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waits > [펌.레디앙] 선(禪)-맑스주의자를 꿈꾼 20세기의 아이콘, 존 레논

선(禪)-맑스주의자를 꿈꾼 20세기의 아이콘
[세계의 사회주의자 ⑮] 존 레논

   
 
 

‘화씨 9/11’을 만든 영화사 라이온스게이트가 오는 9월 또 한 편의 문제작을 내놓을 예정이다. 영화제목은 ‘미국 대 존 레논'(The US vs. John Lennon).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다큐멘터리는 세계적인 뮤지션에서 반전운동의 아이콘으로 변신한 존 레논의 삶과 그의 입을 막으려는 미국 정부의 노력을 담았다. 영화가 얼마만큼 존 레논의 진실을 담을지 벌써부터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해 레논이 운동의 대열에 동참한 것은 ‘변신’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1971년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급진적인 발언을 했을 당시 신좌파 활동가들조차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북부 노동자 도시 리버풀 출신의 레논이 운동에 뛰어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레논은 1971년 <카운터펀치>에 실린 타리크 알리, 로빈 블랙번과의 인터뷰에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시각이 언제부터 형성됐는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처럼 자란 사람에게는 경찰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먼 곳에 데려다 놓고 목숨을 잃게 만드는 군대에 끌려가는 걸 경멸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건 노동계급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에게 ‘계급’은 뿌리깊은 원초적 자각이었고 계급구조가 있는 한 세상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신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레논은 종교에 심취해 있을 때에도 자신을 ‘기독교 공산주의자’로 규정했다.

존 레논은 1940년 10월9일 선원인 아버지 알프레드와 어머니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레논이 5살 무렵 아버지가 가정을 버린 후 그는 이모의 손에서 자랐다. 학창시절 미술에 재능을 보인 레논은 리버풀 미술대학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이내 싫증을 느끼고 자퇴했다. 레논은 이후 자신의 삽화를 담은 책 두 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중등학교 시절 ‘쿼리멘’이란 이름의 밴드를 조직한 레논은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등을 영입해 ‘조니 앤드 더 문독스’를 결성한다. 이후 밴드의 명칭은 ‘실버 비틀스’를 거쳐 ‘비틀스’로 확립된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비틀스의 멤버 4명은 모두 리버풀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 출신이다. 리버풀 주민들은 아직도 비틀스를 낳은 도시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비틀스의 팬이라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지난 3월 리버풀의 존레논 공항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존 레논의 ‘이매진’으로 강력한 항의의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영국 변두리 출신의 이 로큰롤 밴드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 레논은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조지 해리슨은 미국에서 아직 반전운동이 활성화되기 이전인 1966년에 연예부 기자들 앞에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비틀스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누차 베트남전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레논의 첫 정치적 발언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미국의 록그룹에 대해 경멸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중산층이고 부르주와”이고 “대부분이 우익으로 보이는 미국의 노동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어서 ‘계급’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논의 정치 참여가 단순히 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출신성분’에 기반했던 것임을 다시금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발언이 좌파들로부터 항상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68혁명의 와중에 인도에 명상 여행이나 떠나거나 '혁명'이라는 노래에서 자신을 혁명의 대오에 "포함시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알 수 없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노래 ‘혁명’에 대한 논란과 관련, 레논은 나중에 이 노래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고 해명했다. 원곡에는 ‘나를 포함시키라(count me in)’는 것이었고 두 번째 곡에는 ‘(파괴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나를 빼달라(count me out)’는 것이었다는 설명이었다.

레논은 1969년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새 연인인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와 함께 본격적으로 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당시 레논은 비틀즈 해산 이후 발표한 솔로 앨범 곳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시위대가 '우리 승리하리라' 같은 옛날 찬송가나 부르는 것을 보고 직접 '민중에게 권력을'이라는 운동가를 짓기까지 했다.

그는 이 노래에서 "지금 당장 혁명이 필요"하며 "노동자들이 제 몫을 되찾아야" 하고 "여성이 해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매진'에서는 "종교도 없고", "국가도 없으며", "소유도 없는" 세상을 말했다.

레논을 단순히 급진적인 노래를 불렀던 사람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 도중에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마르크스의 이상이 바로 자신의 이상이라고 말했으며, 소련과 중국에 대해 상당히 깊이 있는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또 "모든 혁명은 개인 숭배로 끝나고 말았다"며 이는 쿠바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보고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자신의 '어버이'가 되어 어떠한 '어버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자기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레논의 이러한 명철한 정치의식과 투쟁은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베트남전을 질질 끄는 닉슨 정부에 대한 투쟁에 열중하다가 좌절하면서 부침을 겪었다. "좌파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계급 젊은이들에게 다가가야만 한다"고 일갈했던 그는 한때 술에 찌든 백만장자로 소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앨범을 발표하면서 그는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엎치락뒤치락했던 정치 경력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면서도,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보수파가 되든지 사회주의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라며 자기는 자신의 사상을 "선(禪)-맑스주의"로 정리하겠다고 단언했다.

