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이 직접 만든 이야기 식물도감 교학사 자연도감 21
임영득 외 글 사진 / 교학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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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넘도록 주위에 흔한 꽃과 나무, 식물들의 이름을 모르고 살았다는게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고 궁금하다고 여긴 적도 별로 없었다. 몇 해 전 태어난 조카가 옹알이를 시작한지가 얼마된 것 같지 않은데 문장이 될만한 말들을 제법 늘어놓으며 겁없고 호기심많은 그 아이는 우리 주위에서 가까이 할 수 있는 풀이나 나무, 꽃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진중하게 쳐다보며 묻는 표정이 되곤 했었다. 그 때마다 얕은 지식으로 알고 있는 몇가지 나무와 꽃이름만 가르쳐주고 큰소리로 따라 말하게 했는데 점점 보는 게 많아지다보니 우물거리며 지나칠 수가 없게 됐다.  

큰 맘 먹고 식물도감을 구입해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나는 단어를 처음 배우고 익힌 아이만큼이나 천진해하며 좋아하게 되었다. 일단 구성이 굉장히 맘에 들었다. 학교와 집주변, 논과 밭, 산과 들, 냇가나 연못,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풀이나 나무, 꽃으로 개념적 구분을 하지 않고 우리가 기억하기 쉽도록 공간적 구성으로 큰줄기를 잡은 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어릴적 강원도 산골에 살면서 냇가나 산, 들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꽃과 나무의 이름을 알지 못한채 형태로만 추억하는 것들이 많았다. 손에 잡힐 듯 부옇게 떠다니던 그 유령같던 식물들이 도감에서 찾은 자기의 이름으로 비로소 억울함을 풀고 내 가슴 속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선명하게 기억될 수 있었다.   

김춘수의 꽃이란 시구절이 나의 분명한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처음부터 마지막장까지 두번, 세번 훑어보면서 새록 새록 그 식물들의 이름을 머리속에 새겨넣고 있다. 그리고 식물 하나 하나에 꽃말이나 그 식물에 얽힌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적어놓은 것이 좋았다.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면 오래 오래 기억할 것만 같았다. 특히 '며느리밑씻개'란 재미있는 이름의 들풀이나 '도둑놈의 갈고리'같은 재치있는 이름들은 아이들이 더욱 좋아할 것 같다. 물론, 나도 특이하고 재미있어서 도감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우리주변에 하찮은 미물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에도 우리말 특유의 아름다운 이름이 참 많다. 사람처럼 죽고 살며 화려한 인생을 멋진 한송이 꽃으로 피우고, 씨앗을 뿌려 자손을 남기는 모습이 어찌 사람보다 하찮다고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자연이란 이름으로 포용한 이런 식물과 꽃, 나무에게 붙여진 이름표를 잘 기억해뒀다가 오래 오래 기억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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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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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심윤경의 책을 찾는데 이 책이 '독서치료'코너에 있었다. 어떤 내용일까 무척 궁금해졌다. 그런데 읽고 난 후 '독서치료'란 개념자체가 좀 모호해졌다. 과연 이 글로 어떤 이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는 내용이 과격하고 난폭했으며 뜨거웠다. 추한 비극을 향해 치닫는 주인공의 심리가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같았다. 이런 그녀의 책은 처음인데 특이한 이력이 있었다.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했다. 보통 그런 자연계를 배운 사람 중에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를 쓰는 작가를 많이 보았는데 그녀의 선택은 문학이다. 격정적이지만 꼼꼼하고 섬세한 글에 금방 매료되고 말았다.


조씨 집안의 17대 종손인 주인공 상룡은 막 군에서 제대했다. 굳은 결계와 꼿꼿한 성품의 할아버지가 버티고 있는 종가집의 위세에 눌린 상룡은 반서자라는 출생때문에 천착하지 못하고 있다. 종손으로서의 자부심이나 긍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약한 그에게 할아버지는 조씨 집안의 근간을 알 수 있는 언간을 건네며 해석해오라 이른다. 그러나 언간을 해석할수록 집안의 흉허물만 밝혀지고 이에 할아버지는 격분한다. 한편 상룡은 종가집 살림을 도맡아하는 달시룻댁의 딸 정실(오랫동안 혐오스럽게 여기며 함께 자라온)과 깊은 관계가 된다. 80킬로의 거구에 겹겹이 늘어진 살덩어리, 그리고 못생긴 낯짝을 징그러워하던 그였지만 정실과의 정사를 통해 늘 억압되어 왔던 감정의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간다.

