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얘기하겠지만 창조적 작가는 자기 작품의 합리적 독자가 되어 억지스러운 해석에 반박할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말하자면 병 속에 넣어 바다에 띄운 편지처럼 이미 자신의 글을 세상에 던져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호학에 관한 책을 낸 다음에는 내가 틀린 부분이 없는지 찾아보거나 내 의도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글을 오독했다는 걸 보여주는 데 온 시간을 쏟았다. 그에 반해 소설을 출판한 후에는 원칙적으로 독자들의 해석에 반론하지 않아야 한다는(또한 어떠한 해석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를 느꼈다.
이런 차이가 생긴 까닭은(여기서 우리는 창조적 글쓰기와 과학적 글쓰기의 진정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론서가 대체로 특정한 이론을 증명하거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면 시나 소설을 쓸 때 사람들은 모순 가득한 삶을 대변하고 싶어 한다. 여러 삶의 모순들을 펼쳐놓고 분명하고 통렬하게 드러내고자 하는것이다. 창조적 작가들은 독자에게 해답을 찾아보라고 주문할 뿐 공식을 정해주지는 않는다(싸구려 위안을 주려는 키치적 작가나 감상주의적 작가들은 제외하고). 내가 갓 출판한 첫 번째 소설로 강연을 하러 다니던 시절, 소설가는 때때로 철학자가 하지 못하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16-17)

첫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영감‘이란 약삭빠른 작가들이 예술적으로 추앙받기 위해 하는 나쁜 말이다. 오랜 격언에 천재는 10퍼센트의 영감과 90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은 종종 자신의 가장 뛰어난 시 중 하나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밤 숲길을 거닐고 있을 때, 한 편의 시가 완성된 형태로 섬광처럼 떠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라마르틴이 세상을 뜬 후 그의 서재에서는 바로 그 시를 여러 해 동안 수없이 고쳐 썼던 방대한 분량의 원고가 발견됐다. (어떻게 쓸까, 21)

영감이란 서서히 떠오르기도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장미의 이름]을 완성하는 데는 불과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 대해 더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덕분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중세 미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고, 그 후로도 중세에 대한 연구를 더 이어갔다. 몇 년 동안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과 고딕 양식의 대성당 등을 찾아다녔다.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마치 수십 년 동안 중세에 관한 정보들만 모아두었던 널찍한 벽장을 여는 것 같았다. 필요한 모든 자료가 내 코앞에 있었고, 나는 단지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어떻게 쓸까, 24)

[장미의 이름]을 출판한 후 맨 처음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던 영화감독은 마르코 페레리(Marco Ferreri)였다. 그는 내게 "영화 대본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셨군요. 대화 길이가 딱딱 맞아떨어져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글을 쓰기 전에 수백 개의 수도원 도면과 미로들을 그려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덕분에 등장인물 두 명이 대화를 나누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가 만든 허구의 세계에서는 구획과 배치에 따라 대화의 길이가 정해졌다.
이런 식으로 나는 소설이 단지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는 걸 터득했다. 시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낱말의 음과 저자가 의도한 다중적 의미까지 계산에 넣어야 하는데다, 단어의 선택에 따라 내용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 같은 서사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서사는 작가가 창조하는 ‘우주‘ 이며, 그 안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음률과 문체, 단어 선택까지 정해진다. 서사는 라틴어로 ‘렘 테네, 베르바 세쿤투르(Rem tene, vertba sequentu)‘, 즉 ‘주제를 고수하면 언어는 따라온다‘는 법칙에 지배받는다. 반면 시는 그와 반대로 ‘언어를 고수하면 주제는 따라온다‘로 바뀌어야 한다. (세계 설계하기,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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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별한 은둔자의 사례를 통해 길어낸 고독에 대한 고찰에 방점이 있는 책이 아니다. 그저 그 사례 자체를 기자의 시각으로 다룬 글이다. 크리스토퍼 나이트란 사람과 그의 은둔에 대해 기자의 집념으로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해 나열하는, 다소 개인적인 취재기 정도.