'선불교'와 '맑스주의'의 결합. 그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1980년 12월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가 캘리포니아 이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지원 방문을 계획할 무렵이었다. 25세 청년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저지른 암살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지났지만 레논은 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몽상가라 부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에요
언젠가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는 날
세계가 하나처럼 살게 되길 바래요

                                - '이매진' 중에서

     관련기사
· 인종ㆍ경제적 평등사회 지향한 민주적 사회주의자
2006년 07월 03일 (월) 10:27:42 윤재설 기자 yoonjs@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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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열 다섯 번째 인물. 크게 깊이(?)는 없지만 이 연재 재미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또 누가 나올지 궁금. 지난 겨울 공부방 애들이랑 캠프 갔을 때 통나무집 2층에서 램프 켜놓고 읽었던, 한대수가 쓴 '비틀즈 vs 밥딜런'이 떠오른다. 재미있었는데. 극장에서 빨랑 볼 수 있음 좋겠군. 사놓고 책장으로 직행한 '오노요코'와 그들의 dvd는 언제 보나... 그나저나, 노래 긁어 붙이는 재미도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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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 "후배들이여, 자기 것 찾는 수고를 해달라"
[스타뉴스 2006-07-04 17:13]    

[머니투데이 스타뉴스 김지연 기자] "무대에서 몇 번 쫓겨나기도 했다."

'한국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이 KBS1 '콘서트 7080'에서 마련한 헌정 무대 '신중현 스페셜-님은 먼 곳에'에 오르기 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은퇴를 앞둔 소감과 음악을 하며 겪었던 일들을 솔직히 털어놨다.

신중현은 4일 오후 여의도 KBS 별관 공개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는 원래 5060 사람인데 7080을 나오게 돼 영광"이라며 "이렇게 오랜만에 TV에 나와 어색하다. 하지만 옛날에 집같이 드나들던 곳이라 집을 다시 찾은 기분"이라고 마지막 TV출연을 앞둔 소감을 밝혔다.

또 신중현은 "6,70년대에는 TV에 많이 나갔다. 당시만 해도 프로그램 자체가 음악성을 추구해 나같은 사람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내가 활동금지를 당하는 등 여러 일을 겪으며 잊혀졌다"며 "물론 1980년대 한동안 TV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디스코 위주로 모든 것이 바뀐 후라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신중현은 "당시 디스코 주류에 적응하기 위해 디스코에 록드럼을 접목시킨 시도를 했으나 기형적인 음악이 탄생했다. 그러면서 TV 나올 기회도 없어졌다. 나이트클럽 같은 곳에서 공연제의가 와 몇 번 무대에 섰지만 춤을 추기에 맞지 않다며 몇 번 무대에서 쫓겨나기도 했다"며 "음악을 하는 사람이 음악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 나이가 드니 음악 무대는 아니여도 인터뷰 코너 등을 통해 한국의 대중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원망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체계적인 것을 갖추는데 역점을 두고 기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와함께 신중현은 록음악을 하는 후배가수들을 향해 "젊은 친구들에게는 외국 것이 좋아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 것들을 찾는 수고를 해달라"며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음악에 대한 확신이 확실하다면 음악을 계속하고 좋은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신중현은 "TV는 아니어도 인터넷 방송을 할 계획이 있다"며 "인터넷은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음악을)올려 놓으면 누구든 검색해서 들을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한편 이날 '콘서트 7080' 무대에는 은퇴를 하는 신중현을 위해 한영애가 그의 히트곡 '님은 먼 곳에'를 아카펠라 그룹 더 솔리스트와 부른다. 신중현은 김종서와 함께 무대에 올라 '미인' '빗속의 여인' '봄비' 등을 열창할 예정이다. <사진 =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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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 "나는 아직도 ''록''이 고프다"
[세계일보 2005-05-26 17:24]
기타리스트 신중현(65)은 록 음악의 대부요, 살아 있는 한국 밴드 음악의 선구자다. ‘미인’ ‘아름다운 강산’ 등 그를 대표하는 노래들은 아직도 우리의 귓전에서 생생하게 울린다.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 로데오거리에 있는 지하 1층의 30평 남짓한 ‘우드스탁’에서 그를 만났다. 이곳은 그가 직접 운영하는 음악작업실이다. 입구 한쪽에는 드럼 세트를 비롯해 미국산 깁슨, 팬다 등 여러 대의 전자기타와 어쿠스틱 기타가 진열돼 있었다. 키보드와 앰프 등도 눈에 띄었다. 작업실 안에는 전선 과열로 고무 타는 이상야릇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른 한쪽에는 대형 벽걸이 TV와 컴퓨터, 무비카메라 등이 어수선하게 설치돼 있었다.아직도 음악을 하느냐는 물음에 “힘 있을 때까지 연주하다 죽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서 음악에 대한 진정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육십 넘게 오로지 록 음악에만 빠져 살아온 신중현의 음악세계를 들어봤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본 지 꽤 오래됐는데, 요즘 뭘 하고 지내나.

