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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 - 소비사회가 잠식하는 인간적인 삶에 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리카르도 마체오 지음, 나현영 옮김 / 현암사 / 2016년 2월
평점 :
1. 쥐덫과 창조경제
대통령께서 인용하신 '쥐덫'으로 잠시 시끄러웠다. 발상의 전환(혁신과 새로운 가치)으로 대외 경제 여건 악화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말씀하셨는데, 문제는 '더 좋은 쥐덫'이 말씀처럼 그렇게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거다. 더 나아가 그 근거마저 미약하다는 기사도 나오고 있다. 뭐~ 잘하자는 말씀 중 잠깐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공격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짚어두고 싶은 것은 '누가 대통령에게 그런 단편적 정보를 제공했냐'는 거다. 대통령이 모든 분야의 지식을 다 알 수는 없을 테고, 어떤 소스에 의해 발언하셨을 텐데 이런 것이 보좌관 선에서 안 걸러지다니... 또한 그 많고 많은 혁신의 사례 중에 하필이면 느낌이 요상한 '쥐덫'이었을까? 난 그 누구를 잡자는 복선이요 해학인줄 알았다... 대통령께서 소비자의 심리를 말씀하시면서 창의적 제품을 언급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바우만에 의하면, 유동하는 현대의 문화는 이탈과 단절, 망각의 문화로 보인단다. 미국의 비평가 조지 스타이너가 '카지노 문화'라 명명한 것처럼 오늘날 모든 문화 상품은 최대의 효과를 낸 뒤(어제의 것을 해체하고 밀어내고 제거한 뒤) 곧장 폐기되도록(새로운 문화 상품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줄이도록, 즉 미적거리지 않고 내일의 새로운 상품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기 위해 서둘러 무대를 비우도록) 계산되어 있다. 소비자 시장도 마찬가지다. 소비자 시장은 유동하는 현대의 '카지노 문화'에 적응하고, 카지노 문화는 소비자 시장의 압력과 유혹에 적응한다. 고객의 시간을 낭비하거나 예측 불가능한 즐거움을 빼앗지 않기 위해 즉시 소비될 목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혁신이요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한다.
고객들은 어리둥절할 만큼 다양하게 쏟아지는 상품들과 아찔한 변화 속도에 혼란을 느끼고 있기에 더 이상 학습하고 기억하는 능력에 의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제공되는 상품이 '바로 그것 the thing', '잘나가는 것 hot thing', '꼭 가져야 하는 것 must have', ' (갖고 있음을) 꼭 보여주어야 하는 것 must be seen'이라는 감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다. 바우만에 의하면 자본은 주된 결핍 자원으로 형성되며 그것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사람들이 부와 권력의 원천이라고 할 때,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산업시대의 결핍자원은 지식의 독창성, 상상력, 생각하는 능력,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라고 하였다. '오랫동안 쌓아온 것들이 파괴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몇 분'이라는 말에서 창조 경제의 의미와 나아갈 방향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래 가는 것을 가장 높이 치던 시대는 지났다는 거지.
2. 브렉시트와 이민자
영국이 EU에서 탈퇴한다는 브렉시트는 단연 '반(反)이민' 정서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의 분석에 따르면 저소득·저학력 층이 EU 탈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고 하는데, 그 배경으로 '빈부 격차'를 꼽고 있다. 물론 그 원인은 이민자와 난민의 증가로 안전과 복지를 위협하고 무엇보다 영국민의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이유이다. _신규 일자리 40만 개 중 40%를 이민자들이 차지한다고 불만이다_ 이런 정서의 근저에 이르면 '신자유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신자유주의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영국병'을 치유했다고 하나 그 과정에서 부의 불균형 현상을 야기하여 소외된 계층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분노가 브렉시트로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점점 디아스포라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다수의 도시 거주민들이 이방인에게 노출되었을 때 불안과 위협을 느낀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고 바우만은 말한다. 이 부분은 그의 책 <모두스 비벤디>에서도 잘 설명되고 있는데, 불확실한 유동의 삶은 도시의 외지인에 대한 이질공포증(mixophobia)으로 다양성과 차별성의 바다 한 가운데서 유사성과 동일성을 지향하는 분리주의적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고 했지... 그렇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유럽진보연구재단의 장 마시모 달레마의 말을 빌어 '이민자는 위험이 아닌 자산'이라 말한다. 이주자의 유입으로 촉발되기 마련인 문화적 이종교배가 불가피한데, 서로 뒤섞인 문화적 자극들은 다른 문명에서처럼 유럽문명에도 풍요의 원천이자 창조의 동력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풍요와 문화정체성의 상실을 가르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 사람들은 '새 유럽인'의 사회적, 시민적 권리를 인정하는 일에 몹시 인색하고 이를 주저하며 그 과정은 지난하기만 하다고 한다. 이 골칫거리로 보이는 도시의 문화적 다양성을 자산으로 바꾸는 일은 공존의 생활양식을 통해 가능해 질 것이며, 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는 데 교육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교육시스템의 힘이 아무리 제한적이고 소비지상주의의 게임에 종속되어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화혁명을 촉진하는 요인으로서 충분한 변혁의 힘을 갖고 있다고 진단하네...
