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파울 클레의 세계

 

 

 

 

파울 클레의 전시회 소식을 접하고 주최기관인 소마미술관의 보도자료를 옮겨오려고 했으나, 오마이뉴스에 더 잘 정리된 기사가 있기에 그걸 대신 가져온다. 작성자는 김형순 기자이며 나는 기사에 따로 손대지 않았다. 이전에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지의 논리>와 관련하여), 나의 관심은 소쉬르의 언어학과 그와 동시대인인 클레의 방법론 사이의 유사성, 혹은 상관성에 놓여 있다(매개가 되는 것은 음악, 음악적 컴포지션이다). 그럴 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의 컴포지션 추상화들이다. 아무려나 국내에서는 최초의 전시회라고 하니까 언제 시간을 좀 내야겠다. 아래는 소마미술관이 내건 간략한 작가 소개이고(강조는 나의 것), 바로 이어지는 것이 오마이뉴스의 기사이다.

-환상적이고, 재치 있으면서, 때로는 괴기스럽기도 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 파울 클레(1879-1940)는 현대 미술가 중에서도 가장 지적이고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준 작가이다. 스위스 베른 근처에 있는 뮌헨부흐제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화가였으며, 1920년대에는 독일의 조형미술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폭넓은 독서를 하였고, 철학, 식물학, 생물학, 인류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해 광범위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화가에게도 '폭넓은 독서'는 필수적이다). 그에게 있어 풍부한 이미지의 원천은 자연이었다. 그는 바다나 산, 들을 찾았고 조개껍질, 식물, 꽃, 나무 등을 관찰했다. 또 캔버스뿐 아니라 삼베, 천, 거즈, 나무판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으며, 유화, 템페라, 수채, 과슈, 동판, 드로잉 등 다양한 기법들을 실험했다.

-클레의 작품은 완전히 추상적이지도, 완전히 형상적이지도 않다. 그의 작품은 고도로 숙련된 드로잉 기법을 보여주는 한편, 색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소품들로, 기본적으로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심원한 지성으로 파악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읽고, 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원초적인 상징과 형태를 창조해냈다. 그의 미술은 시, 음악, 그리고 꿈에 가까우며, 한눈에 들어오는 미술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게 하는 미술이다. 마치 하나하나가 작은 보석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무려 9,100여 점에 달하는 클레의 작품들은 몇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우리만큼 다양하고 다면적인 미술세계를 이룬다.

▲ 올림픽공원 옆 미술관, 마치 영화 제목 같다. 현대적 건축물이 조각 공원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 뒤로 움직이는 백남준 작품 '쿠베르탱'이 자리 잡고 있다.
ⓒ 김형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미술관이 이름을 바꾸고 새로 단장한 '소마(SOMA)미술관'에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동화적 환상과 다양하고 실험적인 형태와 색채를 표현한 20세기 미술의 거장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눈으로 마음으로' 전이 오는 7월2일까지 국내에서 처음으로 판화, 유화, 수채화, 드로잉 등 약 60점을 선보이며 열린다.

파울 클레(Paul Klee) 생애 및 프로필

▲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여념이 없는 파울 클레
1879 12.18 스위스 뮌헨부흐제 출생
1898 뮌헨 이사.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
1906 릴리 슈툼프와 결혼
1910 첫 전시회 56점(베른, 취리히, 바젤 미술관)
1912 F. 마르크, W.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 그룹전' 참가
1914 마케 등 친구들과 튀니지 여행
1920 '클레 회고전'에 362점 출품(골츠 갤러리)
1921 '바우하우스'에서 강의 시작
1925 '바우하우스' 데사우로 이전
1929 '탄생 50주년전'(뉴욕 근대미술관, 베를린 국립미술관)
1931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
1933 나치 압력으로 교수직에서 해고
1935 희귀병인 진행성 피부경색증 발병으로 다작 시도
1937 나치가 주관한 '퇴폐미술전'에서 100여점 압류
1938 스위스 시민권 획득
1940 6.29 스위스에서 사망
파울 클레는 우리가 익히 들어왔고 미술 교과서에서 많이 봐왔지만 뚜렷한 대표작이 연상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술의 본질을 추구했는지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그를 '그림의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지적인 요소와 함께 시적 상징성과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이 그림 속에서 잘 구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울 클레는 스위스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Münchenbuchsee) 음악가 집안에서 1879년 12월 18일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클레는 성악가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음악 교사가 된 사람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프리크도 슈투트가르트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후에 결혼한 릴리 슈툼프도 피아노 교수였다.

