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의 매력’ 혈통주의 넘어 새 트렌드로::)

무국적성·탈국적성이 문화트렌드로 뜬다. 최근 대중문화계의 주 된 흐름은 적극적으로 ‘국적지워내기’다. 이는 이국적 정서로 다른 문화상품과 차별화를 노리는 전략이기도 하고 해외수출 등 판로모색을 위해 적극적으로 시도되기도 한다. 혹은 그 자체가 문화잡종화, 다문화의 포스트모던한 시대적 흐름의 산물인 경우 도 있다.

대중문화의 탈국적성·무국적성 트렌드가 두드러진 것은 역시 TV 를 누비는 혼혈연예인들. 데뷔초기부터 혼혈의혹을 받아온 이유 진이 눈물의 기자회견을 한 것이 불과 1년여다. 이후 TV에는 혼 혈임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혼혈이 가지는 매력을 최대한 내세운 연예인들이 늘고 있다(특히 백인혼혈은 세련되고 서구적인 외모 , 세계화시대에 어울리는 국제감각을 갖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CF모델로 시작해 오락프로 패널, 탤런트로 진출한 ‘파충류소녀 ’ 김디에나, CF와 영어방송 진행을 거쳐 가수데뷔를 준비중인 제니퍼 영 위즈너가 대표적. 가수로는 윤미래, 소냐가 활동중이 며 이유진도 고백후 인기전선에 이상이 없다. 주로 백인혼혈에 집중되지만, 이들에 대한 대중의 관대한 시선은 우리사회가 순수 혈통주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

한국연예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일본배우 유민(후에키 유코)이 후 외국배우의 국내활동도 늘어나고 있다. 이미 국내 CF계에는 소리소문없이 일본인 모델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던킨 도너츠 ’의 오타니 료헤이,‘KTF Na’의 휘황(재일교포3세)을 비롯 지 난해 60여명의 일본인 모델들이 40여편의 CF에 출연했고 서태지 의 ? ?觀맥??등 뮤직비디오로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한류열풍’을 노려 기획단계부터 아예 아시아권을 겨냥한 탈국 적 문화상품 개발도 눈에 띈다. HOT 보아 신화 등을 탄생시킨 SM 엔터테인먼트의 ‘신병기’인 남성 5인조 그룹 ‘동방신기’가 대표적. 중국풍 사자조어인 ‘동방신기’라는 팀 이름부터 멤버 들의 이름까지 유노윤호(瑜鹵允浩) 시아준수(細亞俊秀) 믹키유천 (秘奇有天) 등 중국풍이다. 자켓만 봐서는 한국팀인지 일본인지 중국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모던록 밴드 ‘도로시’는 아예 멤버 구성 자체가 ‘다국적’이 다. 한국인 여성보컬에 미국 호주 캐나다 국적의 연주자 3명이 결합했다. 이들은 타이틀곡 ‘소풍’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2번 녹음했다.

이같은 탈국적성 기획의 최고상품은 역시 3일 국내 개봉하는 영 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여친소)’다. 홍콩제작자 빌 콩 이 제작비 전액을 대고 아시아 전역에서 개봉하는 ‘여친소’는 ‘엽기적인 그녀’로 한류의 핵이 됐고 왕조현 등 서늘한 아름다 움을 지닌 홍콩배우의 계보를 잇는 전지현을 캐스팅하는 순간부 터 한국적을 포기하고 탈국적으로 달려간 영화.

영화는 서울에서 촬영됐지만 서울이라기보다는 국적불명의 도시 처럼 찍혔고 보디가드풍의 검은 제복을 입고 총알을 날려대는 여 경 전지현 역시 한국의 여경은 아니다. 영화는 OST로 팝, 가요, J팝을 잇따라 선택했는데 클라이맥스에는 일본 록그룹 X재팬의 ‘티어스’가 흐른다. 멜로 액션 코믹이 결합된 이 영화에서 액 션부문이 홍콩누와르적 장치를 택했듯이 멜로부문의 과도한 감상 성, 신파성 역시 한국적 정서는 아니다.

