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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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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구입했던 책을 뒤늦게 읽었다.
주석이 많은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일일히 주석을 찾아가며 다 해득하고, 그러면서 읽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쓰윽 훑어보고 다시 정독을 하든지 해야 할까?
나중이 더 낫지 않을까싶은데 속이 꺼끄러워서 매번 페이지 하단의 각주를 일일히 읽고 다시 줄거리로 돌아오고 하는 성격이다보니, 도대체 이런 책은 진도가 안 나간다.
육아에 시달리던 때 보다가 그냥 덮어두었던 묵은 책이다.

그런데 다른 소설을 읽다가, 모티브를 따온 책이 '장미의 이름'이라 해서, 이번 기회에 다시 읽자고 꺼내들었다. 역시나 각주 때문에 헤매기는 마찬가지이다. 일일히 각주를 읽어보아도 그 내용을 다 알지 못하니 답답함은 크다. 그러나 거기에 크게 매이지 않고 그냥 줄거리를 따라가기로 맘먹는다.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
이런 사람들은 그냥 독자들을 기죽이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아닐까?
중세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추리물. 거꾸로 되짚어 읽는 꼴이 되었다.
이인화도 <영원한 제국>에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르는 정조의 선왕(영조)의 서책을 둘러싼 이야기로 풀어내더니, 역시나 <장미의 이름>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꾸려간다.
수도원 안에서의 음모와 추적?
이것도 역시 제대로 보지 않은 영화의 단편적인 장면만 먼저 이미지로 떠오른다.
숀 코네리와,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나왔던 영화였는데, 나중에 비디오로 빌려보든지 다운받아 보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추리물로서의 내용은 흥미롭긴 하지만, 그렇게 특별할 것까진 없다고 여겨지지만 이야기를 꾸려가는 사이사이 교황과 황제를 둘러싼 권력 투쟁, 종파가 다른 세력간의 교리 논쟁, 중세 세계사, 교회사,..등등이 장황하게 펼쳐져 있다. 방대한 역사적,철학적 지식과 언어학, 기호학적 지식...
모름지기 책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것을 자기 안에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

책속의 수도원 지도를 옆에 두고 대조해가며 머리 굴려 가며 재미있게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고민을 한다.
에코의 다른 책을 볼 것인지, 성서공부책을 읽을 것인지, 역사서를 읽을 것인지, 한문 공부를 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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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이문구 지음 / 솔출판사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자꾸만 조급증이 드는 까닭은 아마도 순전히 내 자신의 '모자람'에 있지 않은가싶다. 한없이 채워넣어야 할 것 투성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불쑥 한꺼번에(?)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말인지!
...그래도, 아무 하는 것 없이, 아무 아는 것 없이, ...그냥 그런 마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는 그런 여유 찾는 법이라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종종거리며 가닥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노라니 공연한 조갈증만 내내 가득이다. 

아....無識...

[관촌수필]이 눈에 들어온 것은 얼마전 타계한 작가의 이름 탓이려니.
97년판이니 이것도 한참 전인데,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아련해서 다시 집어들었다.
이문구.
이 작가의 소설을 읽은 게 언제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가물가물하다.
한 20년 전쯤에 읽고는 그냥 내처 모른 체 하고 밀어두고 살지 않았나싶다.
막연히 약간 '촌스러운'(?...!) 쪽으로 치부해두고 잊어버렸던 것같다.
대체 나는 뭘 읽었던 거지?

도무지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그 살아있는 말들.
'사투리일거야'하고 국어 사전을 들춰보면 어김없이 들어앉아 있는 우리 말들.
언제 이런 말을 써봤나싶게 처음 보는 우리 말들이 그 안에 척하니 알맞춤하게 쏙쏙 자리잡고 앉아있는 거다.
아...미치겠다...나는 왜 이렇게 무식한거야? 나는 뭘 읽고 살았던 거람? 내가 아는 '말'이란 게 다 뭐지?....
참 창피할 노릇이다.

