적 단위들을 포함하는 정규군과 같은 서로 다른 종류의 집단들의 이질적인 범위까지 포함하는 전쟁을 수행한다. 조직상의 관계로 그것들은 매우 분산되어있고, 대립과 협력이라는 반대되는 측면의 혼합을 통해서 작동한다. 그들은 우리가 '고급기술' - 예를 들어 스텔스 전폭기나 크루즈 미사일- 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발전된 기술을 사용한다. 지난 50년 동안 경무기는 탐지불가능한 지뢰, 가볍고 사용하기 쉽고 정확해서 아이들에 의해서도 작동가능한 작은 무기들과 같은 중요한 발전을 이루어왔다. 이러한 발전은 동시에 이질적인 전투집단들 사이의 협상, 중재, 조정을 위해 휴대폰이나 컴퓨터 연결망과 같은 근대적 통신수단의 사용을 가능케 한다.

    새로운 전쟁이 이전의 전쟁과 대조적인 세 번째 특징은 내가 새로운 '지구화된' 전쟁 경제global war economy라고 부르는 것으로, 5장에서 전투 방식과 함께 자세히 서술했다. 새로운 지구화된 전쟁 경제는 1,2차 세계대전의 전쟁 경제와 거의 정확히 대조를 이룬다. 세계대전의 전쟁경제는 중앙집중화되고centralized 총체적이고totalizing 독재적autarchic이었다. 새로운 전쟁 경제는 분산적이다. 전쟁에의 참여는 낮고 실업은 극히 높다. 뿐만 아니라 이런 경제들은 외부적 자원resources에 강하게 의존한다. 새로운 전쟁 경제에서는 지구적인 경쟁, 물리적 파괴, 정상적인 무역의 중단 등으로 인해 국내 생산은 극적으로 줄어들고, 이에 따라 세입 역시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 단위들fighting units은 약탈, 암시장 혹은 외부로부터의 원조를 통해 자금을 스스로 조달한다. 후자(외부로부터의 원조)는 이주자들로부터의 송금, 인도주의적 원조에 대한 '과세', 주변 국가로부터의 원조, 무기나 마약 혹은 석유나 다이아몬드처럼 가치있는 상품들에 대한 불법 무역과 같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 모든 원천들은 반복되는 폭력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의 논리는 이런 전쟁 경제의 작동위에 세워져있다. 전쟁으로 둘러싸여 사회적 관계를 퇴보시키는 이런 상황은 난민, 조직적인 범죄, 소수민족 등을 통해 퍼져나가는 경향이 있다. 발칸지역, 코카서스지역,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의 뿔 지역(북동부, 소말리아인근), 중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같은 지역의 전쟁 경제 집단, 혹은 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경제 집단들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하는 여러 당파parties들은 공포와 증오를 뿌린다는 목적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불안정하고 의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서 서로 도와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실제로 동유럽과 아프리카 모두에서, 군사·경제적 양 측면에서 상호 협력하는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정치를 신봉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 공공의 도덕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종종 최초의 공격의 목표가 되는 민간인 중에 포함된다. 따라서 새로운 전쟁은 서로 다른 언어, 종교, 민족적 집단 사이에서 출현하지만, 이 전쟁들은 모두 분리적 정체성의 정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문명과 다문화주의의 가치를 억압하는 점에서 연합 전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전쟁은 배타주의와 세계시민주의 사이의 전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전쟁에 대한 이런 분석은 갈등conflict을 다루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6장에서 이를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들은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 가지들 사이의 전투이기 때문에 포괄적인 접근은 실패하기 쉽다. 1990년대 초에는 인도주의적 중재가 민간인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단히 낙관주의적 전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도주의적 중재의 수행은 새로운 전쟁의 특징에 대한 근시안으로 인해 제한되어왔다고 주장하고 싶다. 전임자로부터 인계된 권력 위임mandate의 존속, 새로운 전쟁을 전통적인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은 인도주의적 중재가 전쟁을 막는데 왜 실패했는지 뿐만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중재가 사실상 전쟁이 유지되도록 도와왔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전쟁을 하는 당파에게 중요한 수입의 원천이 되는 긴급 구호 식량의 제공, 전쟁범죄자들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는 전범의 정당화 시도, 배타주의자들의 권력 장악exclusivist assumption에 기반한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려는 노력의 사례들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장기적인 해결책의 열쇠는 합법성을 회복하는 것, 공적인 권위로 조직화된 폭력에 대한 통제를 재건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역적이든, 국가 차원이든, 지구적 차원이든 말이다. 이것은 공적인 권위에 대한 신뢰를 다시 세우고 이를 지지하도록 하는 정치적 과정인 동시에 이 공적인 권위가 작동할 수 있도록 법적 규칙을 다시 만드는 법적 과정이기도하다. 이는 특수성의 정치에 기반해서는 달성될 수 없다. 지구적/지역적인 분리를 만나게 하고, 여러 가지 가치들이 민주적으로 놓여지는 것을 포함하여 합법성을 다시 세울 수 있는 대안적인 미래지향적 세계시민주의적 정치 프로젝트가 배타주의 정치에 맞서 제안되어야 한다. 모든 새로운 전쟁에는 배타주의 정치에 반대해서 투쟁하는 지역적인 사람들과 공간이 있다. 스스로를 후치Hutsis라고 부르면서 대량학살에 맞서 자신들의 지역공동체를 지키는 후투족과 투치족,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특히 사라예보와 투즐라에서 시민의 다문화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민족주의자, 북서소말리아 지역에서 평화를 협상하는 원로들이 그 예이다. 