 
상룡의 이야기 속에 해석된 언간의 내용이 액자구도로 배치돼있다. 언간의 한문이 어려웠지만 일일이 사전을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문맥의 흐름과 주석으로만 내용을 파악했는데 뒤로 갈수록 비극적인 상룡의 개인사나 집안과 얽혀 자못 흥미진진해졌다.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려버려 재조차 남지 않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던 작가의 바램대로 끝이 뻔히 보이는 비극의 씨앗에 얼음같은 물을 주고 썩어 문드러진 거름을 주어 한 가문을 샅샅이 파멸로 이르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치료되기는 커녕 상룡이 정실의 몸에 올라타며 가학적인 쾌락을 느낄 때는 분노로 치가 떨렸다. 상룡에 대한 정실의 마음이 목이 꺽일 정도의 해바라기식 순정, 내지는 언감생심 황송해하는 궁녀같은 모습을 볼 때도 불편한 심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상룡이 대쪽같은 할아버지의 반응을 뻔히 알면서도 그 사실을 고했을 때 상룡의 마음도 거짓은 아니었구나 싶어 조금 안도했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하는 심리가 그 때부터 발동했을 것이다. 언간의 내용이 극적인 비극으로 치닫자 상룡은 할아버지 앞에 부실하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종가의 실체를 직시할 것을 충고한다. 자신이 쌓아올린 가문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한낱 사상누각이었다는 사실 앞에 할아버지는 초연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상룡은 그로 인해 늘 부정했던 자신의 굴욕적 과거와 비극을 감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 심윤경의 '이현의 연애'를 먼저 읽게 되었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와 함께 살던 이현처럼 여주인공들의 비현실적이고 비안간적인 구석때문에 주인공들 또한 뒤틀려보인다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의 비극을 더욱 비참하게 일그러뜨리고 시뻘건 화염의 불구덩이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게 만든 존재들이었다. 여자가 여자를 그렇게 묘사한다는 게 파괴적이고 엽기적이기까지 하지만 다분히 유혹적이다. 그 유혹앞에 무릎꿇을 수 있는 자만이 활활 타오르는 이야기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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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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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책을 읽다보면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그 곳에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 들뜬 기분이 되었다가, 갈 수 없는 내 처지때문에 한탄하기도 했다가 결국 모든 걸 체념하며 중간쯤 책을 덮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일부러 피하는 책이 여행책인데 이 책은 이번에 계획한 제주여행때문에 꼭 읽어야겠다 싶어 골랐다. 스쿠터 제주 여행을 계획했는데 하필이면 출발 당일이 장마가  확실하다는 날씨정보때문에 예약을 모두 취소해버렸다. 워낙 모험정신이 빈약하다보니 비오는 날 스쿠터까지타고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주도의 기상이 변덕스럽기가 죽끓 듯 한다지만 대놓고 장마가 온대서야 잔뜩 기대한 제주의 코발트빛 바다를 볼 수 없다면 여행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난 후 스쿠터에 미련이 남긴 했지만 올레길을 걸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나갔다. 

걷다 보면 스스로 해답을 찾게 된다. 왼발과 오른발을 옮겨놓는 그 단순한 동작 사이에 어지럽게 엉킨 실타래를 푸는 실마리가 있다. 걷기는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p.287

단순히 여행책이라기보다 저자 서명숙씨의 걷기예찬론이 구구절절 실린 책이다. 제주 올레길과 산티아고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달라진 사람들에 관한 얘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책에는 제주 올레길이 6코스까지만 실려있는데 '제주올레'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벌써 13코스까지 개장한 상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50대 아들을 둘이나 길러낸 아줌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추진력이 부러웠고 결단력이 존경스러웠다. 장마때문에 제주여행자체를 포기해버린 자신이 어찌나 부끄러워지던지. 제주가 고향이긴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산 세월이 길다보니 조금 데면 데면 해졌을 수도 있을텐데 제주 올레길을 만들며 그녀는 가슴속에 품었던 제주의 애정을 마음껏 드러냈다. 제주도가 우리나라라는 게 새삼 어찌나 자랑스럽고 감동이었던지. 아마 그녀도 간세다리(게으름뱅이)로 걸어다니며 제주의 아름다움을, 자연이 주는 기쁨을 혼자 간직하기엔 벅찼을 것이다.