“나만의 음악과 영상을 담은 DVD를 만들고 있다. 한 1년 걸릴 거라 생각하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늦어져 3년 정도 매달렸다. 다음달 중순쯤 완성될 것 같다.”

―어떤 음악을 영상과 함께 담는가.

“흔히 DVD라고 하면 영화 쪽으로만 취급한다. 물론 DVD에 음악이 들어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작업은 종전과 전혀 다른 사운드의 음악을 집어넣는 것이다. 뮤직비디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서라운드 사운드 효과를 낸다고 보면 된다. 1960, 70년대 나왔던 사이키 델릭(psyche-delic) 사운드, 즉 나만의 멜로디와 공연했던 모습 등을 보여 줄 예정이다. 영상을 포함한 멀티미디어, 신시사이저 등은 사이키 델릭의 영향을 받은 음악 시스템이다.”

―우리 음악 시장의 사정이 어떤지 알고 있는가.

“한마디로 CD가 팔리지 않는 침체 상태다. 인터넷 음악과 MP3 발달에 영향을 주고 있으나, 음반 발매를 위한 획기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예전에는 모노와 스테레오 채널로만 음악을 들었다면 이제는 서라운드 등 새로운 음악 형태가 탄생해야 한다. 국내 최초로 5.1 서라운드 사운드 6채널(저음만 낼 수 있는 스피커 포함)로 환상적인 음향이 담긴 DVD를 선보이겠다.”

―자신의 음악은 어떤 색깔인가.

“내 장르는 한국적인 록이다. 록 음악은 다른 장르와 달리 선율이 분명하다. 살아 움직이는 음악을 말하는데, 대부분의 음악인들이 이를 모르고 있다. 지미 헨드릭스와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세계적인 록그룹은 사이키 델릭 음악을 최초로 시도한 밴드다. 화성악(화음) 같은 음악에서 탈피한 선율적 음악을 구사했다. 록 음악을 바탕으로 한국의 민족성이 배어 있는 토속적인 가락을 찾아내는 것이다.”

―평소 술 담배는.

“담배를 안 피운 지 5년 됐다. 담배는 끊는 게 아니고 안 피우는 거다. 의지를 갖고 피우지 않으면 된다. 그 전에는 밥보다 담배가 좋아 하루에 2갑 이상 피웠다. 오래 살려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방법밖에 없었다. 술은 지금도 한번 입에 대면 끝을 보는데 주량은 3병 정도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아마 70년대 중반쯤 박정희 정권의 문화 탄압 때였지 않나 싶다. 당시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몇 번 요청이 왔는데 거절했다. 아마 자기 정권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가수 활동을 5년간 금지당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살길이 막막했다. 그리고 바로 대마초 사건으로 붙잡혀 가 4개월 동안 서대문구치소에서 복역하고 집행유예로 나왔다. 그때 내 자식과 같은 기타와 영국에서 처음으로 가져온 마셜앰프(RMS500-30)를 팔아 생계를 꾸렸다.”

―아들 3형제가 대를 이어 음악을 하고 있는데, 반대하지는 않았나.

“나는 음악을 하라고 했고, 아내는 심하게 말렸다. 아이들이 음악 하는 데 크게 도와준 건 없고, 다만 기타 연주법 등을 옆에서 가르쳤다. 지금은 아내와 같이 세살배기 큰손자 동주를 키우는 재미로 살고 있다. 인터넷에 띄워놓은 ‘동주의 드럼 솔로’ 사진이 요즘 인기를 끌어 흐뭇하다.

―음악을 시작했을 때가 언젠가.

“중학교 2학년 때 노래책으로 통기타를 배웠다. 처음에는 ‘스프링 버라이어티’라는 밴드를 만들어 미군클럽에서 음악 활동을 했다. 64년 4인조 밴드 ‘ADD4’와 함께 ‘빗속의 연인’이란 노래로 정식 데뷔했고, 10년 후 펄시스터즈 ‘님아’,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을 히트시켰다. 70년대는 ‘신중현과 엽전들’, 80년대 초에는 ‘신중현과 뮤직파워’라는 9인조 밴드와 함께 ‘아름다운 강산’으로 호응을 얻었다.”

―앞으로 계획은.

“앞서 말한 DVD와는 별도로 7월 중순쯤 솔로앨범을 낼 예정이다. 지금은 음악이 상업적으로 변질돼 진정한 음악을 찾기 힘들다. 배고픔을 모르고 하는 음악들이라 깊이가 없는 것 같다. 기회가 닿는다면 형식적이거나 쇼 적인 게 아닌 육체에서,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리얼뮤직을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다.”

신중현은 도를 크게 깨친 사람처럼 말했다. “이제야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됐고 기타 연주도 깨달았다.” “손가락만 빨리 놀린다고 해서 기타를 잘 치는 게 아니다. 마음에 연결되지 않은 기타 소리는 잡음이고 기교일 뿐이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경험이 녹아 있고 여운이 있다.

