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사진으로 거짓말하기]

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이라는 ‘착각’
인화지 밑에는 찍는 사람 텍스트 깔려 … 이미지 가공 눈치 못 채면 ‘영상 문맹자’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노동자 동맹.

“자기들은 지식인의 전형이고, 일반 대중은 무지하다는 전제가 항상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인터넷 첨단시대를 사는 대중은 더 이상 무지하지 않다. 그러니 더는 가르치려 들지 말라. 지금은 근대 계몽시대가 아니다.”

언젠가 어느 황우석 지지자가 내가 진행하던 방송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이제 모든 대중이 문자를 읽을 줄 알고 첨단 인터넷으로 무장했기에 더 이상의 ‘계몽’은 필요하지 않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이게 그 사람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이렇게 쓴 기억이 난다. “계몽의 과제는 성취되지 않았으나, 계몽의 시대는 지나가버렸다.”

계몽의 핵심은 대중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데에 있다. 정보와 지식의 전달이 문자로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대중이 권력에서 해방되려면 문자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 문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0%가 대학에 가는 시대에 ‘계몽’이라는 단어는 심훈이 ‘상록수’를 쓰던 시대를 연상시킬 만큼 낡은 말이 되었다.

미래의 문맹

하지만 문맹이 사라진 시대에도 여전히 새로운 유형의 문맹이 존재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문자(text)에서 영상(image)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못 읽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식과 정보의 전달이 영상에 의존하는 시대에는 영상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문맹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시위를 한다고 치자. 똑같은 사건이라도 다음 날 보수신문과 진보신문에는 각기 다른 사진이 실리게 마련이다. 한쪽 지면에는 노동자가 경찰을 구타하는 장면이, 다른 한쪽 지면에는 노동자가 경찰에게 맞는 사진이 오를 게다. 이 사진을 보고 보수신문의 독자는 노동자가 과격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고, 진보신문의 독자는 경찰이 여전히 폭력적이라고 믿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사진을 세계의 그림으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사진은 세계의 그림이기 이전에 그것을 찍는 사람의 머릿속의 그림이어서, 모든 사진의 바탕에는 찍는 이의 생각이 감춰진 텍스트의 형태로 깔려 있다. 인화지 밑에 깔려 있는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본 영상을 실재라고 믿을 것이다. 이로써 그는 다른 사람이 만든 매트릭스 속에 들어가 그걸 현실로 알고 살아가게 된다.

이미지의 주술

똑같은 범죄 현장을 묘사한 이미지라도 사진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만, 그림은 대부분 증거가 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림과 현장 사이에는 인간의 손이 끼여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그린 그림에는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 ‘manipulation(조작)’이라는 단어의 ‘mani’는 ‘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진 이미지는 인간의 손이 만든 게 아니라 기계의 화학적 작용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젠탈.

카메라의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짧은 순간 인간은 완전히 무력하다. 그렇다고 사진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사진을 찍기 전에 세팅(연출)을 할 수도 있고, 사진을 찍은 뒤에는 변형(가공)을 할 수 있으며, 완성된 사진에 엉뚱한 표제(맥락 일탈)를 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림과 달리 사진은 세계를 정직하게 증언한다고 믿기에, 이런 과정을 거쳐 조작된 이미지도 세계의 참모습으로 받아들인다.

원시인들은 가상을 실재로 착각했다. 그래서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거기에 작용을 가함으로써 현실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주술적 사유를 깨뜨린 것이 바로 문자 문화의 합리적 사유다. 하지만 우리는 구텐베르크의 은하, 즉 문자 문화의 끝에 서 있다. 다시 영상이 복귀하고 있다. 이 영상을 읽지 못하면 원시인들처럼 가상을 현실로 착각하는 새로운 주술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이미지

먼저 ‘가공’의 예를 보자. ① 사진 속의 인물들은 볼셰비키당의 전신인 ‘노동자 동맹’의 멤버들이다. ② 사진에서는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스탈린 집권 시기에 사진에서 지워진다는 것은 곧 목숨을 다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대로 없는 인물을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가령 스탈린은 요양 중인 레닌의 독사진에 자신의 모습을 집어넣음으로써 없는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다음은 ‘연출’의 예. ③ 사진은 로젠탈의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상징하는 유명한 이미지다. 저곳은 이오지마섬. 이 섬을 점령하면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이 가능했기에 이곳에서 미국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미군이 마침내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 극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저 사진은 연출된 것이다. 진짜 현장 모습은 ④ 사진이다. 보기에 너무 썰렁하지 않은가?

베를린 점령.