그는 이렇게 음악의 한복판에서 살았지만 최종적으로는 미술을 택했다. '그림 한 점에 대하소설이 담겨 있다'든가 '예술의 꽃은 단연 미술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는 결국 스스로 제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음악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과 경험을 미술 안에서 통합시켰다.

그의 작품이 조금 괴기하고 상형문자를 연상시키는 선묘와 추상적 기법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서정적 분위기 연출하는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낭만적인데다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적 요소가 공상적이고 우화적인 요소로 승화되어 그림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이리라.

▲ '미래의 남자(1933, 좌)', '비탄에 빠짐(1934)' 클레 작품은 독특한 선묘와 구도와 색채 이 모든 것들이 신비하고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하여 관람객 마음을 사로잡는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갖가지 구도와 색채 실험

클레는 평생 일기를 거르지 않고 쓸 정도로 성실했고 지적 호기심을 불태우는 학생처럼 살았다. 철학, 식물학, 인류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해 폭넓은 독서와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산과 바다, 꽃과 나무와 물고기 등 주변의 사물을 예의 관찰하였고 그 속에서 풍부한 이미지를 발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르네상스 화가들처럼 해부학에서 푸생이나 다비드, 밀레 등 고전주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탐구했다. 또한 이글거리는 태양 이면에 인간의 번뇌를 표현한 고흐, 현대 회화를 연 세잔, 야수파의 선각자 마티스, 북유럽의 표현파 특히 입체파를 한 단계 끌어올려 오르피즘의 창시한 들로네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 '별들과 함께(1923)' 판지 위에 종이에 연필과 수채. 클레의 9천여 점 작품이 다 천차만별이지만 이 작품도 이채롭다. 엷고 진한 색채 간 대조와 어린이처럼 장난기 넘치는 해학과 유머가 돋보인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그림 재료도 캔버스, 삼베, 천, 거즈, 나무판 등 복합 매체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안료로는 유화는 물론, 불투명한 수채 물감인 구아슈, 동판, 드로잉, 그리고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썼다는 템페라 물감까지도 두루 시도했다.

무려 9146점에 달하는 작품은 제작한 클레는 사물의 원리를 다각도로 실험하고 검사하는 과학자 같은 작가로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그림 하나도 모방하지 않으면서 다르게 그린 것 같다. 그는 이런 각고 끝에 그때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미술의 공간성 실험이나 시각적 확대, 현대적 조형성을 창조하여 20세기 미술계의 거장이 되었다.

클레는 1912년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 및 프란츠 마르크와 알게 되어 상호 교류했으며 그들의 전위파 그룹인 '청기사파(Blaue Reiter)' 전시회도 참가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쾰른, 베를린 등 유명 사립미술관에서 초대를 받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 '언덕(1914, 하좌)', '색채 띠에 연결된 추상적 색채의 수채(1914, 하중)', '그리고 아, 나를 더욱 쓰라리게 하는 것은 당신이 내가 가슴속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1916, 상좌)' 글씨를 채색화로 형상화한 작품, '여러 층의 작은 구조물(1928, 우)' 튀니지 여행 후 채색의 확연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파울클레미술관
ⓒ 김형순
2년 후 30대 중반이 된 클레는 겨우 12일간 짧은 여행이었지만 어린 시절 친구인 루이 무아예와 동료 화가인 마케와 함께 튀니지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지중해 해안의 이글거리는 색이 주는 눈부신 광채에 반해 버렸다. 이 여행은 그의 미술을 자연 그대로의 현상에 대한 묘사로부터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는 더 강력한 추상적 화풍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본다면 극과 극이 통하나 보다. 아프리카의 가장 원시적 색채와 미술이 서구의 가장 전위적 미술의 원형이 된 것이다. 하긴 피카소나 마티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첨단 미술을 대표하는 입체파나 야수파도 결국은 아프리카 부족의 원시 조각이나 미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 '수염이 있는(1939 좌)', '빛에 비추어진 나뭇잎(1929)' 두 작품이 10년간의 간격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구상에서 보다 확대된 추상으로 변모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추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미술 개념에 더 가까우리라.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보이지 않는 색채와 소리까지 그리기

이는 이번 전시회 부제인 '눈으로 마음으로'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냥 '눈으로 보는 관점'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관점'으로 나누어 봐야 한다는 점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2층 전시실에 붙어 있는 클레의 명구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는 말과 전시 표제어는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대한 해석을 이 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박윤정씨에게 부탁드렸더니 그는 "그림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심상의 표현"이라는 명쾌하고 멋진 해석을 내놓았다. 클레다운 이 명구에 전문가다운 해석이다. 이런 해석을 듣고 보니 이런 말이 떠오른다. "현대 미술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더 나아가 들리지 않는 것도 그리는 것이다."