글 추영준, 사진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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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6-07-04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박정희 개새끼가 문제다.
 
 전출처 : 로쟈 > 만국의 룸펜들이여, 단결하라!

'서강대학원신문'(97호, 06. 05. 30)에 로버트 버턴의 <우울증의 해부>(태학사, 2004)를 '해부'하고 있는 글이 게재되었기에 (다소 길지만) 옮겨온다. 필자는 '학내기획팀'으로 돼 있다(편집장의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 <우울증의 해부>는 언젠가 '문학적 태도로서의 우울증'에 관한 자료들을 찾다가 알게 된 책인데, 방대한 분량 때문에 선뜻 건드리지 못했던 책이다(책은 2001년판의 경우 1382쪽이다. 국역본은 당연히 부분역이다). 한데, 재작년 '부재중'에 출간되어 잠시 나를 놀라게 했던 책이다. 이후에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 '대학원생들의 우울'을 다루고 있는 기획기사는 '우울증'에 대한 욕구를 다시 부추긴다. 인용문에서의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내 글은 마치 거대한 강이 흐르듯이 때로는 급격하고 빠르게 때로는 느리고 여유 있게, 어느 곳에서는 똑바로 어느 곳에서는 구불구불, 때로는 깊게 때로는 여울지어, 때로는 흙탕물로 때로는 수정같이 맑은 물로, 때로는 넓게 때로는 좁게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때그때 다루게 될 주제에 따라서 그리고 내 기분에 따라서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정교하게, 때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쓸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당신이 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지극히 평범한 한 나그네가 될 것이다.

 

나그네가 된 이상 당신은 화창한 날도 만날 것이고 궂은 날도 만날 것이다. 때로는 확 트인 광활한 들판을, 때로는 꽉 막힌 좁은 산길을 걷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는 비옥한 옥토를, 어느 곳에서는 척박한 황무지도 만날 것이다. 이 가운데는 그대들이 좋아할 곳도 있겠고 싫어할 곳도 있겠지만 나는 그대들을 이끌고 울창한 숲을 통과하기도 할 것이며, 덤불  숲도, 언덕도, 계곡도, 평야도 지날 것이다. 험준한 산도, 위험이 도사린 골짜기도, 이슬에 젖은 풀밭과 경작지도 지나갈 것이다."(로버트 버턴, <우울증의 해부>, 37-38쪽)

 



1.

-로버트 버턴(1577-1640)의 책에 대해, 위 인용만큼 정확한 설명도 없을 것이다. 이 불세출의 인물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 그보다 13년 늦게 태어나 24년이나 오래 살았다. 평생을 대학에서 보냈으며(교수가 아닌 학비와 기타 비용을 면제받은 ‘스칼라’라는 장학생으로), 그가 쓴 책은 <우울증(멜랑콜리)의 해부>라는 책 한 권이다. 그는 어디론가 여행을 한 적도 없으며, 결혼도 안 했으며, 어떤 세속적 성공을 얻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버턴 같은 삶을 원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른다. 평생 책만 읽다 죽고 싶다고. 그러나 적어도 버턴이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할 것이다. 특히 세속적 성공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학에 남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다. 더구나 인문학이라면, 사회정책적인 배려도 최하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마저도 아직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 개개인에까지는 해택이 미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박사 수료(졸업) 정도는 되어야 공금(공동 프로젝트)을 나누어먹기라도 할 수 있다.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지만. 정말이지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들은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정말 파업을 하든지 데모를 하든지 해야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들(구체적으로는 대학원생들)이다. 왜냐면 그들은 심각하게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시간강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무얼 하러 대학원을 갔냐? 개인의 의지에 사회적 문제로 떠맡기는 이런 물음은 기만적이다. IMF 이후 대학원생이 배로 늘었다. 이 배경에는 당시 어려운 취업환경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을 눈가림하기 위해 배로 대학원 정원을 늘리도록 한 교육 정책도 있다. 역으로 말해 대학원생 수는 개인의 의지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결정하는 문제인 것이다. 즉 당시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대학원생을 늘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많은 룸펜 대학원생들이 등장했다. 오늘날 이들은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을 읽고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태평천하였다.” 어느 시대든지 룸펜들은 비굴하다. (왜냐면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상처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채만식 시대의 룸펜들은 고상했으며, 엄살적인 성격이 강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은 노숙자도, 정신병자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성인들(실업자들, 참고로 대학원생들은 스스로를 실업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이다(*물론 이건 푸념이다. 억울하고 분한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이들 룸펜들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도,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상당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푸코의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정신병자나 죄수를 배제함으로서 사회통합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룸펜들을 생산함으로 사회를 유지시키고 있다. ‘룸펜-되지 않기’는 사회적 강령이 된다. 요행이 룸펜에서 벗어난 이들도 다시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사회를 혼신을 다해 붙잡는다.