⑤ 사진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상징으로, 소련군이 독일 제국의회 건물에 소비에트 깃발을 게양하는 장면이다. 이 역시 베를린 점령 3일 후에 병사들을 데려다가 연출해서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의 작가는 당시 정치보위부에 불려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동무, 소비에트 군대는 인민의 약탈자가 아니오.” 확대된 ⑥ 사진 속 병사의 양 손목을 보라. 양 손목에 시계가 보인다. 당연히 시계 하나는 지워져야 했다.

 

 

이라크전의 이미지

이어서 ‘맥락 일탈’의 예. 몇 년 전 스캔들을 일으켰던 ‘공산주의 흑서’(공산주의 학살에 관한 연대기)는 ⑦ 사진을 소련에 있는 강제수용소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⑧ 사진을 보면 표지판의 키릴문자 위로 핀란드어 문구가 보인다. 원래 저 사진은 소련 영토로 진주한 핀란드군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러시아 주민들을 소개해놓은 장면이라고 한다. 표제를 엉뚱하게 붙이자 졸지에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둔갑한 경우다.

공산주의 흑서.

옛날에만 이런 짓을 한 게 아니다. ⑨ 사진은 1차 이라크전쟁 당시 쿠웨이트를 탈출한 어느 간호사의 기자회견 모습이다. 그는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병사들이 병원에 들어와 신생아를 학살했다고 증언해 세계인을 경악시켰다. 하지만 이 여인은 사건 당시 이라크에 있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간호사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 누구인가?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었다. 세계는 한 편의 연극을 실재로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귄터 안더스가 지적한 것처럼 더 중요한 조작은 연출, 가공 혹은 표제를 붙이기 전에 이루어진다. 즉 정작 중요한 조작은 사진으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미국 슈워츠코프 장군의 브리핑 덕분에 이라크전쟁을 마치 컴퓨터게임처럼 체험해야 했다. 이로 인해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은 미군의 폭격으로 새까맣게 타 죽은 이라크 병사의 시체다.

새로운 주술의 시대

이라크 간호사.

전쟁을 어떤 이미지로 표상하느냐에 따라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판단이 달라질 것이다. 1차 이라크전쟁을 일종의 컴퓨터게임으로 체험했던 미국 국민들은 2차 이라크전쟁을 너무나도 쉽게 결정했다. 그리고 그 파국적인 결과를 우리는 지금 생생하게 보고 있다.

이렇듯 사진은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 만들어놓은 영상의 매트릭스를 현실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사진의 이미지에 속는 것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아무리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도, 사진의 바탕에 깔린 텍스트를 읽지 못하면 영상의 주술에 걸릴 수밖에 없다. 오늘날 ‘문자의 계몽’은 낡은 말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몽 자체가 필요 없어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매체는 새로운 문맹을 낳는다. 문자문맹이 사라진 시대의 새로운 문맹은 ‘영상문맹’이다. 그리고 이들을 위한 영상 계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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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6-2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께요..^^

Xoxov 2006-06-2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든지요.^^
 

강남·북 학력差도 ‘대물림’된다
[경향신문 2006-06-26 09:39]    

고교생들의 대학진학률이 예전에 비해 크게 높아졌지만 20~24세 청년층의 4년제 대학진학률은 서울 강남지역이 강북지역의 2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자녀가 대학에 재학 중인 연령대인 50~54세의 대학졸업자 비중도 강남지역이 강북지역보다 훨씬 높아 ‘학력격차의 대물림’이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5일 통계청의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시내 25개구 20~24세 청년층의 4년제 대학진학률(졸업자+재학생)은 서초구(68.1%), 강남구(64.3%), 송파(58.1%) 등 이른바 ‘강남 3구’가 가장 높았고, 동작구(57.9%), 종로구(57.4%), 관악구(54.5%) 등의 순이었다. 가구주의 소득여건이 좋은 지역일수록 20~24세의 대학진학률이 높다는 것이 통계 수치로 입증된 셈이다.

반면 강북구(37.2%), 중랑구(37.8%), 은평구(44.0%) 등 서울 강북지역에 살고 ㅊ있는 20~24세 청년층의 대학진학률은 ‘강남 3구’와 큰 격차를 보였다. 특히 서초구에 사는 20~24세 청년층의 4년제 대학진학률은 강북구의 2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개발원 고형일 원장은 “2년제 대학까지 포함하면 고교생들의 평균 대학진학률은 80%를 넘어서 서울 강남·북 지역간 차이가 크지 않지만 비교대상을 4년제 대학으로 좁히면 서울 강남·북간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현상은 고교생들의 학습능력 차이보다는 두 지역 부모들의 경제력과 정보력, 학력 차이가 존재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자녀가 대학에 재학 중인 연령대인 50~54세의 대졸자 비율도 강남구(42.2%), 서초구(40.9%), 송파구(30.1%) 등 ‘강남 3구’가 가장 높았고, 양천구(22.7%), 강동구(21.0%) 등의 순이었다. 이에 반해 중랑(8.6%), 강북구(8.8%) 등 강북 지역은 8%대로 서울 25개구 가운데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원장은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이른바 명문대 진학률을 비교해보면 서울 강남·북 지역간 격차가 더욱 심하게 벌어질 것”이라며 “교육당국은 가능성은 있는데 부모의 경제력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고교생들을 발굴해 양질의 교육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전국 16개 시·도별 20~24세 청년층의 4년제 대학진학률은 대전(57.3%)이 가장 높았으며, 광주(57.1%), 전북(54.3%), 부산(54%), 강원(52.5%), 서울(51.6%) 등의 순이었다.


