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둑 1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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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고 대단한 책이라는 찬사를 등에 업은 책을 이제야 만났다. 도둑이라는 좋지 않은 명사를 붙였음에도 주인공 리젤이 흡족해할만큼 책도둑이란 말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묵직한 두께의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책도둑으로 등장하는 리젤의 이야기를 죽음의 신이 화자가 되어 풀어간다. 독특한 구성과 해석이 자꾸만 앞장을 되짚어 읽게 만드는데 사신이 모든 사물과 형상을 의인화해 묘사하면서 여러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국내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의인화 묘사때문에 중간 중간 옆 길로 새면서 이야기의 쉼표가 되어준다. 

배경은 독일의 작은 마을 헴멜, 히틀러가 독일을 점령한 후 세계제2차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수용소로 보내고 있다. 그 거리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덤을 파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란 책을 훔치고 남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이별한 열살소녀 리젤 메밍거가 후버만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리젤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아코디언을 멋지게 연주하는 아빠 한스 후버만과 엄하지만 따뜻한 엄마 로자 사이에서 전쟁과 나치의 억압으로 위태롭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한스에게 아코디언을 가르쳐준 에릭 판덴부르크의 아들 막스(유대인)가 나타나면서 리젤의 집안은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된다. 가족의 비밀이 되어버린 막스는 지하실에서 2년이란 긴시간을 보내는동안 리젤과 가족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한스가 길거리를 행진하는 유대인에게 빵을 주었던 것이 화근이 되어 막스는 리젤의 가족을 떠나게 되고, 시간이 흘러 유대인 행렬에 합류해 거리를 걷는 막스와 리젤은 다시 한 번 마주친다. 작가가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들었던 장면이 리젤의 이야기속에서 재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로자에게 빨래를 맡기는 시장집의 부인과 몇 번의 교류끝에 친해진 리젤은 부인의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게 되고 후에는 서재의 책을 훔치게 된다. 부인의 암묵적인 동의와 배려하에 책을 훔치는 리젤을 단순히 도둑이라고 몰아버릴 수 없다. 그 책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힘멜이라는 공간에도 패전의 그늘이 짙어지며 폭격의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화자가 된 죽음의 신은 전쟁통에서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거둬들인다. 등장인물들이 죽을 것을 미리 예고하는 사신에겐 일말의 동정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할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죽음은 당연다는 듯한 비난섞인 태도가 나타나기도 한다. 과연 이런 경우엔 어느 쪽이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똑같이 한 인간의 일그러지고 그릇된 욕망때문에 희생된 재물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그 시절에 관해 끊임없이 시험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일제치하의 시대나 전쟁의 폐해에 아직도 몸서리치고 이를 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악몽의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우리의 뇌리에 각인될 것이고 힘을 잃은 영혼들에게 묵념하고 있을 것 같다.  

이들이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 사람들이?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의 눈길에 냄새에 취해 그의 문장, 문단, 책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을까? 로자 후버만이 책임을 져야 할까? 유대인을 숨겨준 사람인데? 아니면 한스가? 이들 모두가 죽어 마땅할까? 아이들도? ....(중략)
인간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책도둑의 언어로 그들의 관해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을 동정했다. 물론 그 당시 여러 수용소에서 내가 퍼나르던 사람들에게 느끼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지하실에 있던 독일인들은 물론 동정할 만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지하실은 샤워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샤워를 하라고 그곳에 보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에게 삶은 여전히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p.109