정확히 뜻을 알지 못해도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그 뜻이 떠오를만큼 적절하고 맛깔나게 들어있는 '말'들 속에서 허우적대며, 우리말사전, 국어사전을 옆에 끼고 어떻게 책을 다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도, 그 자연스러운 관촌풍경. 사람 냄새. 바다 냄새, 뻘 냄새...

안되겠다싶어 책을 다 덮은 날, 또 더럭 알라딘에서 이문구 소설을 세 권 샀다.
절판된 책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3권. 80년, 92년,2000년, 다 각각이군.
언제 읽을까싶다. 생각같아서는 그 안의 우리 말들을 다 찾아서 노트에 적어보고싶다. 책을 검색하다보니 이문구 소설의 어휘사전도 진작에 누가 펴낸 모양이다.
지금 맘으론 덥썩 그걸 사보느니 욕심껏 내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인데, 그러자니 그 양이 엄청나서 어느 세월에 가능할까싶다.
먼저 집에 있던 무슨 전집 속에서 이문구 책을 꺼내서 읽는 중이다.
분명히 읽었던 책들인데도, 예전에 내가 정말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이 작가가 이렇게도 '말'을 잘 살려 쓰는 사람인 줄 몰랐다.
그런데도 틀림없이 내가 읽었던 그 소설들 속에서도 이미 살아있는 우리 말들이 열심히 바둥거리고 있는 거다. 아마 그저 사투리 잘 쓰는 충청도 작가로나 여기고 말아버렸던 것일까?

두름성으로 넌덕스럽게,
개맹이없는,
종작없이 씨월거린,
걸터듬는,
지범거리다,,
게접스럽다,
거듬거리다,
귀살쩍다,
버성기다,
칙살하다,
바르집다,
존조리,
맞대매,
훌닦다,
흔전거리다,
뒤퉁스럽다,
비쌔다,
밀알지다,
모도리,
퉁바리맞다,
짯짯하다,
간종그리다,
투깔스럽다,
끄먹거리다,
느른하다,
...
대화성투에는 사투리가 섞여있겠거니 싶어 서술문에서만 대강~ 골라내어 사전에서
찾아본 말들이다...겨우 단편 하나에만도...
진땀이 날 지경이다.
어떻게 이렇게 우리 말을 다 살려 쓸 수가 있을까?
작가의 노력일까? ... 단순히 노력만 가지고 이렇게 글 속에 적절하게 살아있는 듯 어울려 쓸 수가 있는 걸까?...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어학능력이 있다는 말을 곧잘 하는데, 어쩌면 우리 말에도 따로 탁월한 능력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닐까?
쩝..남의 나라 말 공부할 게 아니라, 우리 말부터 한참 공부해야 할 성싶다.
내 '국어사전'은 대체 언젯적 것이람?
신판 국어사전부터 새로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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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난 무릎, 운디드니
켄트 너번 지음, 정지인 옮김 / 시학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잠시만, 아주 잠깐 동안만, 시계바늘을 되돌릴 수 있다면...그래서 이 상황이 벌어지기 바로 직전의 그 상태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그럴 수 있다면...어떻게든 다른 결과가 나오리라는 그런 기대감.
이미 벌어져버린 이 최악의 상황을 막연하게나마 예견하고 절대 그대로는 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혀 본 적이 있지않을까?

다시, 어떻게든 다시 그 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책을 살까말까 망설였던 건 어쩌면 이 책 속의 댄 노인이 그렇게 말했듯 백인들이 인디언을 대하는 틀에 박힌 방식을 막연히 짐작하고 미리 판단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비슷비슷한 느낌의 그런 책이 아니겠나싶었으면서도, 그런 느낌에의 매력 또한 상당해서 약간의 망설임 끝에 집어들었다.

지금 책을 덮고 나서는, 이 사람 저 사람, 생각나는 모두에게 이 책을 읽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국사 선생인 후배, 새로 교사가 된 누구, 고등학생 딸, 조카,...