3. 개·돼지 민중과 교육
베이트슨이 구분한 교육의 3단계를 보면, 1차 학습은 정보를 전달해 암기시키는 단계이며, 그 다음 단계인 2차 학습은 앞으로 습득하거나 접하게 될 정보를 흡수하고 통합하는 '인식 틀 cognitive frame'을 익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지배적 인식 틀을 해체하고 재배열하거나, 요소들을 대체하는 일 없이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능력을 부여하는 3차 학습이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이 3차 학습을 병리적이며 반교육적 현상으로 여겨왔는데, 오늘날 첨단정보화 시대엔 첫 단계가 쓸모없어진 반면, 암 세포 취급했던 것들은 교수·학습 과정의 규범으로 탈바꿈했다는 내용이 새겨들을 만 했다. 교육 환경에서, 어쩌면 방법론에서 주목할 만한 분기점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네.
이와 관련하여 탄도 미사일과 스마트 미사일로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순식간에 낡아버리는 정보를 제때 폐기하지 못하면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대신 길을 잃게 할지도 모른다. 고형적 solid 현대의 교육 철학자들은 교사를 탄도 미사일 발사대로 보았다. 미사일이 처음 발사될 때의 운동량으로 결정되는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교사들이 배운 기술이었다는 거지. 스마트 미사일은 최고 속도로 비행하는 도중에도 상황에 따라 방향을 바꾸며 목표물의 움직임을 즉각 감지하여 수정을 기한다. 비행 중 학습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빨리 학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먼저 학습한 것을 즉각 잊는 능력도 중요하다. '교육'이라는 분야의 종사자는 이런 '실천적이고 구체적이며 직접 적용 가능한 지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그 전제는 열린 마음을 일깨우는 학교 교육이 필요하다는 거고...
세넷의 권고를 곁들이면, "경직되어 효용만을 따지는 경쟁이 지배할 때 사무실과 길거리는 비인간적인 장소가 된다. 비공식적이며 열린 결말의 협력 작용을 촉진할 때 이곳들은 비로소 인간적인 장소가 될 것이다(172쪽)."고 하였다. 바우만이 말하길, "교육자가 되도록 부름 받고 교육자를 희망하는 우리는 리처드 세넷이 말한 간결하지만 포괄적인 삼위일체(비공식, 열린 결말, 협력)의 수칙들로부터 전략을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하고,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서 부름 받고 배우기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이를 전하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가진 1%를 위한 것이라지.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되고 신분제를 공고히 하여 그들만 가르치면 된다는 대한민국... 아~ 나는 개·돼지였구나.
4. 젊은이에 대한 바우만의 생각
소비 : 오늘날 "문화는 인터넷,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휴대전화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기술을 이용해 아이들 삶의 모든 측면을 상업화하는 교육적인 힘을 지닌다." 기업이 목표하는 바는 "이런 힘을 통해 청소년들을 과거에 목격한 그 어느 방식보다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대량 소비의 세계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다." 즉, 젊은이들이 소비자 산업의 첨병이라는 거지. 다르게 말하면 젊은이는 상품화되고 착취될 '또 하나의 시장'으로 관심과 주목을 받는다는 거고... 문화 엘리트로서의 젊은이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있고 대신에 페이스북과 SNS처럼 소비지상주의의 공략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바우만은 역설적으로 이런 일회성의 시대에 소비자 사업이 낳은 과잉을 처리할 첨병이자 마지막 보루로서 젊은이의 능력이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되묻고 있다.