그리고 리젤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시절에 가장 상처받기 쉽고 예민한 유년의 시간을 견뎠다. 훔친 책과 선물받은 책을 통해 위로받고 사랑하고 행복해했다. 죽음은 늘 책도둑의 가까이 있었지만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고 갈기갈기 찢었지만 책도둑은 살려주었다. 안네의 일기가 유대인의 불안한 삶을 대변하고 어른들을 반성하게 했다면, 리젤의 이야기가 바른 생각을 가진 독일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자 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동안 리젤 또래의 경계에 있는 아이들의 삶을 많이 보아왔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렇다고 질풍노도의 청소년으로 분류하기도 모호한 나이의 아이들말이다. 그들은 대부분 인생이란 날카로운 가시에 할퀴우고, 감당하기 벅찬 현실에 맞닥드리면서도 아이같은 순수함을 마지막 보루로 간직한 채, 성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시기의 자아를 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되돌아 봤을 때 야생마처럼 함부로 날뛰며 치고 박았지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들. 리젤의 아름다운 순간을 엿볼 수 있어 나조차 순수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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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상한 여직원의 판매일기
김선미 지음 / 리잼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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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선했다. 할인점에 입점해있는 판매직원으로 일하면서 저자가 몸소 체험한 할인점에서의 생활이 그대로 담겨있다. 얼마전까지도 유통업에 종사했던 일인으로서 구구절절 눈물날만큼 공감했다. 까대기친다(막일을 그렇게 부른다), 까인다, 매출이 인격이다 등등 유통업계에 일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전문용어(?)부터 그 사이에 암암리에 퍼진 룰까지, 읽는 내내 폭소하기도 했고 격하게 공감하기도 했다. 어느 직장이든 편한 곳이 있겠냐만은 판매나 유통업만큼 박봉이면서 스트레스가 심한 곳이 없다. 열악한 근무환경과 조건은 서비스업계의 3D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눈물나게 고달프고 힘든 직장생활의 일들을 저자의 재치있는 글솜씨로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지나치게 가볍다 느낄 정도긴 하지만 언중유골이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한 달에 3,4번은 가게 되는 할인점의 뒷편에서 이렇듯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할인점의 얼굴만 마주하는 우리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가 없게 되는데,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기에 조금은 현실감있게 다가온다. 유통의 가장 말단사원인 판매사원이고보니 고객과 마주치는 일이 가장 많고, 마트 입점업체로서 매장담당에게 잘 보여야하며, 늘 어딘가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서비스 매니저때문에 불안해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직장의 먹이사슬처럼 살벌하게 느껴진다.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라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피튀기는 전시상황에서도 비장한 인간미를 지닌 동료들이 함께하기에 고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면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 고생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 동료들은, 얼어붙은 찬 바다의 작은 구명정과 같다.    -p.65

비도덕적으로 생떼를 쓰며 환불을 요구하거나 직원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고, 소송을 걸고 있는 많은 고객들에 대한 에피소드도 간간히 나오는데 그럴 때보면 고객들에게도 강도높은 소비자교육이 뒷받침되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는 사람이 더 하다고 하듯이 이 책의 저자처럼 나 역시 식당이나 판매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에 가면 직원들의 서비스태도를 눈여겨보며 우리 회사에서는 절대 저렇게 하지 않는다는둥, 교육이 덜 됐다는 둥 절대 당사자에게는 하지 못할  말들을 동석한 친구에게 개탄하며 쏟아놓기도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직원들도 어딜가든 고객이 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느낀거라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하면서 나 또한 일명 진상이라 불리는 불량 고객이 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타인과 타인 사이의 신뢰는 중요하다. 하물며 금전이 오가는 인간 관계에서는 오죽하겠는가. 그런 관계에서 이해와 신뢰는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관계가 수직적으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된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너무나 큰 재앙이다.
모든 직장이 그렇지만, 특히 우리의 경우에는 사람이 싫어지면 직장이 지옥으로 변한다.
직장생활에는 감동이 없다. 모든 것을 의무적으로 주고 받기 때문이다.
단, 하나 감동이 있다면 그건 바로, 월급이다.    -p.211

