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의 증명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최진영작가를 알게 된 건 창비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을 통해서였다. 당시 <라디오 책다방>의 덕질을 심하게 해서 페북지기에게 아첨 댓글을 단 결과 최진영 작가의 [팽이]를 선물 받기도 했다.
암튼, 최진영 작가에 대한 내 첫인상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작가구나 하는 것이었다. 작가도 전업소설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는데, 요즘의 현실에서 그리 녹록지는 않아 보였다.
그런 그녀가 [구의 증명]이란 소설을 냈다는 말은 들었지만, 왠만하면 젊은 소설가의 책은 꼭 사주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는 나도 선뜻 구매의욕이 돋진 않았다. 왜냐고? 제목을 봐라! 수학이잖아!! 수학에 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아무리 소설이라도 수학적으로 풀었다면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굳이 이 책을 읽었느냐면 '구'가 그 '구'가 아닌 걸 알았기 때문이다. '구'는 지구처럼 둥근 '구'가 아니라 너무 슬픈 청년 '구'였다!! 아, 바보같은 나의 선입견아!
작고 예쁜 책! 마치 산문시집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 책은 첫 페이지부터 심쿵이다.
문장이 시처럼 느껴져 자연스럽게 입속으로 소리내어 읽게 된다. 그런데 내용은 그로테스크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고, 사랑하므로 나는 그를 먹는다니!! 먹는다니!! 아기가 너무 귀여워서 살을 꼬집어 뜯어먹는 시늉을 해보긴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살을 앙! 깨물어 먹고 싶단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아무리 소설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먹는다는 설정이라니!!!
왜 먹는가 하는 것보다 왜 먹지 않으면 안되는지 담의 말을 듣다보면 소설은 더이상 그로테스크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만의 제의(祭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녀를 식인종, 사이코, 야만인, 변태성욕자라고 비난할 수 없다. 인간도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다. 인간이 도대체 뭐길래.
#아주 오래전 인간은 동족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 지극히 존경해도 먹었을 것이고 위대해도 먹었을 것이다. 사랑해도, 먹었을 것이다. 그들은 미개한가. 야만적인가.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지 않은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며 계급을 짓는 지금은. 돈은 힘인가. 약육강식의 강에 해당하는가. ... 인간의 돈도 유전된다. 유전된 돈으로 돈 없는 자를 잡아먹는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좋게 살아간다.
무엇이 구를 죽였나. 담은 사랑하는 구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걸 지겹도록 잘 아는 담이지만 그래서 더 길바닥에서 죽은 구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고 싶었고 그 작은 행복을 위해 항상 노력했고 달리 나쁜짓도 하지 않고 살았는데, 왜 구는 죽어야만 했나. 구는 부탁했었다. 자기가 먼저 죽게되면 화장을 하던 매장을 하던 자기 시신을 꼭꼭 숨겨달라고. 안그러면 그들이 죽은 자기 시체까지도 노리고 쫓아올 거라고. 담은 구가 먼저 죽는다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지만, 구가 죽으면 구의 몸을 잘 감추고 따라 죽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그게 얼마나 바보같은 소리였는지 구가 죽고 나서야 깨닫는다. 대체 어디에다 감출 수 있단 말인가. 살아있는 구도 감추지 못하고 결국 들켜버렸는데...
#너를 먹을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안하던 괴물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거야.
담은 구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같이 따라죽어서 아무도 모르는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게, 구를 자기 몸 속에 숨기고 영원히 천년 만년 살아서 그를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이들의 기막힌 사랑과 운명에 나는 설득되고 기꺼이 담의 편이 된다. 담을 꼭 안아주고 말해주고 싶다. 너를 이해해!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 하겠네
지난날, 애인과 같이 있을 때면 그의 살을 손가락으로 뚝뚝 뜯어 오물오물 씹어 먹는 상상을 하다 혼자 좋아 웃곤 했다. 상상 속 애인의 살은 찹쌀떡처럼 쫄깃하고 달았다.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사랑. 그런 사랑은 가능케 하는 상상. 글을 쓰면서 그 시절을 종종 돌아봤다.
그리고 또 많은 날 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을 쓰고 싶다` 생각하고, 분명 살아 있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사랑하고 쓴다는 것은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살다보면 그보다 좋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 모른 채 살고 싶다. -- 작가의 말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