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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평점 :
반듯하게 깎인 연필이 필통에 가지런히 있으면 뿌듯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가방을 메고 짧지 않은 거리를 가다 보면 필통의 연필은 흐트러지고 까만 연필심은 고단함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필통 뚜껑만 열면 늘 잠자던 나무 향이 배시시 깨어났다. 그 향은 들뜬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었다. 나무 안에 감춰진 까만 속심. 최근, 레트로 열풍으로 인해 형형색색이다. 한번 검정 연필이면 평생 검은색으로만 써진다. 사람으로 치면 고지식하지만 올곧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 뜨면 가족들을 위해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 같다. 부러진 연필을 깎고 또 깎아서 짧아진 몽당연필을 볼펜 껍데기에 끼워 공책에 삐뚤삐뚤 써 내려가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며칠 전, 동호회에서 볼펜도, 샤프도 아닌 몇 자루의 연필을 지인분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어떤 뜻으로 연필을 주셨을까. 철학적 안목으로 하얀 종이에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을 엮어내라는 의미일까. 생의 행로를 한 글자 한 글자 까만 속심 닳아 없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쓰라는 의미일까.
선물로 받은 연필을 깎아본다. 초등학교 시절 책상에 앉아 칼로 연필을 깎는 일은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러 연필을 깎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연필을 깎는 것은 먹을가는 것처럼 들떴던 마음을 다스리며 한곳으로 모으는 훈련이다. 적당한 힘들고 칼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사르륵사르륵 육각형의 나무를 깎아내고, 뾰족하게 까만 심을 갈아내는 일은 마음에 굳게 박힌 아집을 갈아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 마음을 연하게 그려내는 연필은 수수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을 연필로 적는다면 선물 받은 네 자루 면 가능할까.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지우개로 지우고 마음 가는 대로 다시 써도 된다. 볼펜처럼 한번 써 놓으면 절대 지울 수 없는 고집이 아니다. 잘못 쓰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써도 절대로 화내는 일이 없다. 나에게만큼은 연필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포용과 배려의 상징인 것이다.
이향규 작가의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에서는 사물에 담긴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감정들은 들여다볼 수 있었다. 파킨슨병을 알리는 남편의 파란색 팔찌와 영국으로 처음 이주하고 힘들고 외로웠던 가족들에게 따뜻함을 나눠주웠던 교회와 펍,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마을 안의 공동묘지 등 일상에서 평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여러 사물과 장소를 통해 지금까지의 삶에서 느꼈던 삶의 온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토니 몸은 이제 누가 보더라도 떨린다.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졌다. 지난가을부터 고무 팔찌를 오른 손목에 끼고 다닌다.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된 팔찌에는 파킨슨병 지원 단체 연락처와 함께 이런 문구가 있었다.
"저는 파킨슨병 환자입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세요" 사람이 있으면 이걸 보여 주면 되겠다며 좋아했다. 토니는 몇 달간 팔찌를 벗은 적이 없다. 샤워할 때는 물론이고 잘 때도 끼고 있다." p24
"펍은 진짜 동네 '허브' 같아. 중요한 일을 하네." 에이드리언은 펍이 동네 네트워크의 중심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계산대 아래 선반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보여 줬다. 코팅까지 해서 제법 잘 간수하고 있었던 오래된 신문 기사 제목은 이랬다.
"커뮤니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은 학교, 교회, 그리고 펍이다."
맞다 한국에서 이주해 온 우리를 반겨 준(굳이 반기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딘가 속할 수 있게 해 준) 곳도 딱 그 세 곳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나는 교회, 남편은 펍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p134
"여기에서는 누군가가 죽은 이를 생각하며 남긴 기억 조각을 만나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거리에 벤치를 만들고 공원에 나무를 심는다 마을 곳곳에 있는 나무 의자의 등받이에는 보통 '사랑하는 기억을 담아'로 시작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생몰 일을 적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이 많다. 나는 그런 벤치를 보면 천천히 걷게 된다. p189
일상의 익숙한 물건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느꼈던 소소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장애인, 돌봄 노동, 전쟁, 남북 분단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저자의 생각 또한 드러나 있었다. 지금까지 세계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사회 전체적인 부를 상승시키는 방식을 우리 사회에 집중해왔다. 그나마 사회 발전의 성과로 전반적인 복지수준도 함께 높아졌지만 "앞으로도 사회가 지속 가능한가?"라는 포용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저자는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희생과 실천들이 세상을 바꿔왔음을 말하며 서로를 보살피는 공동체의 따뜻한 손길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이 책을 읽게 될, 읽은 모든 이들이 앞으로도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될 사회의 변화에 장애, 나이, 경재 능력 등이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