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자본엔 영주권, 숙련노동자는 강제추방?”
이주노동자 투쟁, '영주권 논의'로 옮아가나

 

박권일 기자 kipark@digitalmal.com

 

7월 29일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에는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저지를 위한 목요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는 약 20여명의 평등노조 소속 해고노동자와 학생들이 모여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항의하고, 그들에게 영주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6월 말 현재, 불법체류자 수는 16만 7천명으로 지난해 12월에 비해 5만 명 가까이 늘어난 상황. 정부는 8월 17일 실시되는 고용허가제를 앞두고 장기체류자 수를 줄이기 위해 고심 중이다.

   
▲ 출입국관리사무소 앞 집회

그러나 몇몇 시민단체나 노동단체 등은 "5년 이상 한국의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해 온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만큼, 이들 장기체류자에게 노동비자를 발급하거나, 시민권(영주권)을 부여하는 등 노동자로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인권사각지대에 놓인 채 불안한 도피생활을 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한국사회 내부로 편입시키는 것이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들을 위해서도 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평등노조 임미령 위원장은 "17만에 이르는 장기체류 노동자들을 무조건 추방한다고 해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임 위원장은 "이주노동자들은 오늘처럼 자신들의 집회에조차 참여할 수가 없다. 밖에 나서기만 해도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잡혀가기 때문"이라 말했다.

이주노동자, '인간사냥' 당할까봐 집회에 참석 못해

그는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의 행태를 '인간사냥'이라 묘사했다. 현행 제도 하에서 이주 노동자들은 입국 3년이 지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 본국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오면 해결되는 문제 아닐까. 하지만 임 위원장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국 돈으로 수천만 원을 들여 겨우겨우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또다시 빚을 내서 재입국하라는 것은 사실상 영구추방이나 마찬가지다. 장기체류자들을 보면 7∼8년 넘게 한국에서 생활한 사람들도 많다. 사실상 한국 노동자나 마찬가지다. 한국경제발전에 공헌한 숙련노동자로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 평등노조 임미령 위원장

집회에 참석한 여우성 씨는 해고노동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법원에서 해고무효 확정판결을 받고도 복직이 안돼" 평등노조에서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을 하고 있다. 그는 "사실상 민주노총에 속한 대형사업장 노동자가 아니면 억울하게 해고당하고도 제대로 복직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다른 길에 그대로 내몰리게 된다"고 말했다. 여 씨는 이주노동자 집회에 참여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같은 노동자이니까요.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들 해고노동자들 이상으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아닙니까. 미조직 노동자들은 가장 소외받는 노동자들입니다. 보호해줄 노직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라도 이주노동자들을 적극 엄호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회차량의 마이크를 잡은 한 활동가는 '이주노동자에게도 영주권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해외 투기자본가들이 3년간 50만달러 이상을 한국에 투자하면 영주권이 주어집니다. 사회적 기여도에 따라 영주권을 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10년 일한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가 없을까요? 투기자본이라도 영주권을 주는데, 왜 산업현장에서 일한 노동자한테는 영주권을 주지 않는 걸까요? 우리는 3년간 50만 달러를 투자하는 투기꾼 보다 이주노동자들이 더 큰 사회적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투기꾼들은 자신이 이익을 남기고 돈을 빼내서 이 땅에 나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투기자본가들에게만 영주권 주는 건 부조리"

사실 이주노동자들에게 영주권을 보장하는 문제는 관련 단체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민주노총은 정부의 고용허가제에 반대하고, 5년의 시한을 보장하는 노동허가제, 사업장 이동의 자유 등을 주장해 왔지만 영주권이라는 단어를 꺼내든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만 안산 외국인 노동자센터 소장 박천응 목사가 최근 이주 노동자의 '시민권'을 제기한 바 있었다.

   
▲ 출입국관리사무소 앞 집회.
외국인 노동자 대책협의회는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영주권을 거론하지 않지만, 최근 검토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정정훈 변호사는 '이주노동자의 시민권-법률적 문제에 대한 시론적 검토'라는 보고서에서 "일반적으로 국적취득(귀화)보다 영주권 취득이 더 쉬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영주권 취득이 귀화보다 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정부의 고용허가제는 장기체류 이주노동자를 사회적 비용으로만 인식하는 차별적 시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며, 미숙련 노동자를 양산하여 질적인 노동력의 안정적 공급을 원하는 기업계의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미숙련 노동으로 인한 산재발생율의 증가 및 불법체류를 유인하는 요소로 작용해 오히려 사회적 비용을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 변호사는 "장기체류 이주노동자를 숙련노동자로서 사회적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결론맺는다.

이주노동자의 영주권 부여 논의는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이 문제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국제사회를 보더라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태도는 그 사회 전체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 서울 목동 출입국관리 사무소

 

2004년 0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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