반면 전남(43.4%), 경북(43%), 제주(40.8%), 인천(37.4%) 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들 지역의 20~24세 청년층의 4년제 대학진학률이 낮은 것은 이곳 출신 고교생들이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바람에 주소지를 옮긴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전국 19세 이상 인구 중 4년제 대학 재학 이상 학력 소지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서울 서초구(62.2%)였으며, 성남시 분당구(61.9%), 용인시 수지읍(60.4%), 서울 강남구(60.3%), 경기 과천시(56.3%)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강진구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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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넷 > [퍼온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글쓰기의 영도(零度)(진중권)

2006. .6 9 씨네2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글쓰기의 영도(零度)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중에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그림이 있다.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글쟁이도 요동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과 역겨움에 글을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울 때가 있다. 그때는 입으로 신체 안의 모든 기관을 다 토해내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진다.

본의 아니게 논객 노릇을 한 지도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우연한 계기에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그게 아예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토해놓을 지면을 갖고 있다는 게 어찌보면 특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지면을 채우려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에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때로는 아무 견해없이 그냥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다보면 나중에는 아직 언급하지 않은 주제를 찾기 힘들어진다. 똑같은 글을 소재만 바꿔 고쳐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동일한 글쓰기가 반복되는 지루한 동일자의 무한증식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이 제아무리 다양하다 하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솔로몬의 격언처럼 세상이라는 것만큼 동일한 일이 지겹게 반복되는 지루한 드라마도 없다.

하루라도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도 있다고 하나, 사실 미디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피부의 두께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노출의 적정량이 있다. 자외선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피부가 상하고 마는 것처럼, 견딜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미디어에 노출될 때 존재 역시 화상을 입어 상처에 물파스를 바른 듯한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논객은 글을 칼처럼 사용한다. 그러다보면 온몸으로 적대자들이 휘두르는 보복의 칼집을 받아야 한다. 비난도 적당히 받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과도하게 받으면 무감해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비난을 받는 것 자체가 쾌감으로 바뀌어버린다. “내가 비난을 받는 것은 뭔가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했다는 증거다.” 증상이 이쯤 되면 하루라도 욕을 안 먹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 변태가 된다.

논객의 발언은 기술적(descriptive)이 아니라 규범적(normative)이다. 윤리학에 ‘공약의 부담’이라는 게 있어, 규범적 발언을 하는 이는 그 말을 지킬 책임을 먼저 자신에게 지워야 한다. “약속을 적게 할수록 더 많이 지킬 수 있다”는 과학의 윤리는 동시에 논객의 윤리. 하지만 논객은 과학자보다 불행하여 글을 쓸 때마다 약속을 해야 한다. 말과 글을 쏟아낼수록 글쟁이는 제 말로 제 몸을 옭아매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숨이 막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흔히 독자는 글을 보고 필자의 인격을 추정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인간과 삶을 사는 인간은 다르다. 글쓸 때의 인간은 ‘이상적 주체’가 되지만, 원고료를 챙기는 글쟁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체’다(종종 글쓴이를 직접 보고 나서 독자들이 글에서 얻은 아우라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글쟁이는 자신의 비루한 현실과 글을 쓸 때에 연기하는 이상의 괴리에 역겨움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더이상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해지는 글쓰기의 영도(零度). 지금 그 제로 디그리에 와 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 셀 수 없이 많은 말과 글을 뿌리며 살아왔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다 토해놓고, 더 토할 게 없어 위산까지 토해놓고, 그것도 모자라 몸 안의 기관을 증발시켜 스프레이처럼 입으로 뿜어내어 마침내 존재를 허공으로 날려버린 느낌이다.

이것이 내가 이 지면을 개인적 넋두리로 장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씨네21>의 독자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제는 규점을 말하고 지키는 논객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싶다.

 
글: 진중권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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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6-06-25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진중권보다 글 잘쓰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역쉬.중달이.

Xoxov 2006-06-2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다시보니깐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가 떠오른다...............음화화화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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