이건 정말 나의 이야기라며 무릎을 치던 순간들, 나는 적지 않은 직장 생활동안의 애환과 마주했다. 회사생활하면서도 참아온 소주생각이 났다. 작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상사에 대한 욕과 고객흉으로 5톤 트럭의 호박씨를 까고 만리장성을 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난 정말 그 일이 싫지 않았다. 숨통을 죄어오는 매출압박과 경쟁사 직원을 질투하는만큼 경쟁사 상품을 사는 고객을 씹고, 누구든 고객님~이라고 부르며 아부하고, 디스플레이 변경과 재고조사로 날밤을 새는 일이 허다하지만 내가 해온 어떤 일보다 역동적이어서 좋았다. 그리고 고객입장에서는 장사꾼보다 사기꾼으로 단정해버려 억울할 때도 있지만 간혹 내가 권해준 상품을 사며 기뻐해주는 착한 고객들을 만날 때면 뿌듯해지곤 한다.

 세상에 하찮은 직업, 직장이란 어디에도 없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고뇌와 노력, 땀과 눈물이 있고 적재적소에서 가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일하고 있다.  일을 한다는 건 산다는 것이라고 어떤 드라마의 주인공이 말했었다. 그래서 노동이란 신성한 것이다. 결말이 좀 거창해졌는데 나처럼 같은 업계에 종사해서 느끼는 공감말고도 할인점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흥미롭게 볼 수 있다. 깨끗하고 산뜻한 할인점의 뒷편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내 직장동료의 모습인 듯 토닥여주고 싶은 심정이 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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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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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가 되어 낯선 곳으로 떠돌다 카메라를 들고 풍경이나 사람들을 찍다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그 풍경의 일부만 보고 전체를 평가하려는 어리석음과 마주하기도 한다. 그 곳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에 그만 카메라를 숨긴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찰나의 풍경에 쉴 새 없이 인물들을 평면의 공간으로 가두어놓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 되었다. 그런 관광객으로서의 죄책감과 불편함을 벗어버리고 그는 제주도의 풍광에 자신을 녹여내기 위해 서울에서의 모든 삶을 청산하고 척박한 섬으로 뿌리내렸다.

파노라마 필름에(6x17) 그가 담아낸 제주도의 자연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도가 아닌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섬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뭍의 사람이기에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들에게 그는 얼마나 분노를 느꼈을 것인가. 20년이 넘는 세월을 제주도에서 방황했지만 이방인으로 대하는 사람들때문에 말못할 서러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눈에 익숙한 풍경이라도 그것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제주도의 아름다움은 특별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익숙한 풍경일지라도 새롭게 바라보려고 노력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 사진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제가 뭍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눈에 익숙해진 풍경들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죠."  내 사진이 여느 사진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사진을 찍는 동기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p.128

사계절 제주도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사진작가로서의 열정과 신념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이 책에는 내가 평소 관광지로만 가고 싶어했던 섬의 신비로움이 그려있다. 제주도하면 떠오르던 옥빛 바다와 쨍한 하늘, 노오란 유채꽃밭같은 찍어낸 듯 식상한 풍경은 이 책에는 없다. 대신 대자연의 손길과 바람이 쓰다듬은 비밀의 정원이 드러나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기상이 바뀌는 제주도의 궂은 날씨덕분에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더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제주의 자연은 비밀을 한꺼풀 벗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자연의 시간을 찍고 싶었던 것 같다. 순간을 놓치면 평생을 기다려도 다가오지 않을 때를 위해 수많은 필름을 감고 셔터를 눌렀다. 그가 제주도에서 발견한 화두는 느낄 수는 있으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의 사진들이 말해주고 있는데 구태여 어떤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가 제주도의 풍광을 통해 품었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비록 사진으로 보는 나같은 이들에게조차 가벼이할 수 없는 존경의 마음을 품게 했다. 끝없는 인내와 노력하는 자에게만 보여주는 제주도의 낯선 풍경은 그의 손을 통해 드러났지만 당시에 그가 느꼈을 환희는 고스란히 그의 것이 되었다. 일말의 아쉬움은 남았겠지만 루게릭병으로 인해 뼈마디만 드러낸 앙상한 몸으로 완성한 갤러리 두모악은 그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부여했다. 병때문에 카메라를 들 수도 셔터를 누를 힘도 빼앗긴 그지만 그동안 렌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담아낸 제주도의 아름다움은 그에게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단순하고 느리게 살면서 깨달은 삶과 평화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런 그가 어찌 병때문에 괴로웠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오는 평화야말로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제주도의 자연만큼이나 숭고하게 보였다. 
 
