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빨간 구두 (Don't Move)

빗소리 요란한 토요일 밤, 이런 영화를 보게되다니, 행운이었다. 페넬로페 크루즈의 변신이 놀랍다. 세르지오 카스텔리토라는 감독이자 배우를 만난 것도 뜻밖의 반가움이었다. 실제 아내의 소설에서 강한 인상을 받아 중년남성의 외로움과 고뇌를 솔직히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각본을 구상하고 감독하고 연기까지 한 세르지오는 우울한 중년남자의 눈빛을 가슴 저리게 보여주었다. 두 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이야기는 초반부터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여 나른한 불쾌감으로 이어진다. 하나뿐인 딸의 오토바이 사고, 세미나를 간 곳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값싸 보이는 여인(이탈리아, 페넬로페 크루즈 분)과 술 기운을 빌어 하게 되는 갑작스런 겁탈. (어쩌면 늘 마음 한구석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이 와중에 감독은 십자가의 구도를 여러 곳에 배치하며 티모테오(세르지오 카스텔리토 분)가 부인하는 신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너무 완벽해보이는 생활이 버거운 남자, 인정 받는 외과의사에 아름답고 지적인 아내까지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이 겁탈한 여인이 내미는 스파게티를 먹으면서도 유년의 아픔을 떠올린다. 외로움이 잔뜩 배어있는 이 남자의 어깨가 한없이 쳐져있다.




아내 엘자(클라우디아 게리니 분)와 티모테오는 엘자의 말처럼 서로 말 하지 않는 게 많은 사이다. 돌아가야할 일상의 안락함과 소소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것들. 절대 서로 소리 지르며 할퀴지 않는 이들 부부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런 것도 사랑이라는 걸 아는 데 15년이 걸린 셈이다. 성녀 같은 우아함을 지니고 있는 아내에게서 어떠한 위안도 얻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티모테오는 홀린 듯 이탈리아를 반복적으로 찾아간다. 그의 거친 행동과 말로 서서히 창녀가 되어버린 그녀, 하지만 그녀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할 사랑을 느끼는 남자. 두사람의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휘몰아치다 수렁으로 빠져든다.



<빨간구두>는 죄책감과 용서와 구원의 이야기다. 이탈리아는 중요한 순간에 일이 깨져버리는, 되는 것이라곤 없는 불쌍한 영혼이다. 열두 살 적 양아버지로부터 당한 강간도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어보고 싶은 욕망에서 자초되었던 것이라고 느끼는 그녀가 이런 일을 테모테오에게 처음으로 고백하는 건, 자신을 짓누르는 욕망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작은 용기로 보인다. 다시 그녀는 남자가 사준 빨간 구두에 사랑의 눈빛으로 젖어들며 '신이 용서하지 않을' 사랑에 더 깊이 빠져든다. 이들의 정사장면은 욕지기가 나올 것 같으면서도 슬프고 애처롭다.



서로의 상처를 보고 외로움을 느끼며 자신에 대한 연민처럼 상대를 동정하는 두 사람. 사랑은 어딘가 부족함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인가보다. 빈 곳을 채워주고 싶은, 아니면 자신의 빈 곳과 같은 허망함을 상대에게서 발견할 때 사랑의 감정은 예고없이 찾아오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는 슬프게 내달린다. 잘못된 임신중절 시술로 죽음에 이르는 그녀의 곁에는 티모테오가 있고 그는 15년간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온다. 마치 어릴 적 강간을 당한 이탈리아가 자신의 딸이기라도 하듯 자신의 소중한 딸이 그렇게 싫어하는 유도를 시키며 스스로 몸을 보호하기를 바란다.  



티모테오는 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수술대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15년을 품고 있는 죄책감에 더욱 괴로워한다. 하지만 사고는 신이 내리는 형벌이 아니지 않은가. 영화는 이 말을 해주려한다. 병원 건물의 창밖으로 보이는 이탈리아의 환영은 십자통로에 의자를 놓고 앉아 빨간구두를 신은 발을 옆으로 살짝 뺀다.  죽어가며 남겨놓은 단 한 짝의 빨간구두, 티모테오가 이것과의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다.



이탈리아가 하얀 병상에서 허망한 눈을 뜨고 죽음의 나라로 간 직후 딸 안젤라가 태어났다. 안젤라를 안고 있는 아내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하지만 그 뒤에서 눈물을 떨굴 것처럼 서 있는 티모테오의 눈동자는 가슴을 저리게 한다. 지금 수술대 위에 누워 생사의 갈림길을 오락가락하는 딸의 생명을 구해주는 천사의 손길은 바로 이탈리아의 심령이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떠나보낸 그녀의 얼굴이 15년이 지난 지금 웃음을 머금고 유리창에 어른거린다. 그러는 동안 안젤라의 생명줄은 약하지만 기적처럼 다시 이어지고 이들의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연민은 이렇게 자신을 용서하며 구원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우리는 비루하고 천하고 역겨운 어떤 것에서 위로를 삼을 때가 있다. 삶이, 사람의 본성이 그리 고결하고 상식적이기만 할까. 원래 야비하고 기이한 것을 즐기며 잡스러운 생각으로 차 있지 않은가. 우리의 눈과 입과 손과 발은 수없이 죄를 짓고 살지만, 영화의 첫장면에서 카메라가 내려다보는 시선과 마찬가지로, 조감도처럼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신이 우리를 벌할 거라는 강박이 죄책감을 불러오고 그것은 인생의 아름다운 많은 것들을 제대로 구가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나쁘지 않았던 추억도, 소중한 현재의 관계들도 엉망으로 만들고, 점점 자신 안에 갇히는 어리석은 죄를 짓게될지도 모른다.

용서란 어쩌면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내려야할 과제 같다. 이제 자신 안에 갇혀있는 생채기 투성이의 흙 묻은 빨간구두를 내어놓고 잘 가라 이별을 고할 때이다. 관에 들어가기 전 이탈리아에게 입맞춤하며 "잘가, 안녕 내 사랑." 이렇게 말한 티모테오는 이제야 진정한 이별을 하고 거듭 나는 것 같다. 그가 돌아서 걸어가는 발걸음에 비로소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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