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
이유명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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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감히 이 책을 통해 진짜 여자로 거듭났다고 느낄 수 있었다. 30년동안 각종 유언비어와 근거없는 낭설로 내 몸을 바로보지 못했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한의사라는 입장보다 여자의 입장에서 솔직하고 가감없이 쓴 책에는 보약같은 이야기가 가득하다. 책 뒷편 한비야의 추천사대로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건강지도서 혹은 필독서로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그만큼 좋은 정보와 여자로서 자긍심을 키울 수 있게 만드는 든든한 엄마같은 책이었다. 원래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말려했던 책이었는데 10페이지정도 읽은 후 이 책은 반드시 소장해야겠다싶은 생각에 주저없이 구매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고 공감이 갔다.  값진 충고와 올바른 정보를 접하자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책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총 3부로 구성되었으며 1부는 여자임을 증명하는 몸의 가장 중요한 장기인 자궁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고, 2부에는 여자몸을 지키는 다양한 방법과 좋은 음식이 소개되었다. 3부에서는 완경(폐경을 더 좋은 말로 순화한 명칭) 후 건강하게 살기 위한 다양한 노하우와 성인병 예방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정말 솔직한 담론과 한의사로서의 처방 및 직접 환자들을 치료하며 겪은 경험담이 실려있어 더욱 공감하고 신뢰하게 된다. 나는 매월 생리통이 심해 진통제도 끼고 살고 몸에 좋다는 한약과 운동등 여러가지를 해보았지만 효과가 없어 매번 실망하고 생리 일주일전부터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생리증후군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본 후 나쁜 생활습관 및 음식까지 생활전반을 고쳐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변비나 다리꼬기, 오래 서있거나 오래 앉아있는 행동들이 자궁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도 새삼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몸에 대해 무지했다는 생각에 반성하게 되었다.


내 몸을 무시하거나 조종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의지에 맡겨보세요. 스트레스를 없앨 수는 없고 마음을 다치지 않게 그대를 지키세요. 그대들은 강하고 훌륭하고 능력 있는 여성임을 잊지 마시고 당당하게 나가세요. 자궁 돌보기를 하시면서 휴식과 사랑을 보내며 늘 감사하시면 보답이 있을 겁니다.    -p.69


그리고 우리가 성(性)에 알고 있는 상식이나 지식이 남성들의 기준이나 편리대로 해석되었기에 올바로 정정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여자로서 자부심이 마구 솟아나는 기분이 들어 용기백배해졌다. 예를 들면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수정과정에 대한 해석도 우리가 의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많이 달랐다. 정자가 난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의 100배나 두꺼운 난막을 뚫어야 하고 난자의 표피를 뚫기 위해서는 순간마다 패스워드를 바꾸는 난막의 생식 단백질 암호를 뚫어야 한다고 한다. 그저 수동적으로 난자가 정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정자 중에서 '암호 테스트'로 똑똑한 정자를 고른다는 것이다. 수정은 난자와 정자의 협동작전으로 이루어진다는 해석에 새삼 학창시절 받아온 성교육이 얼마나 성의없이 이루어졌는가 알 수 있었다. 그 때 뿌리박힌 성교육으로 아직까지 여자를 깔보는 많은 남자들에 대해 알 수 없는 우월감이 생기기까지 했다. 온전한 생명체로 세상에 자신을 낳아준 이 땅의 모든 어머니의 존재에 남자들은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난자가 능동적으로 선택해서 인도하지 않고서는 수정이란 불가능할 것 같다. 여남간에 어떤 것도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을 수정은 보여준다. 수정은 서로 당겨주고 끌어주는 난자와 정자의 협동작전으로 이루어진다. 남자가 삽입하면 여자는 흡입해서 반쪽 씨를 투자하는 합자(合子)회사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p.51