크리스토퍼 나이트의 외모, 행동방식, 생존전략에 대한 피상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거기에서 길어낸 고독과 침묵에 대한 독자적 고찰은 거의 없다. 가장 좋은 부분은 대부분 저자가 정신과 의사, 심리 상담사, 철학자, 현자 그리고 나이트의 말을 인용한 단락들이었다.

사회로 돌아간 나이트와 그의 가족들 모두에게 연락하고 수소문해 지속적으로 그의 집 근처를 찾아가는 마지막 챕터들을 보면서는 제발 그를 내버려뒀으면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정도로 그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피상적인 묘사들만 나열되는구나 싶었다. 저자는 은둔자를 은둔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언어가 아닌 인용문들로 그의 윤곽을 그리려 애쓰며 깔짝대기만 한다. 그저 ‘고독에 대한 현대인의 열망‘이라는 얕은 동경으로 그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살림 출판사의 편집에 대하여. 양쪽 정렬이 아닌 왼쪽 정렬의 책은 거의 처음 본다. 거기다 간간이 본문의 몇 문장들을 복사해 뜬금없이 한 페이지에 크게 그 문장들만 인쇄해놓았다. 페이지를 늘리기 위해 여러모로 애썼다는 생각이 든다. 역자 소개도 없다.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힘들다.

크리스토퍼 나이트라는 존재의 면면이(그 누구도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조금이라도 여기에 담겨 있다는 것만이 이 책을 간신히 읽게 해준다. (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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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혼자 있고자 하는 갈망은 부분적으로는 유전적이어서 어느 정도 측정이 가능하다. ‘사교성의 달인‘ 화학 물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뇌하수체 펩티드 옥시토신의 수준은 낮은 반면, 애정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는 바소프레신 호르몬 수준이 높으면 대인관계를 덜 필요로 하는 경향이 있다. (110)

"발전적인 생각을 하는 데에만 마음을 쓰기로 했어요. 걱정은 생존과 계획을 빨리 세우라는 추가 신호이거든요. 나는 계획을 세워야만 했어요." (153)

나이트의 소로에 대한 무시는 바닥이 안 보였지만 -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요" - 에머슨은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었다. 에머슨은 "다른 사람을 아주 적은 양씩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자신만이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했다. (159)

카를 융은 오직 내향적인 사람만이 인간의 불가해한 어리석음을 알 수 있으리라고 봤다. 니체는 "군중이 있는 곳은 어디든 악취라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했다. 나이트의 가장 친한 친구 소로는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사회라 해도 모든 사회는 시민들을왜곡한다고 믿었다. 사르트르는 이런 글을 남겼다.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어쩌면 ‘왜 사회를 떠났는지가 아니라, 왜 사회에 머무르고 싶어하는지가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고 나이트는 넌지시 자신의 의중을 내비쳤다. (189)

자폐 범주에 속한 아들이 있는 남아프리카의 신경과학자 헨리 마크램(Henry Markram)은 자신이 만든 강렬한 세계(intense world) 이론으로 자폐를 설명한다. 즉 대부분의 사람은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움직임, 소리, 빛이 자폐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공격처럼 다가오고, 삶이 정신이 하나도 없는 타임스 스퀘어를 영구적으로 방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도 압도되어 지나치게 많이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빨리 알게 된다.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은 섬광전구(순간적으로 강한 섬광을 내며 터지는, 사진 촬영에 쓰는 특수 전구)를 응시하는 것과 같다. 침대 스프링에서 나는 끼익 소리도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마크램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면 세부사항과 반복에 철저히 집중하는 능력을 키워서 인생을 되도록 있는 힘껏 통제해야 한다고 봤다. (193)