책 표지에 그렇게 쓰여 있다.
'우리가 왜 백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가!'
이건, 비단 인디언이 백인에게, 인디언이 자신들에게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싶다.
책을 읽다가 문득 나 또한 너무나 '백인들의 눈'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된다.
탐크루즈와 니콜 키드만이 나왔던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돈다. Far And Away. 깃발을 들고 말을 달리던 탐크루즈, 절박하게 '땅'을 추구하던 주인공의 모습.
아무런 반발이나 이견 없이 무작정 구경만 했던 영화 속의 상황들.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였던 백인들의 미대륙 개척 역사.
나와 상관없는 남의 나라, 남의 땅이래서 그랬나?
그들, 유럽 대륙에서 밀려난 백인들이 바다를 건너와 더 멀리, 더 넓게 달려서 깃발을 꽂아 자기 땅을 표시하기 이전에, 북미 대륙은 아무도 살지 않았던 비어있던 땅이었나?
백인들이 제멋대로 몰려와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이전에 그 땅은 그저 아무나 차지 할 수 있는 광활한 대륙이었나?
책 속의 댄 노인은, 어렵게 어렵게 그 가슴 속에 눌려 있는 80년 동안의 분노를 얘기한다.
잊혀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계속 끊임없이 들끓고 있었던 분노를 스스로 다시 들여다보며, 듣는 사람의 가슴까지 그 분노의 울음으로 채우게 하는 그런 말들을 꺼낸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물을 알고 동물들도 우리를 알았지. 우리는 이 땅 위로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보아왔지. 땅은 우리의 조상들처럼 살아있는 존재였다네. 땅은 우리의 육체에 생명을 주고 우리의 영혼에도 생명을 주었지. 우리는 이 땅의 일부분이었네....땅은 우리의 일부였지. 우리는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도 알지못했어. 그건 마치 할머니를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네......그들은 토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우리는 대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게 아무런 소유의 개념 없이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동물이, 사람과 나무가, 사람과 땅이,...그냥 그렇게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던 인디언들에게, 백인들은 갑자기 물밀듯이 다가와 제멋대로 땅을 차지하고 구획을 정하고, 오로지 먹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단순한 재미로 사냥을 하고 죽은 시체를 썩게 내버려
둔 채, 다시 말을 달려가고, 평화롭던 인디언 가족들을 몰살하고, 사지에 몰아넣고 ,처참하게 종말을 맞게 한다.
상처난 무릎, 운디드 니....그 무덤 언덕 밑에 잠겨있는 수 많은 인디언 가족들의 절규, 절박한 외침은 여전히 지금도 살아서 대지를 울린다.

"...우리는 노인과 아기들은 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배웠지. 그들은 가장 약하고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지. 그런데 백인들은 우리에게 쳐들어와 아기들과 노인들을 죽였네. 우리가 그들을 보호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네. 백인들은 너무나 강했고 그 수가 너무나 많았으니까....."

지도자와 지배자가 어떻게 다른 지, 마땅히 따를 수 있는 지도자는 부족이 선택하며 그가 지도자로서의 현명함을 잃으면 부족이 그를 떠나거나 새로운 지도자가 만들어진단다.
그래서 인디언 노인들은 쉽게 -백인들에 의해- 현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나보다.

"노인과 아기들은 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 라는 말이 엉뚱하게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내 지척에 있는 노인들을 그렇게 대접하고 있는지.
스멀스멀 억지스럽게 솟아오르는 변명. 그들이 그렇게 존경받을 수 있게 사고하고 행동하시기를...
정말로 취하며 살아야 할 것들이 어떤 모습인지,
젊으나 늙으나 모두들 허한 것들에 취해 본래의 참한 모습을 잃고 살아간다싶다.
젊으나 늙으나 그저 내 손 안에 하나라도 더 쥐기만을 바라는 그런 모습으로.
현명하게 심지를 잃지 않고 잘 늙고싶다.
그래, 어쨌거나 나보다 더 신과 가까이 있는 그 존재들을 겸손되게 다시 보듬을 일이다. (좌우간 어떤 책이든 책을 읽는 동안 제멋대로 천지사방 날아다니는 잡념들때문에 정말 책 읽는 속도가 늦다.)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다른 관점으로 북미대륙을 보게 된다. 동쪽에서 시작된 역사가 아닌, 밀려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되짚어 내가 배운 우리 역사까지 뒤적이게 된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가졌나?