▲ '피라미드(1932)' 판지 위에 종이에 펜과 수채.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넘치는 작품으로 선과 면, 형태와 색채만으로 조형 효과를 최대화했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위에 '피라미드(1932)'를 보게 되면 사람의 이목구비가 약간 보일 정도로 완전한 추상화는 아니지만, 이목구비를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선과 면이나 삼각형이나 사각형 같은 형태 그리고 여러 밝기의 붉은 색, 고동색 등 색채를 통해 사물의 이미지를 더 실감나게 보여준다. 바로 이런 것이 기하학적 구성과 추상적 미술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나치 박해와 불치병과 투쟁

한편 40대에 들어선 클레는 '바우하우스' 조형예술 학교에서 후배 양성에 힘쓴다. 당시 그의 별명은 '바우하우스 부처'였다고 하니 그의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구도자적이었을 거라는 추리해 볼 수 있다. 이 학교가 바이마르 공화국 언론과 당시 따가운 여론에 밀려 1925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1931년 대학을 뒤셀도르프로 옮겼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아 1933년엔 나치에 의해 해임된다. 게다가 1937년 나치가 주관한 '퇴폐미술전'에서 102여점 자신의 작품이 압류하는 등 나치 탄압이 극에 달하자, "독일은 이르는 곳마다 시체 냄새가 난다"라 말을 남기고 스위스로 귀화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가장 잔인한 한 시대의 생생한 증언자가 되었다.

▲ '눈(1938)' 삼베에 파스텔. 캔버스 대신에 삼베를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그는 이렇게 그림 재료에서도 두루 다각적 실험을 시도했다. 한눈으로 보이는 것을, 다른 한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1938년 작 '눈'이라는 작품은 당시 분위기를 풍긴다. '한눈으로 보고 다른 눈으로 느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어라'라는 메시지도 포함된 것 같다. 제작 연도로 봐서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로 나치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을 것 같다.

클레는 말년에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희귀병인 피부경색증를 보이자 반대급부인지는 몰라도 놀라운 정도로 많은 작품을 쏟아 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초기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선묘와 다르게 병마로 손길이 무뎌지면서 선과 면이 단순해지고 굵어졌지만 원숙하고 중후한 아름다움으로 넘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그림자를 작품 전반에 담은 듯하다.

▲ '밤의 암탉(1939)' 작고 1년 전 작품으로 검붉은 바탕에 굵고 검은 선이 더욱 완숙해 보인다. 작가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도 감지되는 것 같다. 이 그림은 구상적 요소를 해체하여 추상적 바탕에 담았다. 추상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

클레 그림은 때론 추상 화가답지 않게 고전적 느낌을 준다는 지적도 받는데, 이는 그가 미술과 음악, 추상과 구상, 서구적 미술과 비서구적 미술, 천진난만함과 괴기함, 차가운 지성과 따뜻한 서정 등 경계를 넘나들며 퓨전적 요소를 많이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클레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나중에 배워야 하는 작가라고 이 미술관 큐레이터 박윤정씨는 귀띔해 준다.

▲ '소문(1939)' 판지 위에 페이스트에 유채. 극도로 단순화한 형상과 구도를 띠고 있으며 돌고 도는 소문처럼 아래 작은 바퀴처럼 인생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생사화복을 초월하여 말년의 대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그림 같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한국 작가 중 그의 영감을 많이 받은 분이 장욱진 화백이 아닌가 싶다. 새와 나무가 많이 등장하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서 만나는 넉넉하고 한가로운 마음과 우화적이고 해학적 형식으로 표현한 장욱진 그림은 들여다볼수록 반추상이긴 하나 도교 풍의 한국판 클레 같다.

클레의 '보이게 하는 그림'과 장욱진의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그림'이 동서를 넘어서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니 클레가 먼 나라 작가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작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06. 04. 18.