나이트의 내면에는 두 항해사가 다 있는 것 같았다. 어두운 면과 밝은 면, 겨울의 음과 여름의 양. 그는 "고통과 기쁨‘이라고 했다. 둘 다 필수이며, 인간은 어느 하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2001년 한 해 동안 파타고니아에 있는 한 섬에서 홀로 살았던 로버트 컬(Robert Kull)은 "고통은 삶의 아주 깊은 부분이다. 너무 힘들게 고통을 피하려고 애쓰면 결국 인생 전체를 피하게 된다"고 했다.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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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재규정하는 전략을 보완 또는 대체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 다른 절차를 거칠 수 있다. 자기 체면이 손상되지 않은 경우에는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심리적 보상을 해주거나, 상황을 자기의 탓으로 돌리며 후회하고 사죄를 하는 것이다. 이는 의례적 주고받기에서 중요한 조치이자 단계이다.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그런 수단을 통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제 자신이 면목을 일신한 사람임을, 심판의 무대에서 표현적 질서를 거스른 죄의 대가를 치렀고 그래서 다시 한 번 믿어도 좋은 사람임을 드러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가볍게 대하고 있지 않음을, 그리고 본의는 아니었으나 자기 때문에 누가 마음이 상했다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자기의 해명을 받아들여도 자부심이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상대를 안심시킨다.
또한 그는 자기를 자책하고 낮춤으로써, 만일 사건이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범죄나 마찬가지이며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벌 받아 마땅함을 알고 있다는 뜻을 내비친다. 그래서 그는 자기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음을, 또 자신은 여전히 의례과정에서 분별력있는 참여자임을, 그리고 자기가 깨뜨린 품행규칙은 여전히 실재하며 성스럽고 약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무례한 행동은 의례 코드에 대한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다. 무례한 짓을 저지른 사람은 의례 코드와 코드 지지자인 자신이 모두 순조로운 질서 속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좌중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린다. (32-33, 결국 사죄는 여전히 그 사회적 공간에 자신이 자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체면을 본래 논리에 그대로 끼워넣어두기 위해서인가. 오히려 체면 때문에 사죄를 하지 않는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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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인데." 그녀가 설명했다. "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조숙한 애늙은이였어."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넌 더는 경험할 일이 하나도 없어. 한갓 회상할 일만 남았을 뿐이지. 넌 더 만나야 할 사람도 없어. 이별을 나누기 위한 예외적인 만남을 제외하곤. 그리고 넌 한나절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거야. 같은 날 저녁이나 밤에 찾아올 종말을 예기하지 않고선 말이야." (50)

나중에 산 자들을 차차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죽은 자들이 그들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침통한 묵묵무언의 성향도 죽은 자들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58)

‘아저씨들의 세계가, 온갖 사물을 일목요연하게 자리매김해 둘수 있는 아저씨들의 안전한 세계가 사라졌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거지요. 사물이 매 순간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지금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저씨는 겁이 나는 거예요. / 아저씨들은 당신네들의 세상만이 진정한 세계라고 항상 자만에 차 있었지요.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진정한 세계는 나의 세계예요. 그건 일차적이고 가시적인 현실 즉 실제로 만져 볼 수 있고 또 움직이는 삶의 이면에 자리한 삶이에요. 아저씨가 보는 것은, 아저씨와 같은 아저씨들이 직면하는 것은 하나같이 죽음이에요. 죽음." (83)

중국인 소녀를 찾아 곳곳을 헤맸지만 그녀를 놓쳐 버린 나, 그녀를 찾아 헤매지 않았지만 대신 나를 만나고 맞이해 준 그들. 그들은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었고, 나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며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 깊이 사유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세속을 너무나 많이 겪어 버렸다. 내가 인생을 잘못 이해하고 그것을 낭비했기에 거리는 불안과 동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인생, 결과는 매한가지이다. (130)

난 그저 그들에게 무척 샘이 났어. 어쩌면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들은 늘 자아의식의 범주 밖에 존재함을 원칙으로 했던 반면 나는 그 범주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야.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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