걸어서 다녀보지 않고 그 곳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며 두 발로 발도장을 찍어야만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 그녀의 걷기예찬은 행복해보인다. 겨우 2박 3일 코스로 제주도의 겉만 핥아보려 했던 내 여행계획이 얼마나 한심스럽던지...맞다. 느리게 걸으면서 만나는 작은 들꽃, 나무, 바람의 속삭임을 들어보지 않고 그 곳을 다 안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녀가 산티아고를 걸으며 만났던 친구들을 통해 제대로 걷기의 배움을 제주도의 올레길로 전하고 있다. 크고 멋진 관광지보다 작고 아담한 제주의 돌담길을 걸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 그건 제주도의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걷기의 행복.  책을 덮자 당장 어디로 떠나지 않더라도 바람이 부는 곳이라면 어디든 걷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공해로 찌든 가로수길이라도, 차들이 쌩쌩 달리는 육교길이라도 어디든 두 발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곳이라면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귓전을 맴돌던 휴대전화 벨소리가 어느 때부터인가 사라졌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과 연결된 플러그를 뽑아버린 채 나는 언플러그드 세계로 완전히 이동한 것이다. 자연만이 휴식을, 느림만이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아가고 있었다.   -p.191

제주 올레길을 통해 변화한 보통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땐 그들의 기쁨이 내 것인양 공감하고 싶어졌다. 올레길을 표시한 파란 화살표가 마치 삶의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 늘 불안해했던 미래, 두려워했던 앞일이 환하게 열릴 것만 같다. 장마로 미뤄두었던 제주의 그 길을 올해가 가기 전에 꼭 걸어봐야겠다. 단체관광으로 두 번이나 스치듯 지났던 제주도 여행을 제대로 해두고 싶다. 어느 여행지든 마찬가지지만 그 유래나 역사를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정말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이 책에는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저자 자신도 몰랐던 제주도 지리의 유래와 전설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어 올레여행을 하려는 사람에게 꽤 유용할 것 같다. 관광지를 여행하면서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짧은 여행의 일부지만 그들에겐 삶의 일부라는. 그래서 어디를 가든 가볍고 하찮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저자도 제주 걷기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가르쳐주고 있다.

분노는 옅어지고 그리움만 짙어진다. 미움은 사라지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음만이 안타깝다.
강물 위에 띄운 종이배처럼 흘러갈 일에 왜 그리 마음 상하고 애를 끓였을까.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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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은 없다 - 2008 대표 에세이
김서령 외 41인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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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잘 읽히지 않는 장르의 책이었다. 난다 긴다하는 유명 작가들의 이름난 수필집도 내게는 왜 이렇게 쉽고 가볍게 느껴지던지. 항상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한 내게 그 책들은 무가치하다 지레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런 전문작가들이 오히려 수필의 질을 오염시켰던 것 같다. 한없이 가볍고 말랑 말랑한 문체와 빈약한 소재들에 파묻힌 신변잡기식 에세이에서 진중함을 찾았던 적은 없었다. 문학적으로 어떤 완성도를 요구하는 장르가 아니다보니 더 시시하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약산은 없다, 42명의 엄선된 수필들은 나의 편협함과 옹졸함을 한없이 비웃어주며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글은 짧았지만 긴 소설을 읽는 것처럼 극적 긴장감과 깨달음의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약산은 없다, 물소 문진, 사랑이 사랑을 버리다, 천 개의 구슬, 앉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5가지 테마로 엮인 이 책은 다양한 공감과 감정, 의미를 전달한다. 조금 다른 주제로 묶긴 했지만 42가지의 이야기는 결국 사람사는 세상에 사람냄새 폴폴나는 글들이다.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작고 보잘것 없는 티끌같은 일상의 한 조각. 그 조각들을 섞고 끼워맞추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몇 개 남지 않은 수필에 아쉬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개개인의 작은 이야기들이 모이고 얽힌 굵직한 대하소설 본 것 같기도 했다. 내용들이 워낙 짧고 단순하다고 생각해 단숨에 읽을 줄 알았는데, 몇 줄 되지 않은 문장을 되돌려가며 읽은 건 근래 이 책이 유일한 듯 싶다. 스치듯 가벼운 필치로 그린 대가들의 명작이란 이런 수필을 두고 하는 말같다. 과한 수식어같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만은 그들의 진정성이 전해졌다.