 

 

 

 

P.S. 오래전에 호암아트홀에서 있었던 장욱진 전시회가 기억난다. 관련서와 기념품을 샀던 기억도. 그리고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던 기억도. 10년도 더 된 기억 같다. '도쿄풍의 한국판 클레'라... 그러고 보니, 닮은 점도 없지 않다. 한데, 클레도 자기 가족의 그림을 그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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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its > [펌] 국방부, 대체복무 입법 의지 있나?

국방부, 대체복무 입법 의지 있나? | NEWS 2006/04/14 15:14
http://blog.naver.com/edukht/60023482010
병역거부 반대자가 연구위원회 참여...각계 조속 처리 촉구
코리아포커스 송옥진 기자 , 2006-04-13 오후 3:51:13  
 

대체복무제도를 허용하는 내용의 병역법개정안이 3년 가까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불교, 천주교, 기독교, 법률, 예술계 등 각계가 대체복무입법을 촉구하고 나섰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는 13일 국회 기자실에서 법조계, 교육계, 학계, 불교계, 천주교, 개신교, 일반 시민 등 1천여명이 연명한 대체복무입법을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2년째 잠자는 대체복무관련법, 문화체육계인사가 대체복무제도 연구
지난 2004년 9월 임종인 의원 등이 발의한 대체복무제도를 허용하는 병역법개정안은 아직까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못한 채 잊혀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임종인 열린우리당 의원(국방위)은 “18명으로 구성된 국방위원 중 열린우리당 7명, 민주당 1명, 민주노동당 1명 등 9명의 의원이 찬성하고 있지만 한나라당 9명 의원 전원이 반대하고 있어 아직까지 국방위를 통과하지 못한채 묵혀있다”며 “수십억을 받으며 야구하는 선수들은 병역특례를 해주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감옥에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방부 역시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방부에 병역거부 인정과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권고받았지만 실제 대체복무제도를 연구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을 받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 5일 민·관·군 합동으로 ‘대체복무제도 연구위원회(위원장 이상돈 중앙대학교 법대 교수)’를 꾸렸지만 17명의 위원 중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도를 연구해온 사람들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위원회는 법조계, 언론, 학계, 종교계, 시민단체, 체육예술계, 군 관계 등 여섯분야에서 선발된 17명으로 구성됐다. 특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반대해왔던 종교계 인사, 재향군인회 소속 교수가 시민단체 대표로 참가했고, 문광부 체육국장,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이 위원으로 뽑혔다.

연대회의는 “체육예술계가 포함된 것은 국방부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야구선수 특례 파문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며 “대체복무는 역사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길 거부하는 평화주의 병역거부자들을 위해 도입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카톨릭 교회, 1965년 대체복무제도 권고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을 거부하고 한국으로 선교 활동을 온 하유설 신부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에는 대체복무제도가 있었고 당시 반전평화운동의 영향으로 제가 군에 안가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천주교 신자인 고동주 학생을 비롯한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법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톨릭교회는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제79항에서 “양심적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카톨릭교회는 이미 40년 전부터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 불교인권위원회원장 정암 스님 역시 “불교는 호국불교의 전통을 갖고 있어 국가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군에 가고 싶지 않다는 한 청년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그를 억지로 끌고가 군생활을 하게 하는데 회의가 들었다”며 대체복무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6년 3월10일 현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전국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은 930명이다.
“아이들이 제게 사랑과 평화를 가르쳐 줬어요” 병역거부 선언한 김훈태 교사
김훈태 전 군문초등학교 교사는 군에 간 사람들의 평화신념을 존중한다면서, 자신의 평화신념에 따른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송옥진/코리아포커스)
지난 3월28일 평택의 군문초등학교 김훈태 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그는 교사로 부임하던 2001년부터 병역거부 문제를 고민했다. 아이들과 평화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울수록 군대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해 12월, 불교 신자인 오태양씨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예수회 신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첫 번째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이었다. 그 역시 충격을 받았지만 그때도 병역거부를 선택하기보다 대체복무제도를 기다렸다.

“2001년 처음 알게 된 후 실제 병역거부까지 4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되길 기다렸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월 입영통지서를 받은 뒤 교통사고로 당해 입영을 미룰 수 있었지만, 양심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가 평화를 위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하게 된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저에게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교육의 목적이 평화라면, 저는 제 평화의 신념에 따라 현역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더 힘들고 더 길고 더 어려워도 다른 방식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지금도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픕니다. 하루빨리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지난달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을 한 뒤 “가족의 평화를 위해 군에 간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냐”는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평화는 총을 들어 사람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총으로 보습을 만들고 흙을 가는 것이다.