물고기는 바다를 떠나 살지 못한다. 사람은 땅을 떠나 행복할 수 없다. 자연은 말없이 가르친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바위틈에 솟아나는 샘물을 보아라. 굳은 땅과 딱딱한 껍질을 뚫고 여린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아라. 살아 꿈틀거리는 망망대해를 보아라. 빗방울이 모여 개울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자연이 들려주는 소식에 귀 기울이면 삶이 보이고 세상이 보이고 내가 보인다. 이제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를 들어라.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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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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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트라우마란 말을 참 많이 듣게 되었다. 그렇지만 트라우마란 의학적 용어의 남발로 정작 정확한 개념을 모른 채 우리의 일상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너무 쉽게 대입해버린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며 가장 가까운 가족, 친구, 넓게는 국가로 인해 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치유받지 못해 괴로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트라우마의 장애를 남들보다 더 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부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게 단초가 되는 일들은 주인공들이 선택할 수 없는 권한밖의 일이었고, 운명적이라 여길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의지로는 관철할 수 없는 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도 자문했다. 나에게도 그런 트라우마의 경험이 있는가하고 말이다. 지금은 추억이라고 가볍게 웃어넘기는 일 중에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정신적으로 장애를 일으킨 적은 없지만 책에서 정의한 스몰트라우마 정도의 사건이었다. 가끔 그 얘기를 끄집어내면 그 때의 장면이 머릿속에 그대로 재현되곤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과거로 시간을 돌린다면 피해갈 수 있었을까하고...

대개 트라우마는 자신의 선택과는 전혀 무관하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밖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그야말로 운명적인 사건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나 내 선택과는 상관없이 한순간에 내 삶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는 트라우마 앞에서 우리 인간은 작고 초라한 존재일 뿐이지요.    -p.173

물론, 영화적 허구와 실제가 공존하기도 하지만,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해도 우리는 불가항력으로 주인공과 같은 상처를 받고 치유받지 못해 괴로워할 것이다. 흔히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말하지만 그건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전제에 따른 것이지, 실제는 상대방의 입장일 것이라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트라우마의 상처치료와 치유의 서투른 결론을 내리지 않기 위해 영화 속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유형의 트라우마 증세와 치유책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행해졌던 의학적 연구와 노력, 영화와 유사한 사례의 경우를 덧붙이면서 내용이 자칫 너무 가벼워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어 트라우마의 의미를 속단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러나 24가지 영화 속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들의 이야기만 가지고는 그들의 괴로움을 100%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최근까지 읽은 몇몇 소설의 주인공들 역시 어릴적 부모의 성적 학대로 인해 인격이 분열되었다던지(빌리밀리건), 아들을 사고로 읽고 가치관까지 변했던 메이컨(우연한 여행자)역시 지독한 트라우마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말았다는 걸 떠올리자 트라우마란 크고 작은 걸 떠나 인간이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정신적 공황상태인 것이다. 7년전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에서는 1995년 일본 지하철에서 발생한 사린가스 사건 희생자들의 꼼꼼한 인터뷰로 그 당시를 재현하고  희생자들이 그 후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생생하게 기록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트라우마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고 보지도 못했던 사건 당시의 현장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가 하면 지하철을 탈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24편의 영화 중 본 영화라고는 샤인, 여자,정혜, 굿 윌 헌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정도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지 못한 영화들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트라우마로 인해 변하고 고립되고 분열하는 모습을 의학적 견해와 논점으로 해석해놓고 보니 누구라도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특히 실베스타 스텔론이 근육질의 몸매로 연기해 무자비한 야만성을 드러낸 영화 <람보>가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는 해석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람보가 그런 사람이었다니...하고 말이다. 그가 던진 대사는 람보를 악랄한 인간병기쯤으로 가볍게 여겼던 내게 일침을 가했다.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난 전쟁에서 이겨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누구의 승리도 아닙니다. 모두 날 살인자로 보는 것 같아요. 대체 누가 날 보호해 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친구가 필요해요."  