이같은 탈국적성은 비단 국내에 한정되지 않는다. 90년대 미국에 이어 제2의 대중문화 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의 경우 대중문화상 품에서 일본색을 지워버리고 국적불명 전략을 택한 것이 성장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또 실제 일본스타들은 아무로 나미에 등 상당수가 혼혈이기도 하다). 미국의 외교잡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는 2002년 특집기사에서 일본이 미국과 동등할 만큼의 (대중)문화 초강국으로 부상한 성장배경의 하나로 “일본색이나 특정 메시지, 이데올로기가 없는 국적불명성”을 꼽은 바 있다.

탈국적성은 미국패권주의로 무장한 할리우드에서도 포착되고 있 다. 이탈리아계인지 히스패닉인지 흑인피가 섞였는지 알 수 없는 외모로 미국내 다인종·잡종문화를 상징하는 빈 디젤이 해리슨 포드같은 ‘아메리칸 히어로’자리를 물려받고 있는 것이 대표적 인 예. 전형적 금발미인대신 제니퍼 로페즈, 페넬로페 크르주 같 은 라틴계나 에콰도르 출신 팝스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각광 받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와 관련 지난해말 뉴욕타임스는 인종적으로 모호한 ‘EA(Ethnically Ambiguous) 세대’가 급부상 했으며, 글로벌 다인종시대 국적불명이나 인종적 모호함은 젊은 이들에게 세련됨, 성적 매력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 도했다.

최근 국내에는 ‘다국적’을 컨셉트로 한 TV프로그램까지 생겼다 . 주한 외국인 30만명시대를 겨냥 20여명의 외국인 패널이 출연 해, 국가간·문화간 차이를 토론하는 SBS ‘외국인대설전’이 그 것이다. 이 프로의 한결같은 결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이 상 국가간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차가 존재할 뿐이 다.’

양성희기자 cooly@munhw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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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5-2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닉네임 바뀌었군요..
 

출처:규항넷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리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민중항쟁에서 마지막까지 총을 들고 싸우다 전사한 윤상원과 그의 들불야학 동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바쳐진 노래다. 노래는 그 유래에서, 그 가사와 곡조의 서정성과 비장미에서 남한 진보운동의 역사를 대표하는 노래라 할 만하다.

노래는 탄핵반대 시위(파시스트의 도발에 대한 당연한 분노였지만, 개혁 대통령을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만드는 의식이기도 했던)에서 널리 불렸다. 그 사실은 노래의 유래와 윤상원의 정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

총기 반납과 계엄군과의 타협을 거부한 채 끝까지 싸우다 죽어간 전사가 파시스트의 도발에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전사가, 제 배를 가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이제 분신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시절은 지났다”라고 지껄이는 더러운 입에 조금이라도 이로움을 주는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탄핵과 관련하여 우리가 감히 윤상원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상상은 그가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누구보다 끝까지 ‘민중에 의한 탄핵’을 외쳤을 것이라는 것뿐이다.

80년 5월 27일 새벽, “저승에서 만납시다.”라고 인사하며 각자의 전투 위치로 갔던 윤상원과 광주의 마지막 전사들이 지키려고 했던 건 무엇인가. 다들 말하듯, 그것은 ‘시민의 민주주의’였던가. 그랬다면 그들은 굳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걸 지키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듯이 말이다.

그들, 윤상원과 광주의 마지막 전사들이 지키려고 한 건 ‘민중의 나라’였다.

“당신은 윤상원을 기억하는가?”

자신이 개혁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질문은 좀더 정확하게 수정되어야 한다.

“당신은 총기 반납을 거부했겠는가?”
“당신은 도청에 남아 싸우다 죽었겠는가?”

이제 자신이 개혁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다.

언제나 그렇듯,
살아남은 현실주의자들은 죽어간 원칙주의자의 정신을 훔쳐 먹으며 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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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갈이 넷에 진중권이란 이름으로 글이 올라와 있는데 그가 작성한 글이 맞건 안맞건 이 글에 동의한다.왜?너무나도 뻔한 소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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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당선자가 조선일보 노조의 초청으로 강연을 한 것을 두고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오마이무현과 열린겨레가 선봉에 섰다. 언론노조와 인터넷 매체들도 분기탱천 들고일어났다. 열린우리당 의장이 조선일보와 인터뷰했을 때에는 찍소리도 못했던 분들이다. 박영선 대변인이 안티조선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해도 군소리 없었던 분들이다.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줄줄이 디지털 조선에 데뷔해도 아무 불만 없던 분들이다. 더러 불평이 나와도 그저 궁시렁거리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노회찬에게만은 저들의 성스런 분노가 돌아간다. 왜 그럴까?

