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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난 무릎, 운디드니
켄트 너번 지음, 정지인 옮김 / 시학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잠시만, 아주 잠깐 동안만, 시계바늘을 되돌릴 수 있다면...그래서 이 상황이 벌어지기 바로 직전의 그 상태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그럴 수 있다면...어떻게든 다른 결과가 나오리라는 그런 기대감.
이미 벌어져버린 이 최악의 상황을 막연하게나마 예견하고 절대 그대로는 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혀 본 적이 있지않을까?
다시, 어떻게든 다시 그 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책을 살까말까 망설였던 건 어쩌면 이 책 속의 댄 노인이 그렇게 말했듯 백인들이 인디언을 대하는 틀에 박힌 방식을 막연히 짐작하고 미리 판단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비슷비슷한 느낌의 그런 책이 아니겠나싶었으면서도, 그런 느낌에의 매력 또한 상당해서 약간의 망설임 끝에 집어들었다.
지금 책을 덮고 나서는, 이 사람 저 사람, 생각나는 모두에게 이 책을 읽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국사 선생인 후배, 새로 교사가 된 누구, 고등학생 딸, 조카,...
책 표지에 그렇게 쓰여 있다.
'우리가 왜 백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가!'
이건, 비단 인디언이 백인에게, 인디언이 자신들에게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싶다.
책을 읽다가 문득 나 또한 너무나 '백인들의 눈'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된다.
탐크루즈와 니콜 키드만이 나왔던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돈다. Far And Away. 깃발을 들고 말을 달리던 탐크루즈, 절박하게 '땅'을 추구하던 주인공의 모습.
아무런 반발이나 이견 없이 무작정 구경만 했던 영화 속의 상황들.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였던 백인들의 미대륙 개척 역사.
나와 상관없는 남의 나라, 남의 땅이래서 그랬나?
그들, 유럽 대륙에서 밀려난 백인들이 바다를 건너와 더 멀리, 더 넓게 달려서 깃발을 꽂아 자기 땅을 표시하기 이전에, 북미 대륙은 아무도 살지 않았던 비어있던 땅이었나?
백인들이 제멋대로 몰려와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이전에 그 땅은 그저 아무나 차지 할 수 있는 광활한 대륙이었나?
책 속의 댄 노인은, 어렵게 어렵게 그 가슴 속에 눌려 있는 80년 동안의 분노를 얘기한다.
잊혀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계속 끊임없이 들끓고 있었던 분노를 스스로 다시 들여다보며, 듣는 사람의 가슴까지 그 분노의 울음으로 채우게 하는 그런 말들을 꺼낸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물을 알고 동물들도 우리를 알았지. 우리는 이 땅 위로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보아왔지. 땅은 우리의 조상들처럼 살아있는 존재였다네. 땅은 우리의 육체에 생명을 주고 우리의 영혼에도 생명을 주었지. 우리는 이 땅의 일부분이었네....땅은 우리의 일부였지. 우리는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도 알지못했어. 그건 마치 할머니를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네......그들은 토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우리는 대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게 아무런 소유의 개념 없이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동물이, 사람과 나무가, 사람과 땅이,...그냥 그렇게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던 인디언들에게, 백인들은 갑자기 물밀듯이 다가와 제멋대로 땅을 차지하고 구획을 정하고, 오로지 먹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단순한 재미로 사냥을 하고 죽은 시체를 썩게 내버려
둔 채, 다시 말을 달려가고, 평화롭던 인디언 가족들을 몰살하고, 사지에 몰아넣고 ,처참하게 종말을 맞게 한다.
상처난 무릎, 운디드 니....그 무덤 언덕 밑에 잠겨있는 수 많은 인디언 가족들의 절규, 절박한 외침은 여전히 지금도 살아서 대지를 울린다.
"...우리는 노인과 아기들은 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배웠지. 그들은 가장 약하고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지. 그런데 백인들은 우리에게 쳐들어와 아기들과 노인들을 죽였네. 우리가 그들을 보호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네. 백인들은 너무나 강했고 그 수가 너무나 많았으니까....."
지도자와 지배자가 어떻게 다른 지, 마땅히 따를 수 있는 지도자는 부족이 선택하며 그가 지도자로서의 현명함을 잃으면 부족이 그를 떠나거나 새로운 지도자가 만들어진단다.
그래서 인디언 노인들은 쉽게 -백인들에 의해- 현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나보다.
"노인과 아기들은 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 라는 말이 엉뚱하게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내 지척에 있는 노인들을 그렇게 대접하고 있는지.
스멀스멀 억지스럽게 솟아오르는 변명. 그들이 그렇게 존경받을 수 있게 사고하고 행동하시기를...
정말로 취하며 살아야 할 것들이 어떤 모습인지,
젊으나 늙으나 모두들 허한 것들에 취해 본래의 참한 모습을 잃고 살아간다싶다.
젊으나 늙으나 그저 내 손 안에 하나라도 더 쥐기만을 바라는 그런 모습으로.
현명하게 심지를 잃지 않고 잘 늙고싶다.
그래, 어쨌거나 나보다 더 신과 가까이 있는 그 존재들을 겸손되게 다시 보듬을 일이다. (좌우간 어떤 책이든 책을 읽는 동안 제멋대로 천지사방 날아다니는 잡념들때문에 정말 책 읽는 속도가 늦다.)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다른 관점으로 북미대륙을 보게 된다. 동쪽에서 시작된 역사가 아닌, 밀려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되짚어 내가 배운 우리 역사까지 뒤적이게 된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가졌나?
가슴이 너무 아리다.
그렇게 무참하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고 짓밟힌 사람들...
다시 예전으로, 백인들이 예고없이 들이닥치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그릇된 역사의 수레바퀴가 조금이라도 그 방향을 선회한다면
그들, 인디언(백인들에 의해 제멋대로 이름붙여진...)들은 그렇게 가혹한 역사를 맞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대체 우리가 얹혀져 있는 이 땅의, 이 지구상의 인간들을 관장하는 건 어떤 거대한 힘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댄 노인의 말처럼 거기에는 뭔가 또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더 큰 의미가 있을 수도 있을까?
다시 되돌아간다면...
저 거대한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백인들의 문화가 그 땅에 발을 딛기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이 모질고 각박한 싸움박질 투성이의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있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힘없는 이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북미 대륙의 거친 백인 문화.
물론 그들 모두가 그렇다라고도 매도할 수는 없겠지만, 대세를 이루는 그 거친 힘에 대해 다시금 저항해야 할 이유를 안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한 평범한 인디언 노인의 연륜과 인지, 통찰이 절절하다...
그저 백인들로 꽉 찬 저 대륙 어디에서든 끝까지 살아남아 그들의 문화, 그들의 종족을 지켜내주기를 간절하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