곳곳에 산재해있는 트라우마의 함정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받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세상 어떤 존재보다 가장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나 시간앞에 마냥 무력해지고 자책하며 타인과 소통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어찌 남얘기라고 가볍게 보아넘길 수 있겠는가. 읽는 내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감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트라우마의 치료에 정답은 없겠지만 선행되야 할 예방책을 알려준다는 점이 책을 가치있게 만든다. 누구보다 트라우마의 틀에 갇혀버린 당사자가 그 울타리를 열어줘야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겠지만, 울타리 주위를 맴돌며 진심으로 구애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성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아마 작가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썼을거라 본다.

트라우마의 경험이 자신의 책임이나 잘못만이 아니며 그것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고 지금 현재 나는 안전하고 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 이제 내 자신을 조절하고 원하는 것을 해나갈 수 있다는 자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치유의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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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사막을 사박사박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아 옮김, 오나리 유코 그림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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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일러스트와 글, 동심과 순수함이 마음을 한없이 푸근하게 하는 책이다. 작가인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10살 사키의 일상이 소꼽장난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마음을 잡아 끄는 건 에피소드 중간 중간 삽입된 오나리 유코의 일러스트다. 이야기처럼 무심한 듯 간결하게 그린 일러스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꼬마 니콜라의 장자끄 상뻬를 떠올리게 했다. 어릴 적 읽은 후 아이였을 때보다 어른이 되어 더욱 열광하게 된 그의 일러스트는 이야기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이 책의 일러스트도 그에 못지 않게 잘 어울렸다.

기타무라 가오루. 나에겐 처음인 작가였는데도 이력 한 번 보지 않고 -처음 보는 작가라면 프로필을 먼저 확인하는 평소 습관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술렁 술렁 읽어나갔다. 책의 말미에 적힌 옮긴이의 말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 놀라지도 않았을텐데 그가 60세의 남성인데다 일본에선 미스터리 소설로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엄마와 10살 딸의 디테일한 대화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는 작가의 자전적 얘기라는 생각을 굳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섬세한 모녀의 일상을 이렇듯 아름답게 쓸 수 없다고 지레짐작해버린 나의 착각도 한 몫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순수한 시절이 있듯이, 작가가 간직해 온 추억이 모녀의 일상처럼 아름다웠을 거라는 짐작만이 뒤통수맞은 나를 위로해준다. 사키가 어른이 된 후에도 오늘 일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말에는 눈물이 났다. 엄마가 딸의 아름다운 시절을 위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해주고 생각해주는 모습은 모녀보다 같은 시절을 공유하는 친구같다고 느끼게 했다. 모녀의 일상을 살짝 엿보며 그들의 추억을 나눠가진 듯해서 구름 위에 둥실 떠있는 것처럼 으쓱해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특히 사키의 짝꿍인 무나카타와 연락장을 통해 나누는 대화내용은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했다.

책의 제목인 사박사박이라는 부사가 주는 느낌은 깃털만큼 가볍고 편하다. 엄마와 딸의 주변에 어둠이나 먹구름이라곤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몇몇 대화나 장면은 좀 낯간지럽다고 느낄 정도였지만 작위적이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60대의 할아버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순수해보였다.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감수성이나 생각을 어른이 기억하고 싶은대로 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훈훈해지는 마음은 겉잡을 수가 없다. 사키의 앞머리를 직접 잘라주고, 자전거를 처음으로 가르쳐주며, 들판의 이름모를 나무이름을 함께 기억하는 작고 사소한 일상이 잔잔한 파문으로 오래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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