가슴이 너무 아리다.
그렇게 무참하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고 짓밟힌 사람들...
다시 예전으로, 백인들이 예고없이 들이닥치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그릇된 역사의 수레바퀴가 조금이라도 그 방향을 선회한다면
그들, 인디언(백인들에 의해 제멋대로 이름붙여진...)들은 그렇게 가혹한 역사를 맞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대체 우리가 얹혀져 있는 이 땅의, 이 지구상의 인간들을 관장하는 건 어떤 거대한 힘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댄 노인의 말처럼 거기에는 뭔가 또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더 큰 의미가 있을 수도 있을까?
다시 되돌아간다면...
저 거대한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백인들의 문화가 그 땅에 발을 딛기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이 모질고 각박한 싸움박질 투성이의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있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힘없는 이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북미 대륙의 거친 백인 문화.
물론 그들 모두가 그렇다라고도 매도할 수는 없겠지만, 대세를 이루는 그 거친 힘에 대해 다시금 저항해야 할 이유를 안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한 평범한 인디언 노인의 연륜과 인지, 통찰이 절절하다...
그저 백인들로 꽉 찬 저 대륙 어디에서든 끝까지 살아남아 그들의 문화, 그들의 종족을 지켜내주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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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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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다는 것은...어떤 것일까? 평온과 평화, 안도 이런 것보다 먼저 오는 '두려움'은 무엇때문일까?

'아주 오래된 농담'
첫장을 펼치니 흑백화면으로 주름 가득한 얼굴로 작가가 웃고 있다. 아뿔싸, 이 어른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칠순이 지났단다. 아하, 그렇구나.

내 자신 얼마나 편견과 아집의 굴레가 강건한지 새삼 깨닫는다.
'사랑했던 박완서 아줌마'라고 혼자 떠들었듯이 나는 이미 과거형으로 이 작가를 보내버리고 싶은가보다.
자꾸 트집을 잡으려한다.
같은 수식어가 다음 문장에 또 나온다...뒷부분을 읽다가, 이 양반이 저 앞에서 이런 얘기 비췄던 걸 잊었나? 틀림없이 수없이 다시 읽곤 했을텐데. 책 한권을 관통할 총기를 잃었나?...
그렇게 자꾸 트집을 잡으려 했다. 그래도 그 '끼'가 다 어디갈까?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껏 풀어내는 이야기마다 자연스럽게 그 분 나이들어감과 같이 간다고 여겼다.
그런데 새삼 칠순이다라고 하니, 지금 이렇게 사십,삼십대의 풍경을 그려내는 게 어딘지 모르게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갖게 하려한다. 이런 게 다 내 심술이기 십상이다.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사십대를 배경으로 자연스러운(?) 불륜과, 이른 죽음, 그것들을 둘러싼 풍경들을 그려내는 이야기이다. 불륜이든 죽음이든 보여지는 대로 받아들이고 빠져드는 것이 아닌, 쉼없이 견주고 가늠하며 헤아리는 주변인들의 습성을 속속들이 그려내는 재주. 역시 그런 면에서 탁월한 작가다.

끝부분, '파리텍사스'의 주제곡이라며 우울과 절망을 이야기한다.
주제곡이 무엇인지 생각은 안나지만 거의 이십년도 더 전에 영화관에서 혼자 그 영화를 보다가 남들 다 맨숭맨숭한 와중에 나혼자만 펑펑 울어대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편으로는 남들이 잡아내지 못한 그 황량함, 가슴 저미는 쓸쓸함에 젖을 수 있다는 데 자족하던 젊은 날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마흔이 넘어 되짚어내는, 그 불같던 스무살 시절의 쓸쓸함을, 이 양반은 언제 어떻게 느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엉뚱하긴.

