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과 세계화, 전쟁의 이면을 들추다
     
평화운동가 아룬다티 로이의 세계

 김윤은미 기자
 2004-07-18 17:38:02


건축가에서 소설가로 변신,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데뷔작으로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로 떠오른 한 인도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영국에서 빅토리아 베컴과 나란히 영국여성이 뽑은 이상형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 모든 명성을 기쁘게 누리기는커녕 불안하고 낯설어 했다. 그녀는 부자가 된 죄의식에 대해 “마치 내가 이 세상의 돈이 돌아가는 거대한 파이프라인에 구멍을 뚫었고, 그래서 돈이 마구 쏟아져 나오면서, 그 엄청난 속도와 힘에 부딪쳐 내 온 몸이 멍드는 것 같았다”라고 고백한다.


아룬다티 로이는 흔히 노엄 촘스키나 하워드 진과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지식인들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그녀가 작가로서의 명성과 안락함을 버리고 전위적인 활동가로 나선 만큼, 대중적인 관심 또한 높다. 그러나 인도의 환경과 빈민문제, 핵 문제부터 전쟁 반대까지 그녀가 써낸 글들은 한 명의 소박하고 용감한 시민이자 여성의 것에 가깝다.

<생존의 비용>서 댐 건설과 핵 실험 비판

물론 그녀의 글 역시 많은 자료와 통계들이 인용되지만, 자료와 통계들 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에서 문제를 명확하게 밝혀내고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만드는 저자의 힘이다. <생존의 비용> 중 ‘공공의 더 큰 이익’에서 로이는 가뭄해소와 관개라는 미명 하에 마구 지어지고 있는 댐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가난으로 내몰고 있다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현재 인도 전역에 지어진 대규모 댐은 3천6백 개이며, 1천 개가 넘는 댐이 만들어지고 있다. 댐이 하나 만들어질 때마다 몇 천 명의 사람들이 수몰 지구에서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보상 받지 못하거나, 농사짓기 불가능한 거친 땅을 배당 받는다. 할 수 없이 수몰지역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지만, 숲과 강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기에 도시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결국 빈민가에 정착하게 된다. 댐이 실제로는 그다지 큰 효율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선진국에서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데, 왜 인도 정부와 주정부는 계속해서 댐을 지으려고 할까?

로이는 서구 자본과의 결탁에 눈을 돌린다. 댐을 짓는 자본은 서구의 것이다. 다국적 기업들과 국제은행들은 댐을 짓도록 국가에 돈을 제공한 뒤, 대가로 무기를 사도록 종용하며 댐 건설 이후 관개 수로와 기타 설비에 필요한 돈을 빌리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 어떤 언론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댐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서구 자본이 행한 일들은 모두 가려진다.

‘상상력의 종말’은 인도가 핵 보유국임을 선포한 후 발표된 글이다. 핵 문제에는 핵으로 인해 증폭하는 전쟁의 위협, 핵의 위험성에 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지배계급의 파시즘, 핵무기를 통해 ‘진정한 인도’를 만들겠다는 위험천만한 민족주의 의식과 이를 통해 민중들의 권리 주장을 억누르려 하는 흐름,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로이는 이 복잡한 얽힘을 쉬운 문장과 힘찬 비판, 작가다운 절묘한 비유로 하나하나 풀어낸다.

그녀는 ‘진정한 인도’를 만들고 싶다면 “고추, 토마토, 감자와 같은 외국에서 들어온 요리재료와 크리켓, 영어, 민주주의도 금지하고 병원과 신문사를 폐쇄하라”고 비꼬면서, 3억의 인구가 문맹인 인도라는 나라에서 누가 핵 무기의 무서움에 대해 알고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한다.

세계엔 기억해야 할 9.11이 너무도 많다

<9월이여, 오라>는 인도에서 인도 바깥으로 문제의식을 넓혀나간다. 그녀는 중동, 남미, 동아시아를 종횡무진하며 침략한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폭로하고, 전쟁을 통해 돈을 버는 기업과 현실을 조작하는 언론, 미국을 신화화하는 영화, 침묵하는 유엔을 비판한다. ‘9월이여, 오라’에서 로이는 미국인들이 9.11사건으로 인해 3천 명이 넘는 희생자를 가지게 된 것은 애도해야 할 일이지만, 세계에는 기억해야 할 9.11이 너무도 많다고 지적한다.


1922년 9월 11일은 영국정부가 아랍인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신탁통치를 선포한 날이며, 1973년 9월 11일은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미국CIA 지원 하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많은 칠레인들을 죽인 날이다. 그녀는 자살 폭파범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중동에서 일어난 기나긴 전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며, 테러는 개인적 절망의 극단에 처했을 때 나온 행동이지 혁명적인 전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때문에 죽은 자들에 대한 슬픔을 상품화해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야만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또한 페미니즘을 자처하며 전쟁을 합리화하는 것에 대해 로이는 “폭격을 통해 여성해방의 낙원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미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었습니까?”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결국 개발 프로젝트, 전쟁, 세계화라는, 개인의 일상에 폭력을 불러오는 이 거대한 흐름은 미 정부와 IMF와 같은 권력을 지닌 기구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을 뿐, 개인의 의지가 하나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녀가 폭로한 거대한 현실에 독자들은 망연자실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망연자실함을 저항에 대한 의지로 이끌어 간다. 로이의 저항에 대한 의지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그녀는 ‘작가와 세계화’에서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사람이 가정과 땅, 일자리와 인간적 존엄성,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어야 합니다”라고 단언한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소설 제목처럼, 역사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 보이는 개인의 일상에 대한 관심이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www.ildaro.com
* '일다'에 게재된 모든 저작물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옮기거나 표절해선 안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