 

 

-오늘날 한국 소설에 실망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이 먹은 늙은이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룸펜들과 동세대인 소설가들조차 룸펜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 같은 영화는 예외이겠다). 그들은 역사나 지적추리라는 로망스에 기대거나, 섬세한 감각이라는 감상적 논리로 몸을 맡기거나, 엽기적이거나 기괴한(그러므로 자칫 문학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멋대로 해석되는) 퍼포먼스를 연기한다. 인간은 과거의 고통은 쉽게 인정하지만, 현재의 고통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다. 따라서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 고통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문학동네, 2004, 겨울)이라는 강연문에서 근대소설은 죽었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문학은 더 이상 시대적 고통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이 감각을 잃고 나면 로망스만 남는다. 역사적 소재에 집착하고, 추리적 기교를 사용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감상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엽기적인 줄거리로 놀라게 하는 이야기들만 남게 된다. 그럼, ‘고통에 대한 감각’에 강도를 부여하는 게 임무인 비평가는 어떻게 되는가? ‘고통에 대한 감각’을 들어있는 작품이 부재한다면, 비평가가 소멸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좀체 비평가들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조용히 변신했기 때문이다. 고진이 말하는 ‘내면이 없는’ 비평가란 바로 그들이다. 

 

-우리시대 소설가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은 ‘혁명’이 아니라 ‘전쟁’이다. 오늘날 ‘혁명’은 사회에 의해 점진적으로 수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룸펜을 더욱 생산할 뿐이다.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상상력이 도달하게 되는 것은 전쟁뿐이다(*동의하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생각이다. '전쟁'의 차폐막으로서의 혁명? 과거 레닌은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지만). 파괴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세워질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룸펜이라는 이 기괴한 실업자들은 일시에 일자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이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에 눈을 감는 좌파는 사실상 좌파가 아니다. 솔직히 오늘날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유일한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나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상력에 달려있다. 속칭 좌파들의 반전운동은 그들의 상상력의 빈곤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2.

-버턴은 우울증자의 대표적인 부류로 그 자신 역시 포함되는 공부하는 자들을 들었다. 이들이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만 든다면, 첫째 혼자서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둘째는 가난 때문이다(*버턴은 우리의 동시대인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부연하자면, 오늘날과는 달리 19세기까지만 해도 대학은 출세의 통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대학이 출세를 위한 기관이 된 것은 만인을 위한 ‘공공교육’이라는 이념이 성립된 20세기 이후다. 따라서 버턴 시대에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가난을 각오한다는 걸 의미했다. 결혼 같은 것은 애초부터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학자의 노동보다 더 힘든 노동은 없다. 남이 못해낸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 위하여 불철주야 머리를 짜내고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책과 씨름하다 보면 건강, 재산, 멀쩡한 정신, 그리고 귀중한 목숨 등,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기도 한다. (...) 그동안 자그마치 20년간 대학에서 썩었지마는, 이제 그 바라던 직장을 얻기란 대학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나 조금도 다름없이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지금부터 과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한단 말인가?

 

가장 가능성이 높고 동시에 얻기 쉬운 자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 자리이거나, 대학의 강사 자리일 텐데, 그 일을 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해야 매 사냥꾼의 수입만도 못한 연봉 10파운드, 거기에 하루 세 끼 식사와 약간의 시간외 수당,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의 부모를 기쁘게 하였을 경우 혹시라도 떨어질지도 모르는 몇 푼의 부수입뿐이다."(138-139쪽)

 



 

 

 

 

   

-우리는 여기서 버턴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었음은 물론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와도 동시대인이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다 아는 것처럼 말로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파우스트적 원형’을 창조한 인물이다. 사실 그 이전까지의 마술사나 트릭스터적 이미지가 강한 ‘민중본 파우스트’는 말로의 붓을 거치면서 학자적 인물로 바뀐다.

 

-이에 대해 이언 와트는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말로의 파우스트 탄생은 당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특히 과도한 대학생 수의 증가(1560-1590년 사이 약 30년 동안 입학생 수가 3배로 늘었다고 한다)와 이들을 위한 일자리 부족을 들고 있다. 당연 이들은 사회적 불순분자들이 되었고, 홉스는 이런 상황을 “반역의 핵심은 대학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말로의 파우스트는 사회에 대한 불만에서 탄생한 개인주의적 인물이다. 그의 계약과 환상, 그리고 영혼 파멸도 이와 떼어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일찍이 T.S 엘리어트는 괴테가 햄릿을 ‘청년화’했다고 비난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은 비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면 설사 어떤 판본에 햄릿이 40대로 설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이와 상관없이 그는 여전히 청년이기 때문이다. 청년(또는 청춘)이라는 개념은 나이에 의해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대한 괴리감(불만감)의 유무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들 능력이 자기들에게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불만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들에게 이런 자신감을 부여한 것은 대학교육이다. 그러나 영혼을 담보로 악마와 계약하여 사회를 바꾸겠다는 것은 사실상 절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많은 우울증 환자들과 말로의 파우스트, 그리고 버턴의 저작은 결코 따로따로 논의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버턴의 저작을 셰익스피어와 말로가 활약한 영국의 르네상스 시기에 대한 연구서로 읽을 수 있으며, 그것은 새로운 국가의 창조라는 유토피아론으로 정리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숫자로 치자면 영(zero)이나 다름없지요.”(84쪽)라는 인식이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고백을 플로베르의 <감정교육>과 슈니츨러의 <여명의 도박>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공통점은 그것이 어떤 절망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턴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것을 절망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익살로 비틀어버린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데모크리토스가 살았던 시대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보다 웃기는 일이 더 많다.”(51쪽)