얼마 전 종용한 TV드라마의 마지막회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반짝 반짝 빛나는 건 밤하늘에 빛나는 별만이 아니래요.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 그 존재만으로도 한 사람, 한 사람 반짝 반짝 빛나는 거래요." 난 이 책을 덮으며 삶을 재발견하게 해 준 42명의 수필가들이 누구보다 반짝 반짝 빛이 나 보였다. 별다른 굴곡없이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삶은 나름의 행복과 안식을 준다. 빈 자장면 그릇위에 올려진 신문지에서조차 의미를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줄 아는 이들. 그들을 통해 가볍지만은 않은 우리 삶과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들의 글을 읽다 보니 수필이라는 장르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가적 자존심과 기질을 가진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 수필에 자부심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우리들은 지나치고 말았을 시간과 기억의 사각지대를 거닐며 생명을 불어넣고 잊지 않도록 흔적으로 남겨준 그들이 새삼 고마워졌다. 이 책은 내게 낮잠같은 휴식이었지만 긴 꿈을 꾼 듯 묘한 여운을 주었다. 계란 한 판의 아슬 아슬한 30대에 걸치고 보니 요즘들어 20대의 나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책을 읽을 때마다 고민해보게 되는데 이 책도 그랬다. 그 때의 나라면 우습게 보았을 것 같다. 세상에는 나이를 먹어야지만 깨우칠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흘러 흘러서 수필판에까지 흘러들어왔어.
그냥 쉬어가려고, 그러다보면 다시 출발할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계산을 한 거지.
처음엔 사소한 내 이야기만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어.
그런데 한 십 년 하다보니까 수필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거야.
수필의 위대성을 찾은 거지. 작은 이야기로 세상의 가장 큰 의미도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
그러자 여기가 바로 내가 안착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언제 우리 다시 만나리'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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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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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2,408m, 674층, 인구 50만 빈스토크라 불리는 타워, 작가가 만든 가상공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엮은 책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따로 읽어도 굉장히 재미있다. 다른 말로 살짝 비틀어 상황을 우습게 포장하긴 했지만 작가의 의도는 여실히 드러난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인터뷰를 먼저 보게 되었다. 인터뷰어가 질문하기를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는데 작가는 절대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니었다며 부인했었다. 하지만 나 역시 인터뷰를 먼저 읽지 않았더라도 지금 우리나라가 직면해 있는 정치, 사회,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비꼬며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가볍게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남일같지 않다고 생각한 건 나뿐만은 아니라고 본다. 

 
확대해석이라해도 할 수 없지만 우리가 듣기 싫어도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는 기자들 덕분에 눈가리고 귀막고 살려는 나같은 사람도 알 수 있을만한 포장이었다. 게다가 건물내부에 국경이 존재하고 중심권력을 쥐고 흔드는 시장과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 용역업체에 고용되어 불안정한 삶을 사는 비정규근로자들, 부동산 투기, 교통대란등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지만 어느 누구도 분명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들이 바로 지금 우리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또는 빈스토크 자체에서 통용되는 화폐단위가 현재 화폐가치의 10배이상으로 높은 걸 보니 어쩌면 머지않은 우리의 미래나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존재하는 건물(혹은 국가)은 아닐까하는 상상도 해보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인간은 궁지를 물기 마련이었다. 세 사람은 정교수가 어떤 궁지에 몰려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문명 세계의 권력이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권력자가 일일이 협박하거나 지시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약탈당할 물건을 내놓게 만드는 힘.
위에서 일일이 지목하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서 정적을 제거해주고 비판자의 입을 틀어막아주는 힘.
통치자가 머리를 비우고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통치기구가 알아서 합리화해주고 알아서 정당화시켜주는 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비열한 짓을 저지르더라도 절대 추궁당하지 않는 권력.      -p.38


아마 작가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에서 책의 영감을 얻은 모양이다. 에피소드의 화자가 끊임없이 빈스토크는 바벨탑이기를 거부하는 메시지를 심어놓지만 그건 강한 부정에 의한 긍정의 의미처럼 들렸다.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어 바벨탑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었다. 바벨에 사는 노아의 후손들이 대홍수 후 하늘에 닿는 탑을 쌓기 시작한 것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사람들 사이에 다른 말을 쓰게 만들었고 말이 통하지 않아 완성하지 못한 탑이라는 걸 뒤늦게 확인했다. 거기다 작가는 잭과 콩나무라는 동화에 나오는 콩줄기라고도 했다. 비슷한 의미처럼 다가왔다. 빈스토크는 인간의 허영과 지나친 이기가 만들어낸 욕망덩어리로 꿈틀대며 살아있는 생명 자체였다. 바벨탑이 결국 사람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아 완성되지 못했 듯  빈스토크 역시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다른 의미로 소통하지 못한 채 명멸해가는 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빈스토크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바벨탑을 떠올렸다.
저건 무조건 바벨탑이 될 거야. 저것 봐. 저렇게 거대한 모양이라니.
인간의 허영이 딱 드러나 보이잖아. 저건 무조건 바벨탑이 될 거야.    -p.221

 
그렇지만 작가는 그 위태로운 빈스토크를 끝내 무너뜨리지 않았다. 내부분열로 끊임없는 논쟁과 충돌이 계속되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부여한 삶을 살고 있는 개인들은 빈스토크를 너무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저소공포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전쟁의 위협에도 빈스토크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처럼. 황당무계한 권력구조의 진실로 나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며 시작한 이 코믹단막극은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들었다. 비록 입 안에 떫떠름한 뒷끝을 남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진실은 진실이니까. 권력의 핵심이 알고 보니 영화배우 P, 네 발달린 개였다.해석은 독자들의 몫이지만 나에겐 왠지 통쾌한 반전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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