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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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트라우마란 말을 참 많이 듣게 되었다. 그렇지만 트라우마란 의학적 용어의 남발로 정작 정확한 개념을 모른 채 우리의 일상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너무 쉽게 대입해버린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며 가장 가까운 가족, 친구, 넓게는 국가로 인해 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치유받지 못해 괴로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트라우마의 장애를 남들보다 더 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부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게 단초가 되는 일들은 주인공들이 선택할 수 없는 권한밖의 일이었고, 운명적이라 여길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의지로는 관철할 수 없는 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도 자문했다. 나에게도 그런 트라우마의 경험이 있는가하고 말이다. 지금은 추억이라고 가볍게 웃어넘기는 일 중에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정신적으로 장애를 일으킨 적은 없지만 책에서 정의한 스몰트라우마 정도의 사건이었다. 가끔 그 얘기를 끄집어내면 그 때의 장면이 머릿속에 그대로 재현되곤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과거로 시간을 돌린다면 피해갈 수 있었을까하고...

대개 트라우마는 자신의 선택과는 전혀 무관하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밖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그야말로 운명적인 사건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나 내 선택과는 상관없이 한순간에 내 삶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는 트라우마 앞에서 우리 인간은 작고 초라한 존재일 뿐이지요.    -p.173

물론, 영화적 허구와 실제가 공존하기도 하지만,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해도 우리는 불가항력으로 주인공과 같은 상처를 받고 치유받지 못해 괴로워할 것이다. 흔히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말하지만 그건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전제에 따른 것이지, 실제는 상대방의 입장일 것이라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트라우마의 상처치료와 치유의 서투른 결론을 내리지 않기 위해 영화 속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유형의 트라우마 증세와 치유책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행해졌던 의학적 연구와 노력, 영화와 유사한 사례의 경우를 덧붙이면서 내용이 자칫 너무 가벼워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어 트라우마의 의미를 속단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러나 24가지 영화 속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들의 이야기만 가지고는 그들의 괴로움을 100%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최근까지 읽은 몇몇 소설의 주인공들 역시 어릴적 부모의 성적 학대로 인해 인격이 분열되었다던지(빌리밀리건), 아들을 사고로 읽고 가치관까지 변했던 메이컨(우연한 여행자)역시 지독한 트라우마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말았다는 걸 떠올리자 트라우마란 크고 작은 걸 떠나 인간이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정신적 공황상태인 것이다. 7년전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에서는 1995년 일본 지하철에서 발생한 사린가스 사건 희생자들의 꼼꼼한 인터뷰로 그 당시를 재현하고  희생자들이 그 후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생생하게 기록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트라우마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고 보지도 못했던 사건 당시의 현장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가 하면 지하철을 탈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24편의 영화 중 본 영화라고는 샤인, 여자,정혜, 굿 윌 헌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정도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지 못한 영화들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트라우마로 인해 변하고 고립되고 분열하는 모습을 의학적 견해와 논점으로 해석해놓고 보니 누구라도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특히 실베스타 스텔론이 근육질의 몸매로 연기해 무자비한 야만성을 드러낸 영화 <람보>가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는 해석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람보가 그런 사람이었다니...하고 말이다. 그가 던진 대사는 람보를 악랄한 인간병기쯤으로 가볍게 여겼던 내게 일침을 가했다.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난 전쟁에서 이겨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누구의 승리도 아닙니다. 모두 날 살인자로 보는 것 같아요. 대체 누가 날 보호해 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친구가 필요해요."  

곳곳에 산재해있는 트라우마의 함정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받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세상 어떤 존재보다 가장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나 시간앞에 마냥 무력해지고 자책하며 타인과 소통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어찌 남얘기라고 가볍게 보아넘길 수 있겠는가. 읽는 내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감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트라우마의 치료에 정답은 없겠지만 선행되야 할 예방책을 알려준다는 점이 책을 가치있게 만든다. 누구보다 트라우마의 틀에 갇혀버린 당사자가 그 울타리를 열어줘야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겠지만, 울타리 주위를 맴돌며 진심으로 구애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성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아마 작가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썼을거라 본다.

트라우마의 경험이 자신의 책임이나 잘못만이 아니며 그것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고 지금 현재 나는 안전하고 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 이제 내 자신을 조절하고 원하는 것을 해나갈 수 있다는 자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치유의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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