 

-버턴의 작품은 나에게 라블레 소설을 연상시킨다(*최근에 라블레의 <팡타그뤼엘>이 연속해서 번역/출간되고 있다). 통찰력 있는 주장과 허무맹랑한 논지전개 사이에서 끝없이 조롱하고 치켜세우면서 끝없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의 입담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독자는 나그네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를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고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치료하긴 했던 것일까? 만약 치료했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사실 그는 말로처럼 극단적으로 절망하여 악마와의 계약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학자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울증을 인간의 본질로 확장시켰다.

 

-“모든 인간은 우울증환자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병자라는 것이다. 유럽 르네상스에 대해 생각할 때 이것을 놓치면 반쪽자리 이해에 그치고 만다. 엄밀히 르네상스란 인간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발견과 찬미가 아니라, 인간의 병적 기질에 대한 발견을 의미한다. 버턴에 오게 되면 ‘사랑’도 ‘신앙’도 병일 수밖에 없다. (유럽의 마냥사냥이 맹위를 떨친 게 바로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점을 잊지 말자. 또 사실 마녀기질이란 우울증과 관계가 있다: 112-113쪽 참조)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버턴이 바로 이와 같은 병 속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는 병이 없다면 ‘면역체계’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즉 만약에 인간에게 병이 없었다면 건강이라는 것 자체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를 신앙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통과 고난을 당한 자만이 신을 알게 되며, 만약 그가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그는 악행을 반복하다가 영원한 파멸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를 좀더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오로지 우울증을 겪은 사람만이 유토피아를 꿈꾸게 된다는 말이다.

 

 

 

 

 

 

 

 

-1964년 장 로베르 시몬은 “버턴의 유토피아가 유토피아문학사 연구가들에 의해 왜 무시되었던 것일까?” 하는 물음을 던졌다. 피에르 메스나르는 이 책임을 방대한 저서 속 일부분에 해당되는 부분을 무시한 독자에게서 찾고 있으며, J 막스 패트릭은 유토피아상을 상상력이 넘치는 소설적 취향 속에 집어넣은 저자 자신의 실책에서 찾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의 논의를 비추어 본다면, 누구의 말이 더 타당한지는 쉽게 짐작가능하다. 실제 버턴의 유토피아론을 읽다보면 놀라운 점은 그의 유토피아론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유토피아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공상성을 비판하며, 실현가능한 국가를 그리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게 큰 기대를 갖지 않는다. “인간은 본시 생각이 모자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소.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오.”(47쪽) 그리고 법과 정치의 중요성과 그 기능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다. “다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것이 정치다.”(82쪽) 또 필요악으로서의 전쟁도 긍정한다. “이 세상에 전쟁하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다. (...) 저 세상에서나 살 사람이다.”(57쪽) 다분히 과장되고 혼란스러운 버턴의 저작 속에서 적어도 유토피아론 만큼은 냉정하게 서술되어 있는 셈이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 중 하나가 공직이 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 다음은 군인인데, 왜냐면 군인의 임무가 한 시대에 국한된다면, 학자의 임무는 영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철인 통치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견해 자체는 버턴 자신의 시대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버턴은 학자들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을 ‘슬픈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학문 탐구는 속세의 이익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돈이 있는 자들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한탄한다.


"대학에서 문학이나 수학, 또는 철학 같은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손해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도 받지 못하고 후원자도 얻기 힘들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일찌감치 알아차린 약삭빠른 학생들 가운데는 예술이나 역사, 철학이나 언어학과 같은 순수학문들을 그저 식탁에서 식사하는 자리에 알맞은 유쾌한 장난감이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미는 장식품 정도로 옆으로 밀어놓고, 그 대신 법률, 의학, 그리고 신학과 같은 현실적이고도 수지맞는 학문을 공부하여 먼저 충분히 돈을 벌고 나중에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 돈을 계산할 줄 안다면 족하지 따로 수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자기가 소유한 토지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이미 지리 공부는 다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알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바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뛰어난 신학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망원경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위대한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성과에서 나오는 광휘를 자기에게 비출 줄 아는 사람이다. 좋은 일자리를 마련할 도구를 혼자서도 마련할 줄 하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기술자다."(143쪽)

 

 

 

 

