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과 극단의 피흘리는 공존

제국주의와 테러가 상부상조하는 ‘폭력의 질서’… 외부의 극단주의는 내부의 민주주의도 파괴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김선일씨의 피살 소식이 전해진 6월23일 새벽 3시. 텔레비전을 통해 김씨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회사원 정기호(32·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씨는 분노조차 치밀지 않았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그저 멍한 무기력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떨군 김선일씨의 모습도 가슴 아팠지만, 핏발 선 목소리로 성명서를 읽는 테러리스트의 모습이 가슴을 후벼팠다. 그는 “테러리즘을 결코 지지하지 않지만, 이슬람 저항세력을 미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해왔다”며 “참수 소식을 접하면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동정마저 거두게 됐다”고 말했다.


△ 공격당하는 바그다드. 한국도 파병 고수를 통해 극단주의 세계의 동조자가 됐다.(사진/ GAMMA)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끔찍한 질서의 체제였다. 부시라는 악의 축과 테러리즘이라는 악의 축을 중심으로 피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암흑의 세계였다. 양극의 극단주의가 만들어내는 폭력의 질서 앞에서 절망했다. 그리고 자문했다. ‘도대체 누가 김선일씨를 죽였는가?’

“이라크인들이 가장 큰 피해자”

같은 날 오후 7시께 정씨는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김선일씨 추모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집회장을 들어서는 순간, 피켓에 적힌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부시와 노무현이 김선일씨를 죽였다’. 명쾌한 논리였다. 어머니와 함께 걸어가던 꼬마가 피켓을 쳐다보며 물었다. “엄마, 정말 노무현 대통령이 죽였어?” 어머니는 대답을 하는 대신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씨는 그 아이가 던진 ‘순진무구한’ 질문을 옆에 있던 시민사회 활동가인 친구에게 다시 던졌다. “미국의 책임만을 묻는 것도 극단주의 아니냐?” 친구는 “물론 테러도 용납할 수 없다”며 “테러리스트에게 온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호소할 대상이 노무현 정부와 미 대사관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부시 책임론’이 터져나오는 집회장 바깥 세계에서는 ‘테러 보복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부시와 노무현을 미워하거나 테러리스트를 증오하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부시의 제국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는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파견하는 ‘종군문인’의 자격으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다녀온 소설가 오수연씨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 초기만 해도, 테러리스트는 이라크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오히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선동만을 일삼는 ‘우스꽝스러운’ 세력으로 여겨졌다. 오씨는 “당시 다수의 이라크인은 후세인의 반미 독재도, 사우디아라비아식의 친미 정권도 아닌 이라크인의 자존을 지키는 합리적인 사회를 바라고 있었다”고 전했다. 점차 미군의 점령군으로서 성격이 드러나면서 이라크인의 불만은 커졌고 극단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다. 오씨는 “김선일씨의 희생도 더없이 안타깝지만,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이 차단되고 목숨 건 투쟁의 외길로 내몰린 이라크인들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도 파병을 통해 미국의 극단주의에 힘을 실어줘 극단주의 세계의 동조자가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양 극단주의는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다. 부시의 제국주의 정책은 이라크의 테러리즘의 토대가 되고, 이라크의 테러리즘은 부시의 제국주의 정책을 강화한다. 실제 양 극단주의 세력은 곤경에 빠질 때마다 ‘상부상조’해왔다. 우선 알카에다의 ‘9·11 테러’는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제공했다. 최근에는 부시가 ‘9·11 보고서’로 궁지에 몰리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인 폴 존스를 참수해 다시 한번 대테러전쟁의 ‘명분’을 살려주었다. 부시는 알카에다와 후세인 정권 사이에 연계가 없다는 조사결과를 담은 ‘9·11 보고서’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폴 존스가 참수당하자 부시는 침공의 명분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했고, 들끓던 미국의 이라크 철군 여론은 힘을 잃었다. 극단주의가 서로를 부추기면서 합리주의가 설 자리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알카에다는 부시 재선을 원한다?


△ 제국주의와 테러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룬다. 6월17일 부시-체니 진영 선거기금 모금 행사장에서 부시 대통령이 손을 흔들고 있다.(사진/ GAMMA)

테러리스트는 평화운동의 훼방꾼이다. ‘세계사회주의 웹사이트’(wsws.org)의 편집자 배리 그레이는 “(김선일씨를 숨지게 한) 살인자들은 잔혹한 학살 행위가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에 혼란의 씨를 뿌리게 될 뿐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이들은… 국제적 반전운동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집단이 목표로 삼는 것은 아랍 민중의 해방이 아니라 아랍 지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레이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아랍 세계의) 지배 엘리트를 다른 지배 엘리트로 교체하는 것이며, 이들이 대변하는 것은 아랍의 지배 계급 중 비교적 소외된 세력의 야망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였고, 일부 테러리스트는 아랍 지배층과 연계돼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알카에다는 부시의 재집권을 원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저항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미군이 이라크 민간인 수백명을 학살한 팔루자의 비극처럼 날마다 점령군이 폭력과 살상을 자행하는 상황에서 점령군을 향해 총을 드는 것을 똑같은 폭력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경우처럼 이스라엘 정규군의 중무장과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빈곤한 화력을 같은 ‘폭력’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명분과 무장력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의 저항폭력은 우발적인 저항이 아니라 체계적인 질서가 됐다. 당초의 저항정신은 상실한 채 폭력의 질서에 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평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테러는 쉬운 방법이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평화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테러리즘이 제국주의를 몰아내는 데 성공할지라도, ‘해방된’ 국가 안에서 국가주의는 신성시되고 민주주의는 압살당하기 십상이다.