필요한 것은 지역에서 문명을 지키고자하는 사람들과 폭력을 제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을 수호하는 초국가적 단체들 사이의 연대이다. 이런 정책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구성요소를 포함할 수 있다. 이것은 전쟁에 대한 법과 인권에 대한 법을 모두 포함하는 국제 법에 바탕을 둔 세계시민주의적 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국제법의 틀 내에서 작동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평화를 지키는 것은 세계시민주의법 시행이라고 다시 개념화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새로운 전쟁은 전쟁, 범죄, 인권 침해의 혼합체이기 때문에 세계시민주의법 시행의 행위자는 경찰과 군대의 혼합체여야 한다. 나는 또 시민들 사이의 관계와 제도적인 관계라는 사회적 재건을 포함하는 재건의 새로운 전략이 구조적인 조장이나 인도주의적 접근이라는 현재의 지배적인 접근방식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지구적 질서에 대한 논쟁과의 관계에 대해 썼다. 새로운 전쟁이 아프리카와 동유럽,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지구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지구화와 전지구적인 네트워크가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 전쟁들이 전지구적으로 보도되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묘사한 새로운 전쟁의 특징들은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도 발견된다. 미국의 우익 민병대militia는 동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준군사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사설 보안업체 직원이 경찰보다 2배이상 많다고 보고되고 있다. 정체성의 정치의 돌출과 기존의 정치에 대한 환멸의 증가는 남과 동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다. 서유럽과 북미의 도시 내부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전쟁으로 묘사될 수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선진산업세계는 통합되고 세계의 가난한 지역은 파편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북에서는 통합의 경향이 강하고 남과 동에서는 분산의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세계의 모든 부분이 통합과 분산의 결합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제 지구상에서 한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부터 격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조직화된 폭력의 특징 변화에 대한 나의 분석이 현실에 기반한 것이라면, 우리가 이슬람 대 기독교 식으로 정체성에 기반한 양극 혹은 다극의 세계질서를 다시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아프리카나 동유럽 지역같은 곳에서 무정부주의가 대안으로 포함될 수 있다는 생각 모두 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 당연히 그래야하겠지만 이것이 세계시민주의적 프로젝트가 그 적용에 있어서는 지역적이거나 지방적이라 하더라도 지구적인 프로젝트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이 책은 주로 새로운 전쟁의 직접적인 경험, 특히 발칸 지역과 트랜스코카시안 지방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헬싱키 시민의회HCA의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고, 헬싱키 시민의회의 지역 지부에서 일하는 활동가나 비판적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HCA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의 대리인 자격을 부여받아서 전쟁 동안에 지역의 활동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그 나라들을 직접 가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국제 사회의 정책을 수행할 책임이 있는 다양한 단체들에 접근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HCA의 의장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런 생각들을 설명하고 지역 부문에 대해 각국 정부나 EU, NATO, OSCE같은 국제 기구들에게 제안하는 것이 내 임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학문적으로 관계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는 동료들과의 교류와 독서, UN 대학과 유럽위원회의 조사 프로젝트를 통해 추가된 사항들을 알게 되었고 이를 내용에 포함시켰다. 특히 이제는 매일 인터넷을 통해 받을 수 있는 전자메일과 뉴스 요약본, 도움을 요청하는 탄원과 모니터링 리포트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정보를 제공하고, 나의 주장을 실례를 통해 뒷받침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이 책의 목표가 단순히 정보전달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목표는 다른 관점,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개인의 현장에서 나온 다른 관점, 다양한 국제적인 토론의 광장forum에서의 나의 경험들을 통해 형성된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세계의 많은 부분을 파괴하고 있는 비극이 끝나려면 반드시 착수되어야 하는 폭력과 전쟁의 형식을 재개념화 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실질적인 제안이 유토피아적으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확신이라기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암울한 미래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제안한다.

◈ 번역: 적극적평화행동(평화네트워크 회원 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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