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난 죽고싶지 않다. 난 살고싶다."
참수위기에 놓인 대한민국 국민의 절규다.
두려움에 질린 그 호소를 들었을 때 받은 첫 느낌은 결연했다. "올 것이 왔다"였다. 찬찬히 돌아 보라. 한국 정부는 6월 18일 이라크 추가파병을 공식 발표했다. 아랍 방송들이 곧장 주요 뉴스로 보도했다.
<알 자지라>도 마찬가지다. 다음날 이라크의 최대 일간지 <아자만>도 1면에 4단 크기로 편집했다. 특히 이 신문은 "한국군의 파병은 연합군에 세번째로 많은 병력"임을 보도했다.
이라크 민중이 <알 자지라>와 <아자만>을 보고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가는 자명하다. 김선일씨가 파병 공식 발표에 앞서 피랍되었으되, 발표 뒤 참수위기에 놓인 상황을 보라. 무장단체 또한 또렷한 '신호'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파병철회와 한국군 철군을.
그래서다. 올 것이 왔다고 느낀 까닭은. 하지만 아니었다. 조금만 더 성찰해보아도 충분하다. 거듭 새겨보자. 과연 올 것이 온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김선일씨의 참수위기는 올 것이 온 것처럼 '필연'이 아니다. 얼마든지 그 '올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았던가. 추가파병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예고하지 않았던가.
이미 지난 칼럼 '피로 물든 서울 도심을 상상하라'(6월 16일)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경고했듯이, 사태의 책임은 추가파병을 결정한 노무현 정권에 있다. '마드리드 참사'를 거론하며 그 책임이 여론을 무시하고 파병을 결정한 스페인 집권당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지적하지 않았던가. 노 정권이 국민 여론에 귀기울여 추가파병을 강행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사태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두번째 이유이다. 올 것이 아직 다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선일씨의 피랍과 참수위기는 '시작'일 따름이다. 피로 물든 마드리드처럼 '피로 물든 서울의 아침'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보라. 미국의 '9·11 진상조사위원회'는 그 가능성을 실감나게 입증하지 않았던가.
알 카에다는 9·11 때 한국의 미국 시설물을 동시 테러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미 진상조사위에 따르면 "태평양을 횡단하는 여객기를 납치해 공중에서 폭파하거나 일본이나 싱가포르 또는 한국 내 미국 목표물에 충돌하는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그 검토의 '프로그램'은 빈 라덴이 묻어두었을 뿐이다.
심지어 6월22일치 신문 사설에서 <조선일보>도 테러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아무리 치밀한 대책을 마련하더라도 테러를 완전히 막아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따라서 테러 예방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테러가 일어나고 난 뒤 정부와 국민이 얼마나 성숙한 대응 자세를 갖는가 하는 점이다."
참으로 가증스럽지 않은가. 테러 가능성을 언급하며 언죽번죽 '성숙한 대응자세'를 주문하는 저 신문이.
그렇다. 문제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김선일씨의 참수 위기는 '신호'이다. 설령 그가 다행히 목숨을 구하더라도 신호는 살아있다. 그 신호 속에 얼마나 큰 참사가 담겨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라크 민중 그리고 우리 민중이 어떤 실천을 해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다. 명토박아 둔다. 올 것이 온 게 아니다. 필연이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재앙'이다. 역사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반드시 보복해 왔다. 그 역사가 '신호'까지 보냈는데도 이를 묵살한다면, 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노무현 정권에게 파병철회를 진지하게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가, 그리고 저 17대 국회의원들이 거부한다면, 민중의 힘으로 이뤄야 한다. 그것은 김선일씨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우리의 사랑을 위해서다.
그렇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 눈물의 절규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이어야 옳다. "제발 난 죽고싶지 않다. 난 살고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