책 속에 소개된 쉽고 다양한 애무법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생리통을 치유하는 애무법에 소개된 팥찜질은 실제로 아픔을 덜어주어 웅크린 채 힘겹게 잠들었던 나의 생리 첫 날 밤을 고통없이 숙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밖에 자궁질환을 이기는 애무법, 뭉친 가슴을 풀어주는 애무법, 골반튼튼 프로젝트, 고혈압 예방 애무법은 꾸준히 한다면 효과를 볼 수 있을 듯 했다. 임신과 수유, 육아로 여성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골다공증에 관한 좋은 음식이나 운동등은 우리 엄마에게 적극 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얘기했듯이 여성들이 보면 가장 좋은 책이지만, 그보다 더 남자들이 먼저 봐야하는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지금 사랑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녀를 더욱 사랑하고 그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이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으니 이보다 더 고마운 책은 없다고 느낄 것이다. 중간 중간 삽입된 그림과 직설적인 제목에 버스안에서 읽으며 남들이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소심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경험에서 우러난 작가의 솔직하고 재치있는 말솜씨에 감탄하고 긍정하며 정말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값진 충고를 받아들여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무용지물일 수 밖에 없다. 작가의 말대로 다가올 미래를 막연한 걱정으로 지새지말고 지금 이 순간, 현재의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나쁜 습관부터 바로 잡고 몸에 좋은 음식은 남보다 내가 먼저 먹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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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로비오틱 밥상 - 자연을 통째로 먹는
이와사키 유카 지음 / 비타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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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용(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운 철학의 한 개념이다. 당시 그에 관한 수업을 들으며 매우 선명한 인상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런 중용은 마크로비오틱 전체를 아우르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마크로비오틱의 4대원칙이라고 하는 신토불이나 일물전체, 자연생활, 음양조화는 이런 중용을 실천함으로 몸이 음과 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잡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차림이었다. 현재 우리가 건강을 위해 외치는 친환경이나 유기농보다 먼저 선행되야할 식생활 개선프로젝트였다. 재료들을 통째로 먹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단순한 논리안에 심오한 철학적 개념이 녹아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나의 식생활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책이었다. 

 
마크로비오틱에서는 특별히 먹으면 안 된다고 제한하는 음식은 없다. 다만 고기나 생선 같은 동물성 식품은 밸런스를 맞춰서 먹고, 채소 중에서도 감자, 가지, 토마토 등은 계절이나 함께 먹는 식품의 궁합을 보고 선택하라고 한다. 이런 점 때문에 마크로비오틱은 "까다롭다"라는 인상을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마크로비오틱의 세세한 이론을 너무 고집하면 음식을 현명하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까다롭게 가려먹게 된다.    -P.87


거창한 이름과 달리 요리법이 단순하고 간결했다. 요리순서를 설명하는 자세한 레시피나 사진이 부족했던 점이 아쉬웠지만 마크로비오틱에 대한 작가의 생각에는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밋밋한 재료들을 발상의 전환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독특한 요리로 선보일 때는 감탄이 절로 났다. 반찬으로밖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무말랭이를 차로 끓인다던지, 두부로 요거트를 만들고, 날로만 먹는 묵을 기름에 지지는 도토리묵구이, 채소를 그릴에 굽거나 찌는 간단한 요리들은 왠지 까다로울 거라는 마크로비오틱에 대한 편견을 날려버린다. 음식과정을 머리속으로 그리며 요리과정을 더듬어가다보니 어느새 내 몸도 가벼워지고 건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의심스러운 조리과정에도 일주일에 꼭 한 번은 하게 되는 외식과 자극적인 야식으로 혹사당한 나의 몸이 조만간 신호를 보내오기 전에, 이 책을 통해 배운 마크로비오틱의 기본을 충실히 실천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흔한 재료와 단순한 조리법에도 선뜻 요리하기가 꺼려졌다. 설탕과 우유, 계란등 어떠한 음식에도 사용하지 않으면 한계에 부딪혀버릴 것 같은 기본 재료들을 넣지 않고 하려니 맛을 볼 엄두가 안 났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정제된 조미료와 동물성 식품에 얼마나 의존하며 사는지 알게 되는 대목이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제철음식만큼 좋은 게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 길들여져 굳어버린 잘못된 식습관 탓이다. 쉽지 않겠지만 나 역시 생활에서 작은 것부터 고쳐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마크로비오틱의 재료해석에 새삼 놀랐게 됐다. 생선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입이 두드러지게 나왔다거나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돼지처럼 콧김이 세지고, 닭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닭처럼 수선스러워진다고 한다. 게다가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이나 일본, 중국인들은 벼이삭처럼 고개를 숙이고, 밀을 주식으로 먹는 미국인들은 보리처럼 허리를 꼿꼿히 세운다. 음식이 그만큼 사람의 신체 정신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음식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음식물의 모양을 사람의 몸에 비유해 나타나는 효과를 설명하는 부분도 새롭고 신기했다. 미역이 머리카락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신장과 비슷하게 생긴 팥이 신장기능에 좋으며, 야채껍질이 피부미용에 좋다는 건 설득력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식재료가 가진 음양의 기운을 파악하면 웰빙라이프를 실천할 수 있다니 얼마나 지당한 얘기인가. 
 