-버턴이 말하는 ‘우울증(멜랑콜리)’는 오늘날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우울증’과는 차이가 있다. 그가 말하는 ‘우울증’은 매우 넓은 의미로(때로는 인간본성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문맥에 따라 여러 레벨로 사용된다. 따라서 그 세부적 문맥과 더불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자의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에서 버턴은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첫째 ‘혼자-있기’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는 말과, 둘째 우울증이 ‘늙음(구체적으로는 중풍)’과 관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일찍이 루소는 물 속에 빠진 아이를 본능적으로 구하려는 마음(측은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괴물’이라고 말했다. 흔히 프랑켄슈타인으로 대표되는 ‘괴물’의 계보(오늘날 우리소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를 말할 때 이것을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모두 어불성설이다. 또 많이 지적되는 것이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처녀작이 <노년>이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어떤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공부하는 이들, 그들은 사실상 애늙은이이자 괴물들로 어떤 절망적 상태를 의미한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오늘날의 소설들이 다루어야 괴물들은 말 그대로 기괴하고 섬뜩한 장난감 같은 괴물들이 아니라(내면 없는 비평가들은 이것들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지만), 바로 오늘날의 룸펜들이다.

 

-유토피아는 우울증(멜랑콜리)의 증상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유행어가 된 수많은 ‘멜랑콜리’ 중 유토피아가 부재하는 멜랑콜리는 모두 가짜이다. 멜랑콜리는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라는 면역체계를 만들어낸다. 만약 오늘날이 멜랑콜리의 시대라면 오늘날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혁명이 아니라 전쟁이다(*모두가 룸펜이 아닌 이상 '름펨의 시대'라거나 '멜랑콜리의 시대'란 말에는 다소간에 과장이 포함돼 있다.하지만, 이 글이 대학원신문에 게재되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멜랑콜리가 요구하는 상상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룸펜들에게서만 가능하다(*룸펜의 사회학적 인종은 '니그로'이다). 다시 말해, 이미 죽어버린 문학은 로망스 작가나 내면 없는 비평가가 아니라, 오직 전쟁을 꿈꾸는 룸펜들에 의해서만 되살아날 수 있다. 모든 것은 0(zero)에서 나온다. 만국의 룸펜들이여! 상상을 멈추지 말라.

 

06. 06. 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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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zooil?Redirect=Log&logNo=50000704733

 

 

 

 

우울의 해부란 책다리아님 블로그에서 발견했는데,

이 책의 겉표지가 다음과 같다.

 

 


 
우울의 해부
Robert Burton's the anatomy of melancholy

 

 

 

아래는 조엘 온 소프트웨어 영문표지 

 


 

 

 

약간 다르지만 거의 똑같다.

한글판에는 커버 설명이 없던데

영문판에는 있나? 출판사 사이트에 있네

"Joel On Software" what’s with the cover?

 

Joel’s cover is modified from the famous frontispiece first used in the 1632 (fourth) edition of Robert Burton’s The Anatomy of Melancholy. This frontispiece is well known among book lovers (like me) as it is one of the most famous frontispieces in the history of publishing, some would say the most famous.

 

 

[참고사이트]

the anatomy of melancholy : http://www.wsu.edu:8080/~rlblair/burt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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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아케이드 프로젝트> 완간

 

 

 

 

오늘 아침 한국일보는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역한 조형준씨와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안 그래도 지난주 한 모임에서 국역본의 나머지 절반이 나올 때가 됐는데 좀 늦춰지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기대보다는 늦게, 하지만 예상보다는 빠르게 책이 완간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반갑다. 사실 한두 주 전에 나는 영역본을 주문해놓은 터여서 이 달안으로 책을 받게 될지 모른다. 해서 이젠 그간에 미루어둔 국역본의 구입도 더이상 미룰 수 없을 듯하다(책을 사는 건 어렵지 않다. 책을 꽂아둘 장소가 문제이다!).

참고로,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 그리고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아트북스, 2005)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함께 읽어볼 만한 대표적인 참고문헌이다(초현실주의를 다루고 있는 포스터의 책에서 두 개의 장이 벤야민에 할애돼 있다. 벤야민에게서 초현실주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야야 할 대목들이다.)

한국일보(06. 07. 04)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완역 조형준씨

-나치를 피해 망명을 시도하다 자살한 비극의 유대인 지식인 발터 벤야민(1892~1940). 구미 지성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는 그의 필생의 역작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완역됐다. 새물결출판사 조형준(42) 주간이 지난해 1권에 이어 최근 2권을 번역, 3일 출판했다. 2,500여 페이지나 되는 이 책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서사시’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마르크스가 외부에서 X레이로 자본주의를 촬영했다면, 이 책은 내시경을 밀어넣어 자본주의 몸통 내부를 촬영한 것입니다.”