“가족과 이웃의 평화를 위해 군에 간 분들의 신념을 존중합니다. 다만 저는 평화를 위한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다른 방법으로 이행하고 싶을 뿐, 국방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김훈태 교사는 교육청으로부터 직권 휴직을 명령받고 경찰조사를 기다리면서 지난 겨울부터는 평택 대추리 공부방에서 평화활동을 펴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그가 가르친 아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전해오기도 했단다.

“아이들아, 선생님은 걱정하지 않아. 선생님 역시 옳다고 생각한 길을 당당히 갈께. 너희돌도 옳은 길을 갈 때는 타협하지 말고 떳떳하게 살기를 바란다” 김훈태 교사가 아이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13일 대체복무입법을 촉구하는 각계인사의 연명에는 그의 동료교사 14명이 서명했다. 평화는 김훈태 교사로부터 평택의 작은 초등학교로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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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마광수 "굉장히 건방진 결정...왜 사라를 탄압하나"

‘즐거운사라’ 이후 또 도마오른 마광수 교수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의 새 시집 ‘야하디 얄라숑’(도서출판 해냄)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 의해 ‘유해출판물’로 판정났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도서, 전자출판물 담당)는 13일, 지난 5일 출간된 마 교수의 시집에 대해 청소년 유해간행물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배포 및 판매금지’까지 가능한 ‘유해 출판물’로 판정해 줄 것을 상급위원회인 소위원회에 권고했다.

소위원회가 유해 출판물로 최종 결정할 경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문화관광부 장관의 위임을 받아 이미 제작.배포된 시집에 대해서도 전량을 수거.폐기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 ‘판매금지’ 조치도 배제할 수 없다.

1992년 소설 ‘즐거운 사라’ 이후 14년만에 또다시 마 교수는 한국사회의 ‘벽’에 부딪히게 된 셈이다. 이러한 윤리위 결정에 대해 <뷰스앤뉴스>는 마 교수를 만나 최근 심경을 들었다.

“제인은 되고 사라는 안된다? 어찌그리 14년전과 똑같나”

마 교수는 이번 간행물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한마디로 “굉장히 건방진 결정”이라고 공박했다. 또 마 교수는 “이제껏 한국사회가 정치적 자유에만 신경썼지 표현의 자유라는 '문화의 자유'에는 너무 둔감했다”면서 즐거운 사라 파동 이후 또 다시 심한 절망감에 빠져있다고 고백했다.

또 마 교수는 자신의 시집에 실린 375편의 시 중에서 유해성이 판정난 것은 10여편 안팎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그런데도 언론에서는 마치 내 시집 전체가 통째로 유해물로 판정난 것처럼 보도했다. 과연 내 시를 읽어나 보았나”고 반문했다.

마 교수는 에로티시즘 문학을 계속해서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서 “변태든 뭐든 알아야만 한다. 스웨덴도 1967년 포르노 개방이후 오히려 성범죄는 줄었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우리 사회의 성적 보수성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마 교수는 이번 사건을 지난 1992년 ‘즐거운 사라’ 파동의 재판으로 규정하며 “어떻게 14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우리사회는 아직도 이 수준이냐. ‘제인’이 하면 되고 ‘사라’가 하면 안되는 것”이냐고 이번 윤리위 결정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뷰스: 이번 윤리위 판정에 대해 심경을 밝혀달라.

마광수: 눈만뜨면 민주화를 자부한다는 이 정권 하에서 어떻게 이런 기관(한국간행물윤리위)이 존속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예전 박정희 시대에 반정부 서적 때려잡을려고 만든 기관이 아직도 왜 존속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그야말로 위헌적 발상이다.

법정에서도 피고인에게 진술의 기회를 주는데 어떻게 저자에게 한마디 진술의 기회도 주지않고 그렇게 결정하는가. 한마디로 절차적 민주성도 결여된 ‘밀실재판’에 다름아니다. 동영상, 야설도 다 나오는 시대에 왜 유독 책에 대해서만 이렇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지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이제까지 정치적 민주화에만 그렇게나 신경썼지 ‘문화 민주화’에는 너무 둔감했다. 즐거운 사라 이후 또 한번 심한 절망감을 느낀다.

