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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은 없다 - 2008 대표 에세이
김서령 외 41인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평소에 잘 읽히지 않는 장르의 책이었다. 난다 긴다하는 유명 작가들의 이름난 수필집도 내게는 왜 이렇게 쉽고 가볍게 느껴지던지. 항상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한 내게 그 책들은 무가치하다 지레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런 전문작가들이 오히려 수필의 질을 오염시켰던 것 같다. 한없이 가볍고 말랑 말랑한 문체와 빈약한 소재들에 파묻힌 신변잡기식 에세이에서 진중함을 찾았던 적은 없었다. 문학적으로 어떤 완성도를 요구하는 장르가 아니다보니 더 시시하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약산은 없다, 42명의 엄선된 수필들은 나의 편협함과 옹졸함을 한없이 비웃어주며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글은 짧았지만 긴 소설을 읽는 것처럼 극적 긴장감과 깨달음의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약산은 없다, 물소 문진, 사랑이 사랑을 버리다, 천 개의 구슬, 앉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5가지 테마로 엮인 이 책은 다양한 공감과 감정, 의미를 전달한다. 조금 다른 주제로 묶긴 했지만 42가지의 이야기는 결국 사람사는 세상에 사람냄새 폴폴나는 글들이다.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작고 보잘것 없는 티끌같은 일상의 한 조각. 그 조각들을 섞고 끼워맞추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몇 개 남지 않은 수필에 아쉬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개개인의 작은 이야기들이 모이고 얽힌 굵직한 대하소설 본 것 같기도 했다. 내용들이 워낙 짧고 단순하다고 생각해 단숨에 읽을 줄 알았는데, 몇 줄 되지 않은 문장을 되돌려가며 읽은 건 근래 이 책이 유일한 듯 싶다. 스치듯 가벼운 필치로 그린 대가들의 명작이란 이런 수필을 두고 하는 말같다. 과한 수식어같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만은 그들의 진정성이 전해졌다.
얼마 전 종용한 TV드라마의 마지막회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반짝 반짝 빛나는 건 밤하늘에 빛나는 별만이 아니래요.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 그 존재만으로도 한 사람, 한 사람 반짝 반짝 빛나는 거래요." 난 이 책을 덮으며 삶을 재발견하게 해 준 42명의 수필가들이 누구보다 반짝 반짝 빛이 나 보였다. 별다른 굴곡없이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삶은 나름의 행복과 안식을 준다. 빈 자장면 그릇위에 올려진 신문지에서조차 의미를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줄 아는 이들. 그들을 통해 가볍지만은 않은 우리 삶과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들의 글을 읽다 보니 수필이라는 장르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가적 자존심과 기질을 가진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 수필에 자부심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우리들은 지나치고 말았을 시간과 기억의 사각지대를 거닐며 생명을 불어넣고 잊지 않도록 흔적으로 남겨준 그들이 새삼 고마워졌다. 이 책은 내게 낮잠같은 휴식이었지만 긴 꿈을 꾼 듯 묘한 여운을 주었다. 계란 한 판의 아슬 아슬한 30대에 걸치고 보니 요즘들어 20대의 나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책을 읽을 때마다 고민해보게 되는데 이 책도 그랬다. 그 때의 나라면 우습게 보았을 것 같다. 세상에는 나이를 먹어야지만 깨우칠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흘러 흘러서 수필판에까지 흘러들어왔어.
그냥 쉬어가려고, 그러다보면 다시 출발할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계산을 한 거지.
처음엔 사소한 내 이야기만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어.
그런데 한 십 년 하다보니까 수필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거야.
수필의 위대성을 찾은 거지. 작은 이야기로 세상의 가장 큰 의미도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
그러자 여기가 바로 내가 안착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언제 우리 다시 만나리' -p.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