-1920년대 유럽은 제국주의, 나치즘, 전쟁 등 자본주의의 폭력적 모습을 목격한다.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프루트학파, 루카치 등이 자본주의의 성격 분석을 시도하지만, 벤야민은 이들과 다른 방식을 취했다. 워즈워드의 시 ‘무지개’의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구절처럼, 광기와 광포함이 극에 달한 ‘어른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자본의 유년기’로 눈길을 던진 것이다(*나는 다른 페이퍼에서 유년기적 마르크스주의'란 표현을 쓴 바 있다). 이때 벤야민이 택한 지역은 19세기의 파리.

-프랑스혁명과 파리코뮌으로 대변되는 혁명의 도시가 바로 파리였다. 벤야민은 도서관에서 13년 동안 아케이드(arcade), 패션, 권태, 박람회, 광고, 매춘, 도박, 회화, 신문, 조명, 철도, 사진, 증권, 광고 등 자본주의 탄생기의 파리 모습을 찾아낸다. 책의 절반이 이런 내용이니, 자본주의의 육아일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사회에 꿈과 환상을 심어주었다가 한 순간 그것을 쓰레기 혹은 물거품으로 만들고 다시 꿈과 환상을 부추기다가 또 다시 쓰레기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케이드만 해도 초기에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석조 건물만 보아온 파리 시민에게, 철과 유리로 만든 아케이드는 산업이 만든 새로운 발명품이자 가스등을 처음 선보인 새 도시, 새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케이드는 불과 20, 30년 만에 갑자기 폐허가 되고 만다.



-조 주간은 “벤야민이 파악한 자본주의의 동력을 지금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화소 카메라 기능을 갖춘 첨단 휴대폰이 나오면서, 아직 충분히 쓸 수 있는 제품이 쓰레기로 변하는 것 등이 그 보기다. 그는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멸망을 점친 마르크스와 달리, 이 책은 자본주의의 내밀한 부분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들여다 본 책이라고 평가한다.

-원서는 1980년 독일에서 나왔는데 절반은 독일어, 절반은 프랑스어로 돼 있었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독일어 프랑스어에도 능한 조 주간은 “분량은 방대했지만 번역이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만 주(註)가 하나도 없어 애를 먹었다..

-예를 들어 “블랑키가 정부 대표로 노동자 대표단을 이끌고 런던 만국박람회에 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조 주간은 이를 폭력혁명을 주창한 공산주의자 블랑키(1805~1881, 사진)가, 자본주의의 잔치인 만국박람회에, 그것도 (프랑스) 정부 대표로 갔다는 것으로 해석하고는 매우 난감했다. 하지만 박람회에 간 사람은 그의 형인 제롬 블랑키(1798~1854)였다. 경제학자로 정부 관료를 지낸 형은 동생과 성향이 크게 달랐는데, 원서에는 동생인지 형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지만 딱딱하거나 어렵지는 않다. 조 주간은“책이 두껍다고 독자들이 너무 겁 먹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두꺼운 책을 좋아하는 나로선 겁먹을 일이 아니다. 내게 일차적으로 겁나는 책값이고, 그보다 더 두려운 건 들고다닐 무게이다. 혹 영역본까지 같이 들고다녀야 한다면!).

06. 07. 04. 

P.S. 작년에 나온 1권은 한겨레가 꼽은 '2005 올해의 책 50'에 선정되기도 했다(2권까지였다면 단연 '올해의 책'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들어본다.

한겨레(05. 12. 16) 현대 미학비평과 문화연구 같은 분야에서 최근 새롭게 조명받는 발터 베냐민(1892~1940)은 일찍이 자본이 만든 인공낙원인 “19세기의 수도” 파리에서 자본과 상품의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는 아케이드의 상징에 주목했다. 1927년부터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는 아케이드와 관련한 옛문헌, 인용문, 가십, 인물촌평, 여행 안내서, 박람회 카탈로그 따위를 모으고, 생시몽·보들레르·마르크스의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방대한 자료에 자신의 생각들을 덧붙인 것이, 이름하여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펴냄)다(*'벤야민' 대신에 '베냐민'이란 표기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 한겨레의 '프라이드'이다. 아마도 '베냐민 지파'의 후손들인 모양이다).

-‘이 책은 나의 모든 투쟁, 나의 모든 사상의 무대’라고 그 스스로 말했다는 이 미완성 자료집은 그동안 여러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국내 독자들한테는 부분 인용되거나 이름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말 완역 출간의 의미는 크다. 이 책에선 베냐민이 근대 자본주의의 ‘모더니티’를 19세기에 이미 찾아나선 발견자의 상상력을 엿보여준다.

-아케이드, 유행품점, 패션, 권태, 오스만식 도시, 철골 건축, 박람회, 광고, 꿈, 매춘·도박, 파노라마, 조명 같은 이름말들은 호기심 많고도 우울한 ‘비판적 관찰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하부구조를 분석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다르게 “자본주의에 대한, 자본주의 안에서 하는 전혀 다른 발본적 사유”로서 근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좋은 텍스트로 꼽히고 있다. 그가 “초현실주의의 어머니”로 부른 아케이드는 왜 베냐민을 그토록 흥분시키고 매혹시켰을까?(*누구더러 답하라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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