뷰스: 이번 시집이 그렇게 문제가 있나? 마교수의 새 시집에는 동성애, 양성애, 근친상간, 사디즘, 마조히즘 등 다양한 소재가 나열되어 있다. 마 교수가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자살 충동도 이번 시집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마광수: 바로 그 점이다. 윤리위가 (유해물로) 결정한 것은 내 시집에 나와있는 3백75편의 시 중 10여편 안팎이다. 그런데도 언론에서는 마치 내 시집 전체가 통째로 유해물로 판정 난 것처럼 보도했다. 과연 내 시를 읽어나 보았나고 묻고싶다.

지금 영화에서는 새디즘, 마조히즘 다 나오는데 왜 유독 책에서만 이렇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윤리위 같이 엄청난 예산을 필요로 하는 조직이 존치되려면 건수를 올려야 했을거다. 마치 일정량을 채우려고 단속하듯 말이다. 내가 ‘즐거운 사라’ 이후 확실히 찍혀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뷰스: 마 교수가 강조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왜 하필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며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냐”고 반박하기도 하는데...

마광수: 난 단 한번도 여성을 비하한 적 없다. ‘즐거운 사라’에서도 보지 않았느냐? 일본에서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여성 주도의 성 관념 문학’이라고 호평을 받았다. 왜 그럴까? 사라가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라는 능동적이었고 남성을 아래로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제발 섹스만 나오면 여성 비하라는 말을 쓰지 말라. 그런 관념 역시 우리사회의 지독한 가부장적 보수문화와 형식면에서 닮은 꼴이다.

뷰스: 또 하나의 비판은 왜 마 교수는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사상의 자유(정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침묵하느냐이다.

마광수: ‘즐거운 사라’ 이후 언론에서 하도 나를 ‘야한 놈’ 쯤으로 다루니까 사람들이 그렇게들 오해하기 십상이다. 나는 그동안 에로티시즘 문학 이전에 한국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에 걸쳐 다양한 소재의 논문과 글들을 써 왔다. 내가 쓴 그런 류의 글들은 전혀 읽어보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까, 그저 언론이 선정적으로 광고한 ‘즐거운 사라’만 보고 나를 그렇게 낙인찍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1991년에 쓴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라는 책을 읽어보았나? 나는 그 책에서 YS, DJ 등 한국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즐거운 사라’로 세상이 떠들썩해지기 불과 1년전에 쓴 책이다. 나는 그런 책을 썼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단순한 포르노 소설가 정도로 알고있다.

뷰스: 앞으로도 계속 에로티시즘 문학을 고집할 것으로 알고 있다. 에로티시즘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마광수: 그렇다. 나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낀다. 우리나라에는 왜 국산품이 없나? 국산품 애용을 그렇게나 강조하면서 왜 에로티시즘에는 문학이든 영화든 국산품을 인정하지 않는가? 외국의 에로티시즘 소설이나 영화는 그렇게도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도 일종의 문화사대주의다.

학계도 그렇다. 남의 목소리에는 박수를 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내 논란이 되면 손쉽게 폄훼하고 흠집내기 바쁘다. 이번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이 짜증나는 동네라는 것을 느낀다. 정말 떠나고 싶은 나라다. 문학을 하는 글쟁이라 먹고 살 것이 없어 못 떠날 뿐이다.

이런 문화 후진국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절망스럽다. 딱 14년전 내가 사라로 고역을 치룬 그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제인이 하면 되고 사라가 하면 안된다?’ 딱 그 14년전 기준 말이다.

내가 ‘즐거운 사라’가 야하다고 잡혀갈 때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늘어난다 잘 잡아갔다”고 떠들어대던 어떤 일류대학 교수는

전두환 때도

노태우 때도

김영삼 때도

노무현 때도

언제나 여러 관변단체 장(長)을 지내며 출세했다

그는 지금 어느 서울의 어느 대학

총장까지 하고 있다

그 놈을 때려죽이고 싶다


- 마광수 교수의 새 시집 <야하디 얄라숑>에 등장하는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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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水巖 > 파울 클레 展 - 눈으로 마음으로

 

파울 클레 展 : 눈으로 마음으로

전시일정 : 2006년 4월 7일(금) - 7월 2일(일)
전시장소 : 소마미술관(SOMA)


음악의 감각적 리듬과 무한한 환상의 세계를 표현한 
                                                     20세기 서양 미술의 거장

환상적이고, 재치 있으면서, 때로는 괴기스럽기도 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 파울 클레(1879-1940)는 현대 미술가 중에서도 가장 지적이고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준 작가이다. 스위스 베른 근처에 있는 뮌헨부흐제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화가였으며, 1920년대에는 독일의 조형미술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폭넓은 독서를 하였고, 철학, 식물학, 생물학, 인류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해 광범위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풍부한 이미지의 원천은 자연이었다. 그는 바다나 산, 들을 찾았고 조개껍질, 식물, 꽃, 나무 등을 관찰했다. 또 캔버스뿐 아니라 삼베, 천, 거즈, 나무판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으며, 유화, 템페라, 수채, 과슈, 동판, 드로잉 등 다양한 기법들을 실험했다.