테러와 대테러는 마찬가지 살상

테러리즘은 피의 악순환을 불러온다. 미국은 김선일씨가 참수당한 뒤, 이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저항세력의 근거지인 팔루자를 공습했다. 미군은 팔루자에 김선일씨를 참수한 테러집단인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의 은신처가 있다고 주장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았다.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는 또다시 터키인을 인질로 잡고 참수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이들의 ‘보복’은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인 박순성 동국대 교수는 “참수 장면을 공개해 ‘충격’을 줌으로써 파병국에 ‘공포’를 조장하는 행위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작전명인 ‘충격과 공포’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테러리스트는 테러의 충격을 통해 파병국의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내 아들은 못 보낸다”는 파병국의 가족주의를 자극해 여론을 극단의 분열로 몰고 가려는 의도다. 테러를 통해 그들이 얻으려는 것이 ‘파병 철회’라면, 폭력의 질서 속에서 파병 철회를 외치는 평화운동마저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외부의 극단주의는 내부의 민주주의도 파괴한다. 9·11 이후, 미국의 애국주의는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검열을 강화했다. 테러의 여파로 2001년 제정된 미국의 ‘애국자법’(Patriot Act)은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했고, 전화와 전자우편의 감청을 광범위하게 허용했다. 한국에서도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고 불린 ‘테러방지법’의 입법 시도가 있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득세는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옥죄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슬람 여성들을 차도르 안에 가두고, 동성애자를 돌로 쳐죽이고, 민주주의를 압살했다. 한국에서도 김선일씨가 참수당한 다음날, 이슬람 사원에 협박 전화가 걸려오고, 취객의 난동이 벌어지는 등 이슬람에 대한 혐오 범죄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 한국 내 이슬람 이주노동자들의 삶도 위태로워질지 모른다.


△ “정부와 부시가 김선일씨를 죽였다.” 6월26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린 촛불시위.(사진/ 박승화 기자)

하지만 테러리즘에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폭력의 질서를 해체하지 못한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바뀌지 않으면 이슬람 테러리즘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박순성 교수는 “폭력 질서의 근본 원인 제공자인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중간 원인 제공자인 테러리스트만 비판하는 것은 비겁한 논리”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 뒤, 미국에 대한 비판 없이 “테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심지어 테러에 대한 보복론까지 판치고 있다. ‘테러리스트를 테러하자’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대테러전쟁을 역설하는 부시의 논리와 똑같다.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는 “부시의 ‘대테러’는 전쟁을 불러와 테러보다 더한 인명 살상을 낳았다”며 “폭력의 관점에서 보면 테러와 대테러는 마찬가지 살상 행위”라고 지적했다.

파병 철회로 악순환 끊어야

극단의 세계에서 이성이 발붙일 공간은 협소하다. 하지만 박순성 교수는 폭력의 질서를 넘어설 희망이 여전히 있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80년대 초 미국 패권주의가 저물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했지만, 80년대 말 미국 패권주의는 다시 부활했다”며 “거꾸로 지금은 미국의 패권주의가 영원할 것 같지만 머지않아 제국의 몰락이 찾아올 것”고 낙관했다. 그는 세계 시민사회의 반전 여론과 유럽 국가의 견제를 낙관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또 “테러리즘은 역사적으로 패배했다”고 덧붙였다. 1960년대 세계를 뒤흔들었던 적군파의 테러도, 70~80년대 여러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던 소수민족 분리주의자의 테러도 결국에는 잦아들었다는 것이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역설적으로 이라크에서 미국의 실패는 세계에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며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있지만, 아주 완만하게 이성의 힘이 승리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6월22일 발표된 민족문학작가회의 긴급성명 ‘이라크 파병을 철수하라-전쟁도 테러도 우리는 싫다’는 폭력의 질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라크 사태가 증명하는 것은 이 지구상의 어떤 전쟁도 국지적 분란이 아니라 모든 국가와 인류 전체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전쟁 범죄라는 뼈아픈 진실이다. 우리는 이 시대 인류의 불신 체제가 연속적으로 만들어내왔고, 앞으로도 만들어낼 이 전쟁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어느 날 문득 폭력의 질서가 내 삶을 침탈할지도 모른다. 김선일씨의 죽음처럼. 그래서 파병 철회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일상의 평화를 지키는 절박한 행동이다. 피로 물든 극단주의 세계의 동조자가 될 것인가, 무자비한 폭력의 질서에 저항하는 시민이 될 것인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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