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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의 탄생 - 차가움을 달군 사람들의 이야기 ㅣ 사소한 이야기
톰 잭슨 지음, 김희봉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조금은 시간이 지난 일상의 이야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들어오면서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새로이 구입했었다. 냉장고는 안사람이 제일 디자인이 깔끔하다고 평가한 모회사의 신모델 양문형 냉장고를 샀었다. 그런데 이 냉장고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애를 먹이더라. 4년쯤 지나니 돌돌돌돌... 소리가 난다. 처음엔 그렇게 큰 소음이 아니라 참을 만큼 참다가 더 이상 참기 어려워 AS를 신청하니 컴프레서를 갈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이 부품의 보증기간이 4년인데 AS신청이 딱 4년하고 두어 달 지났다는 거다. 처음 돌돌거릴 때 신청했어야 하는데 바쁜 생활에 조금 지체한 게 화(?)를 불렀다. 어쨌든 수리비 부담하고 교체를 했다. 집안에서 용접봉 쓰는 거 보니 대단한 공사더라.
그렇게 쓰다가 6년차 말부터 또 냉장고가 탈이 났다. 냉장고 밑으로 물이 줄줄... 성에를 제거하는 기능에 문제가 생겨 드레인 홀이 얼어붙어버린 것이다. 열선도 보강하고 이것저것 부품도 갈고 했는데, 이것도 잠시뿐 자주 이런 현상이 반복되더니 보름, 일주일 단위로 막혀버렸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이제 수리비 줘도 더 이상 못고쳐주니 알아서 해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이거 뭥미? 냉장고 기본 10년은 쓰는 건줄 알았는데 7년 만에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냉장고는 디자인 좋다고 사는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엔 디자인이고 뭐고 컴프레서 10년 보장한다는 냉장고를 사고 말았다. (그 일 이후 가능한 그 회사 전자제품은 구매 안하려 한다.)
이런 소소한 생활이야기를 이렇게 쓸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이번에 <냉장고의 탄생>이란 책을 읽게 되면서 씁쓰레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이 책은 냉장고가 핵심이라기보다는 '냉각(차가움)'을 추구한 인류의 과학 발전사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차가움을 붙잡아두는 현재의 냉장고가 있기까지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정의와 연구가 등장하고, 이어 냉각 기술의 진보적 미래를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일정 부분(전반부)까지는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차가움을 위한 고대의 노력이나 얼음을 가지고 사업한 분들의 이야기는 조금 지루했다. 물론 냉장고의 탄생이 이런 분들의 실패를 딛고 태어난 진보의 산물이란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지나간 사건에 대해 마음이 끌리진 않았다. 하지만 냉장고 부분부터는 의외로 쫄깃한 느낌으로 와 닿더라.
냉장고는 네 가지 부분 즉, 압축기(컴프레서), (긴 파이프에 불과한) 팽창 밸브, 두 개의 열 교환기가 연결되어 있는 단순 구조이지만, 냉매를 이용한 증기-압축 순환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반복적 시스템이라는 부분부터는 제법 읽을 만했다. 기체를 펌프질해서 노즐을 통과시키면서 빠르게 팽창시키면, 기체는 압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차가워지기도 한다는 '줄-톰슨 효과'가 발표되고, 이를 추적한 판데르발스는 순수한 기체와 순수한 액체는 진정으로 같으며, 극단적인 끝부분에서만 물질의 두 상태가 공존한다는 아이디어를 발표한다. 작용하는 힘들 중에서 가장 약한 힘인 이 '판데르발스 힘 van der Waals force'이 냉장고에서 기체가 팽창할 때 내는 냉각 효과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네.
냉매로 사용되는 '프레온'이란 상표명으로 잘 알려진 염화불화탄소 CFC! 냉장고를 폐기할 때 이 물질은 하늘 높이 날아가 오존층을 파괴한다. 그 결과 태양에서 오는 해로운 고에너지 자외선을 막지 못한다하여 현재는 과불화탄소 PFC를 쓴다는 정도까지는 안다. 2010년 이후론 거의 모든 CFC가 대기 중에서 사라졌고, 오존 구멍은 줄어들고 있으며 30~40년 지나면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그런데 PFC가 드물게 강력한 온실 기체라네. 온실 효과의 주범으로 지목받는 이산화탄소보다 열에너지 방출을 수천 배나 더 많이 막는단다. 이런 이유로 선진국에서는 냉장고 폐기 시 냉매를 따로 처리하도록 보장하지만 전 지구적으로 그렇게 처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 참 쉽지 않은 새로운 골칫거리구나.
차가움에 대한 인류의 지식 축적과 깊이는 더해져 극저온의 연구들이 쏟아지는데, 과학자들은 절대영도 근처에서 '초전도체 superconductivity'를 개발하게 되고 SF같은 '자기 부상 열차'를 현실화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초유체 superfluid'_초전도체는 저항이 0인 반면에, 초유체는 점성이 0이다. 즉 마찰 없이 영원히 회전할 수 있다._의 발견이 양자물리학으로 설명(보스-아인슈타인 응집물)되는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초전도체로 만든 전자석을 이용하는 MRI(자기공명전자장치)나 입자가속기 및 자기 부상열차는 이런 극저온 기술의 유용한 산물이지만, 역사상 가장 큰 폭발력을 가진 수소폭탄의 실험에 초저온 냉각기술이 사용되었다니... 과학기술의 양면성은 결국 쓰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인가 보다...
'물 합금'이라고 들어보았는지... 난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용어이다. 2006년에 연구자들은 연료 저장에 사용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물 얼음_얼음을 다이아몬드 모루(Diamond anvil cell인듯...)로 눌러서 엄청난 압력(600만 기압 정도)을 가해 압축한 얼음_을 만들었는데, 연구진은 여기에 X선을 쬐었고, 얼음 속의 물 분자가 분리되어 수소와 산소의 합금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냈단다(331쪽). 물 합금은 보통의 얼음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데, 이것은 갈색이고 엄청난 압력이 유지되는 한 400℃에서도 녹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미래의 교통수단과 청정 수소 연료 저장의 미래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냉장고를 거꾸로 돌리는 원리에서 바닷물을 이용해 다른 연료를 쓰지 않고도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니... 차가움에서 극저온으로 발전한 인류 기술은 대단하기 짝이 없다.
미래의 우주선은 자기 냉각(magnetic refrigerator)을 이용하게 될 것이라 한다. 냉각 기술은 이미 우주과학의 영역을 넓히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암흑 물질 탐사에도 사용된단다. 차가움의 응용은 우주 바깥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상과학의 또 다른 단골손님인 초지능 컴퓨터(양자컴퓨터)의 연구도 대부분 극저온에서 수행된다고 한다. SF소설이나 영화에서 보게 되는 텔리포테이션(원격이송) 실현을 위해서도 극저온 냉장고가 필요하단다.
냉장고는 냉장실의 열을 밖으로 내보내고 그 결과로 내부에 있는 것이 차가워지는 '열펌프'에 대한 기록이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작은 반란 같은 이 기술을 위해, 차가움의 진실에 접근한 모든 인류 선인에게 존경의 마음의 가지게 한 이 책, 과학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