제2의 노회찬 어록이 떠돈다. 인터넷 기자협의회라는 곳에서는 “조선일보가 품질에서 제일 낫다”는 노회찬 총장의 말을 걸고넘어지며 그의 사과를 요구했다. 한 마디로 변태적인 발상이다. 도대체 한 사람이 조선일보가 품질이 낫다고 ‘생각’하는 게 왜 그들에게 ‘사과’해야 할 이유가 될까? 게다가 그 정도의 발언은 이미 강준만도 했던 것이다. 얼마 전 한겨레신문의 기자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시에 한겨레 학술 기사들이 조선일보의 학술기사 못지 않은 고급성을 갖추도록 노력할 겁니다.”

언론노조의 논평은 온통 횡설수설이다. 자기들은 소를 타고 가는데, 노총장은 왜 말을 타고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자기들이 소를 탄다고, 남까지 소 타라고 강요하면 안 된다. 또 조선일보와의 관계가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관계”며 “쌍방이 더 적극적이고 좋은 관계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발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안티조선은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로 시작했지, “일전을 불사”해 가며 조선일보를 없앨 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봉을 쪼개 민주노동당의 총선 선전을 후원”했다는 한겨레신문 조합원들은 “실망의 수준을 넘어 분노와 비애감을 감출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박봉을 쪼개 열린우리당의 총선 선전에는 아예 ‘올인’을 했던 그 신문의 조합원들이 왜 정동영 의장과 박영선 대변인의 발언은 “수구언론의 물량공세에 맞서 진보적 대의에 맞는 신문, 말 그대로 좋은 품질의 신문을 만들기 위해 애써온 많은 언론 노동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느끼지 않는 것일까? 그 심오한 논리가 궁금하다.

2년 전부터 나는 ‘안티조선’이 궤도를 벗어났다고 경고해 왔다. 문제는 언론운동을 과거에는 민주당, 지금은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경향이다. 이 경향은 아예 인터뷰를 한 정동영은 너그러이 용서하고, 노조의 초청에 응한 노회찬은 집단적으로 조져대는 그 징그러운 당파성 속에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MBC에서 송만기 발언 관련하여 왜곡편집을 했을 때, 민언련을 비롯해 조선일보를 비난하던 언론운동 단체들은 일제히 침묵했던 것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이것도 언론의 공정성을 확립하기 위한 고귀한 침묵인가?

여론몰이로 남의 입 틀어막는 게 조선일보의 특징이라면, 똑같은 짓을 그 반대편에서 한다. 자기들 비판하면 곧바로 ‘보복’을 한다. 한겨레는 진중권이 제 책으로 세 출판사와 겹치기 출판을 하여 부당이득을 취한 부도덕한 자라고 공격했다. 오마이뉴스는 진중권이 인성이 나빠서 교수가 못 됐다는 기사를 1면 탑으로 올렸다. 미디어오늘은 뒤샹의 ‘소변기’를 ‘변기’로 부르는 진중권은 “똥오줌 못 가리는” “뽕론가”라는 처참한 수준의 비평을 기사로 올렸다. 기사의 제목도 정치적이다. ‘조선일보와 진중권의 미술평론.’ 조선일보도 나를 공격할 때 이렇게 유치하게 하지는 않았다. 이게 당신들이 생각하는 언론인가?

‘안티조선’, 점검이 필요하다. 너무 유치하게 교조화됐다. 조선일보는 당분간 우선감시 대상신문으로 놔두더라도, 이제는 모든 활자매체, 방송매체, 인터넷 매체로까지 비평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조선일보를 닮는다고 조선일보가 극복되겠는가? 조선일보가 공정성이 없다면, 자기들만은 공정성을 실천해야 한다. 조선일보가 사람을 잡는다면, 자기들은 그런 짓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조선일보를 극복하는 길이다. 한번 쯤 조선일보 비난하던 자기들은 얼마나 공정한 저널리즘을 실천했는지 파지음경하고 되돌아 볼 때도 됐다. 노회찬을 비판하려면 제대로 하고, 광란의 마녀사냥은 당장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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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데이비드 하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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