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만 어떻게 생각해?"

딸한테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뿔싸 싶었다.

며칠 전부터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의 메모판에 A4용지 한 장이 붙어 있다.

'다음과 같은 사진의 학생을 아는 분은....위 학생들은 00일 00시에 00동과 00동에서 자전거를 훔친 애들로....'

어쩌구 하는 내용이었다.

엘리베이터 안과 현관에서 각각 감시카메라로 찍힌 넉 장의 사진이 붙어있다. 상당히 선명한 사진이다. 물론 누구나 다 알아볼 정도는 아니지만, 그 아이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알아챌 정도의 선명함.

고만고만한 아이들이라, 중학생 아들 녀석을 불러 그 사진을 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들은 바로 제 친구가 그 자전거를 잃어버린 당사자라고 흥분한다.

그러고선 깜박 잊고, 일상적으로 무심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며 몇 번씩 들여다보면서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고 말았는데, 고등학생 딸애가 물어온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사진 붙여놓은 거, 어떻게 생각해?"

앗, 그렇구나. 나이 어린 중학생 아이들의 명백한 인권침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그제서야 들었다.

딸아이 말마따나 성범죄자의 사진을 공개하느냐마느냐로도 인권침해니 뭐니 하고 떠드는 판인데 철없는 중학생 아이들을 완전히 수배자 취급을 하며 온 아파트에 도배를 해놓듯 사진을 붙여놓다니.

내가 너무 관용적으로 생각하는 지 몰라도 사춘기 정도의 남자애들이 동네서 자전거를 훔치는 정도는, 긴 인생의 한 순간, 짧은 실수로 치부될 수 있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점점 그런 실수가 커져서 더한 범죄로 발전할 소지도 물론 있겠지만, 그 실수를 딛고 넘어서서 건전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지도 얼마든지 가능한 게 아닌가? 누가 알 수 있담?

사진 속의 아이가 동네 주변의 아이라면,

바로 옆 담벼락을 잇댄 중학교의 재학생이라면,

동네 모든 아이들이 알아챌 터이고,

이내 '자전거 도둑'으로 낙인 찍히고 말 터이니,

영영 그 아이들은 주변인들에게 '전과자', '도둑놈'으로 인식되고 말 게 아닌가.

아파트 내에서의 경비 임무를 담당한 경비원, 관리자들 입장에서는 아파트 주민들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절도를 방지하려 애써야 하겠지만,  반드시 저러한 방법 밖에 없는 것인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자전거 도둑'이 '자전거 도둑'으로서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만큼만 받을 일이지, 온 아파트 주민들에게 얼굴을 알리고, 주변에 낙인까지 찍혀야 할, 그런 정도의 범죄는 아니지 않나? (문득...유...뭐라는 살인범이 떠오른다....)

 딸한테 한 마디 질문을 받고서야 아차 싶었으면서도, 마치 진작부터 잘못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처럼 "진짜 애들한테 심한 거 같지?" 라며 대꾸를 했다. "정말 그렇지?" 하며 말을 이어가는 딸 덕분에 뒤늦게 깨친다.

이래서, 나이들면 거꾸로 애들한테 배워야 한다는 건가보다.

관리실에 한번 찾아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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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7-2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님의 따님에게 배웠습니다.
연쇄살인 용의자에 대한 보도가 인권유린이라는 기사를 보고도 덤덤히 지나갔습니다. 워낙 나쁜 놈이잖아... 라고 합리화하며. 오늘 아침 그의 전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잠적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제서야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받는 것은 그 사람의 권리 뿐 아니라 그와 연결된 수많은 이들의 권리, 결국 우리 모두의 권리를 보호받는 것임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네요.
참 좋은 글 읽고 추천하고 갑니다. 따님에게도 꼭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