실업 : 일류 대학의 졸업장은 오랫동안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와 자녀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투자였지만... 대학 졸업생들이 취업을 하지 못하거나 취업을 하더라도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곳에서 일하는 현상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런 충격은 사다리를 열심히 오르는 소수는 물론 묵묵히 불운을 견디던 더 큰 범주의 사람들에게까지 고통이다. 기회의 문이 닫히고 좌절된 희망들이 쌓인다는 것은 지식·정보 중심의 경제와 교육 중심의 경제적 성공을 표방하는 우리 사회에서, 지식은 성공을 보장하는데 실패하고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실패한 걸 의미한다. 이런 교육 문제는 우리사회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능력 이하의 일자리를 참아온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사회 변혁의 촉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우만은 지적하고 있다.
5. 에필로그(소비지상주의)
라캉의 자본주의 담론이 생산자 중심이었던 시대의 산물이라면 바우만은 소비자 중심의 소비지상주의 담론을 이끌어 낸다. 그의 말을 빌리면 "소비자 시장은 재미와 안락과 추구를 상품화하여 세력을 넓히고 번영과 이득을 얻는다. 또한 이런 가치들을 추구하면서도 가격표가 붙은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전환되기를 거부하는 수단들을 비하하고 억누르고 제거하라고 요구한다(179-180쪽)." 우리 사회가 탐욕에서 동력을 얻고 쇼핑을 통해 작동되는 경제가 내건 즐거움과 안락함, 편리함, 수고를 들어주는 일 등등 소비라는 구매를 통해 만족의 즉시성, 꿈의 현실화를 이룰 수 있는 단계라는 거다. 이젠 더 이상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읽어버린 시간을 찾을' 필요가 없다, 고맙게도 신용카드 한 장이면 충분하니까...
소비지상주의는 우리를 유혹해 행동하게끔 자극한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선천적으로 태만하기 때문에 강제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는데, 강제가 금지될 때 마케팅의 달인들은 강제를 유혹으로 대체한다. 더 정확히 말해, 강제의 주된 목적이 틀에 박힌 일상과 규율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면, 유혹의 목적은 태만하지 않고 이윤 창출에 이바지하는 활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소비지상주의에 굴복한 결과 우리는 자발적 노예가 된다. 요즘 말로 자기 주도적 노예화라고나 할까... 헌신과 전념과 책임 등 인간적 관심사에 쏟아야 할 삶의 에너지들은 이런 소비지향적 성향 때문에 몽땅 소모되거나, 최소한 크게 고갈된다고 그는 지적한다(198쪽)...
바우만의 책을 읽으면 어렵지만 유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 변화의 과정은 날마다 가속화되는 동시에 그 간격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낡은 확실성은 사라졌고, 낡은 해결책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점점 불확실해지며 자아상은 지속적으로 굴욕(공허감과 무력감)을 겪는다. 희망은 잘 보이지도 않고 '소음과 분노'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
군중은 불이다. 불은 아늑함을 주지만 예고도 없이 확 타올라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 결국 이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정치력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력은 불이 타오를 수 있는 땔감의 역할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검사는 비상장 주식을 매입해 40억 시세차익을 남기고, 국가의 봉급을 받아먹은 자가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4조원이나 들인 AIIB에서는 그냥 휴직계를 내어버리고, 결국은 민중이 개·돼지로 취급받게 되었지만 이 정권이 이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그냥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는 모양새다. 글쎄다. 이런 일들이 겹치니 이들이 좌지우지 결정하는 정책과 제도 아래 사는 민중은 진짜로 개·돼지인지도 모르겠다.
바우만은 <폐기된 삶ㅡ모더니티와 그 추방자>에서 리퀴드(액체 상태로 유동적인) 모더니티 앞에 있는 것은 인간이 쓰다가 버린 것들이며, 쓰레기가 된 인간들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사회의 쓰레기 같은 공직자들을 보고 있자니 그의 혜안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창조 경제든 뭐든 정권의 근저는 국민(민중)이어야 한다. 선거를 통해 비교적 온건한 맛보기를 보고도 느끼지 못한다면 결국은 타오른다. 그는 이 책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창조성의 풍부한 원천이 된다."고 하였다. 소통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상생의 정치가 요원한 일일까? 바우만의 책을 읽다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바우만의 은유적 통찰을 따라가기 어려워 거의 인용하다시피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