'오래된 농담'은 '죽음'을 얘기하는 건가?
작가가 얘기하고싶었던 게 죽음이든 돈이든 과히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얘기다싶다
 항상 옆에 앉은 사람마냥 옆구리 꼬집어대는 내용들로 때로는 통쾌하게 때로는 우울하게 하는 작가의 재주에 탄복하면서도 정작, 작가 그 본인은 그런 것들을 모조리 '관조하는' 모습이기를 바라고 있었나보다.
작품으로는 가까이 하되, 사는 모습은 훨씬 투명하고 맑은 모습이길 기대하게 된다. 사진도 너무 씁쓸하다. 조금 더 나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저 사진을 저렇게 찍어낸 사람은 무슨 의도였을까?

...잘 늙으시라...
여전히 사랑하는 박완서 아줌마.
부디 노쇠함이 부르는 편협함과 닫혀지는 사고의 틀을 이겨낼 수 있는 현명함과 총기를 항상 잃지 마시기를...

내 모든, 그에 대한 불만이,  언젠가...신문에서 이문열을 옹호하며, "나는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차이를 모르겠다"던, 그 인터뷰 내용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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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누구인가
김진애 지음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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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에 읽은 이 책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마음에 드는 집을 짓고 사는 건 정말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보곤 하는 근사한 희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든 그런 날이 올까?

가난한 것이 부끄러울 것도 없고 부자인 것이 자랑일 것도 없을텐데 사람 사는 가치는 참 쉽게도 흔들립니다.  나는 또 어느만큼 부끄럽지 않은 줏대를 가지고 사는지, '우울한 속물근성'따위가 숨어있어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구석은 없는지,  소소하게 부딪는 모든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 나는 얼마나 소신을 갖고 사는지, 걸레질을 하며 열심히 생각해보게 하더군요.
어디든 공기좋은 곳에 내 안위를 위해 마음에 드는 집을 짓고 살아보는 것,
그렇게 될 날이 있을까마는, 그 또한 내 뿌리깊은 속물근성에 연유된 건 아닌가 부끄럽기도 하고, 다만 희망만으로 머릿속 그림이나 그려보곤 합니다.

'이 집은 누구인가'는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몇십년을 살아왔던 '집'에 대해 정해진 관념, 잣대,...이런 것들을 다시 되새기게 합니다. 

'동선이 긴 집'.
동선이 긴 집이 좋은 집이랍니다.
꼭 맞는 얘기다라고만 할 수도 없겠지만, 중학교 가정시간에 배운 이래로 내내 어떻게든 동선이 짧은 집만이 최고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게는.

신문에서 본 구절입니다.
'...요즘 아파트는 몸동작을 단순화시킵니다.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밖에 못하는 건데, 몸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더 다양한 동작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보면 이 눔의 아파트 때문에 잃어버린 동작들이 참 많네요.
숨바꼭질 하느라 기어들던 다락, 벽장이며,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 들어가 있던 마루밑으로 엎드려 기어들어가 무언가를 집어내오던 기억이며, 아궁이앞에 쪼그려 앉아 불장난 하던 기억이며, 김장독 묻을 땅을 파내는 어른 옆에서 거든다고 엉뚱한 삽질하던 기억이며, 오르락내리락,  어려서 살던 집에는 참 많은 잔동작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화하고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는 서구적 생활양식을 무분별하게 달게 받아들이고 산다싶네요.

이 집은 누구인가, 목차만 보아도 책의 내용을 알 것같습니다.

발상의 전환, 고정관념을 깨는 것. 참 재미있습니다.
기존의 생각의 틀들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왔다는 게 얼마나
재미가 없는 노릇인지 다시한번 실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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