클레의 작품은 완전히 추상적이지도, 완전히 형상적이지도 않다. 그의 작품은 고도로 숙련된 드로잉 기법을 보여주는 한편, 색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소품들로, 기본적으로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심원한 지성으로 파악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읽고, 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원초적인 상징과 형태를 창조해냈다. 그의 미술은 시, 음악, 그리고 꿈에 가까우며, 한눈에 들어오는 미술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게 하는 미술이다. 마치 하나하나가 작은 보석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무려 9,100여 점에 달하는 클레의 작품들은 몇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우리만큼 다양하고 다면적인 미술세계를 이룬다.



파울 클레 : 눈으로 마음으로

주최 : 소마미술관, 동아일보사, (주)로렌스 제프리스
후원 : 국민체육진흥공단, 주한 스위스대사관
협찬 : (주)KT 협력 : 파울 클레 미술관


< 관람 시간>
* 일,화,수요일 10:00 - 18:00
* 목,금,토요일 10:00 - 21:00
* 매주 월요일은 미술관 정기 휴관일입니다(야외 조각공원은 개방)

< 관람료>
* 성 인(19-64세) : 개인 10,000원 / 단체 8,000원
* 청소년(13-18세) : 개인 8,000원 / 단체 6,000원
* 어린이(4-12세) : 개인 6,000원 / 단체 4,000원

* 무료 : 장애우, 소년소녀가장, 4세 미만, 65세 이상
* 20명 이상부터 단체 요금 적용 / 군인은 청소년 요금 적용

< 단체관람 예약 관련 >
미술관안내 > 관람안내 > 관람예약 코너에서 인터넷으로 접수하시면 담당자가 친절하게 답변하여 드립니다.







파울 클레_연기하고 있는 아이들_판지 위 종이에 펜, 붓과 연필_6.6×16.5cm_1913_1908



파울 클레_색채 띠에 연결된 추상적 색채의 원들_판지 위 종이에 수채_37×52×3.5cm_1914



파울 클레_그리고 아, 나를 더욱 쓰라리게 하는 것은 당신이 내가 가슴속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_판지 위 종이에 펜과 수채_7×24cm_1916



파울 클레_병사_판지 위 면에 칼라 페이스트_46.8×34.9×4.1cm_1938



파울 클레(Paul Klee)는 음악가, 화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지적이면서도 다양한 주제와 기법을 보여준 화가입니다. 그는 고도로 숙련된 선과 세련된 색채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미술세계를 이루어냈습니다. "파울 클레: 눈으로 마음으로"는 화가 자신이 ‘미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듯이 그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과 세계를 마술적이고 환상적인 상징과 형태, 그리고 섬세한 드로잉으로 재현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특히 이 전시는 단독으로 클레 작품을 공개하는 국내 최초의 전시로서 무한한 작가의 상상력을 미술에 관심을 가진 모든 분들에게 전달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파울 클레_줄타기 곡예사_석판화_44×27.9cm_1923



파울 클레_동물들의 만남_나무판 위 판지에 칼라 페이스트와 유채_66.4×77.6×6.1cm_1938



파울 클레_눈_삼베에 파스텔_45×64.5cm_1938



파울 클레_무제(균형과 보트)_애벌칠 한 삼베에 칼라 페이스트와 유채_47.1×50.1×4cm_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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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숭배와 광기 - 개정판
발트라우트 포슈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텔레비전을 보면 잘난 사람들이 넘쳐난다.꽃미녀와 꽃돌이에 이어 예쁜 남자 신드롬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얼굴은 이제 얼굴축에도 못끼는 분위기처럼 보인다.단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고 점수를 메겨야 직성이 풀린다.소위 견적까지 줄줄이 꿰는 예비 성형외과 의사들도 항시 대기중이시다.또 입방정은 얼마나 떨어대는가.아예 몸이 뚱뚱하다고 공개적으로 면전에다 대놓고 "돼지새끼"라고 면박을 주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코미디와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을 자세히 뜯어다보면 이것은 '애교' 수준이다.

이처럼 방송에서 혹은 여러잡지의 매체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외모의 특정 부위를 유머의 소재로 삼아 히히덕거리고 즐기는 풍경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다."타인의 외모를 놓고서 좋다 혹은 나쁘다 하고 평가를 내리는 것.그건 일종의 인종차별이나 다를 바가 없다"이러한 현상은 얼굴 잡티의 세세한 부분까지 잡아내는 미디어가 출현하면서 현대인들의 미에 대한 지각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았기 벌어진 현상이기도 하다.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미디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적어도 지금보다는 만족해하며 행복했을 것이다.그리고 지방 노폐물이나 임신선,또는 어두운 색깔의 머리카락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두꺼운 허벅지,느슨하게 처진 가슴,그리고 가는 머리카락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을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미디어의 등장으로 자연이라는 자신의 몸을 혐오하고 끊임없이 교정해야 하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미디어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완벽한 색보정과 여러가지 교정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우리와 만나게 된다.광고에 나오는 잘빠진 몸과 얼굴을 한 모델들은 일상에 흔하지도 않고 그렇게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데도 미디어는 마치 그것을 가능케하는 환상을 심어준다.이로써 당신도 노력만 한다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신화'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에는 '자기 혐오하기' 전략에서 파생된 미용산업과 화장품,성형산업의 모종의 공모관계가 성립하면서 자본이라는 교집합에 모여 집단 방출한다.물론 미디어는 이러한 메세지를 반복적이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한다.그렇다.광고속의 모델들은 항상 물건을 들고 나와 유혹하는 모습이였다.상품을 팔기 위해 소비자들의 미적 욕망을 한 껏 부풀려 돈을 빼내는 역할이 그들이 맡은 임무이다.

아름다움을 파는 그 이면에는 이러한 추악한 계산이 숨어있는 것이다.철저하게 치밀한 전략에 의해 짜여진 아름다움에 관한 미적 욕망의 대상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진다.물론 자신의 외모를 꾸미고 가꾸는 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오히려 그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지은이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시스템이다."라고 말한 바 "외모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선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그런 노력이 즐거움을 주며 개성을 확장시켜 주는 한에서는 말이다.하지만 그것이 개성을 억압하고 제한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나이 서른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다.우선 이 논리는 우리의 몸과 얼굴은 언제든지 노력만하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게 바탕에 깔려있다."어떻게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했을까" 따위의 말들이 힘을 얻는 이러한 상황에서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은 일종의 방종이며 게으른 것이며 자신의 무책임과 무능력을 상징하게 된다."아름답지 않은 것은 개인의 심리적 결함 때문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이는 자기 혐오상으로 뚜렷하게 내면화되어 완성되어진다.

이렇게 되면 아름다움은 일종의 '관리'대상으로 인식된다.끊임없이 자본을 투여해야 하고 매일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며 온갖 신경을 써야한다.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조금만 관리가 소홀하면 금세 파괴되니까.게다가 아름다움은 '시간' '체력' '돈'까지 삼박자가 척척 맞아 떨어져야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이게 바로 자본의 얼굴이다.타고난 얼굴과 개성을 적극적으로 살리기보다 교정된 시선으로 바라 본 미적 기준으로 얼마나 노력하고 투자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얼굴이 결판난다.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다들 알듯이 경제적인 물질인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난한 너희들은 아름다워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부유한 계층에서 날씬한 이들이 많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가난한 이들은 당장의 먹고사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다."수많은 분석들이 입증하듯이 산업국가들의 경우,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상류계층의 사람들보다 확실히 더 뚱뚱하다."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빨아들임으로써 유지되어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몸과 얼굴을 지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본이라는 기름을 발라야 한다.현대의 미의 얼굴은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동일성의 폭력을 저지르는 자본의 얼굴과 닮아있다.군사독재의 군사 파시즘은 타자를 억압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찾았다면 현대사회의 미의 파시즘 시대는 다른 미를 억압하고 배제함으로써 정당성을 찾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판단은 상대적인 것이다.인간의 몸에 새로운 미의 관점을 입혀주는 상상력이 미적 파시즘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유일한 위안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이미지-영상 시대에는 그런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다만 미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담론을 넓혀가는 것.미용산업이 퍼뜨리는 허황된 이데올로기에 맞서 고유한 개성을 지키고 자신만의 미를 창조하여 저항하는 것.그럴 때에 비로서 미는 새로운 주체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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