또한 식사를 하기 전 "잘 먹겠습니다"와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를 통해 생명체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부분에서는 일본인 특유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몇 달 전 읽은 구본형씨의 책에서 발견한 비슷한 구절도 떠올랐다. 살기 위해 살아있는 것을 죽여 먹는 것이 바로 밥벌이니, 밥벌이가 치열할 수 밖에 없고, 죽음을 먹고 삶이 이어지는 것이니 대충 살 수 없다고 말이다. 모든 음식과 재료에 감사한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렇게 소중한 생명을 이어온 음식을 함부로 희생시키지 말고, 재료 본연이 가진 생명력을 소생시킬 수 있는 요리법, 그것이 바로 마크로비오틱인 것이다. 땅의 기운을 빌어 이 땅 위에 우뚝 섰으니, 우리는 땅에게 감사해야하고,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을 버리지 않고 먹을 줄 아는 지혜를 발휘한다면 건강을 지키는 방법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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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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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은 만화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펼치게 된다. 하지만 한장 한장 넘기고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묵직한 돌덩이를 가슴에 얹은 것처럼 뻐근해지고 만다. 그의 만화가 세상에 처음 고개를 내민 이 단편집 역시 신인시절의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풋풋하고 조악한 감상따위는 없다. 남들은 꺼내기 어려워하는 사회의 그늘이나 약자의 모습들이 직설적이고 담담하게 그려있다. 그리고 분명 반대편에서 그들을 바라봤을 자신과 우리를 향해 모진 비난과 부끄러움을 들춰내고 만다.


6가지 단편에는 그동안 그가 그려왔던 만화의 자양분이 됐을 거라 짐작하는 다양한 군상의 인물과 주제가 드러난다. 첫번째 단편인 사랑의 단백질은 <습지생태보고서>의 캐릭터들이 그대로 나오며 -이 단편이 습지생태보고서의 초석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콜라맨과 선택을 통해서는 <대한민국 원주민>의 추억이 떠오른다. 다른 책보다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타이틀인 단편 <공룡 둘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아기공룡 둘리>의 순수한 이미지를 짓밟고 비틀며, 암울한 이 시대의 단면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슬픈 작품이었다. 민증없는 이주노동자가 된 성인 둘리와 동물원으로 팔려간 또치, 외계인으로 취급되어 해부되는 도우너, 이 모두를 계획한 철수와 양아치 건달로 변한 희동이의 모습은 책 속의 평처럼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알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이 되고 만다.  

 
그의 작품은 한 번 읽고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두 번, 세 번 읽게 되는 것들이 많다. 곱씹고 다시 읽을수록 처음 놓쳤던 많은 부분들이 세세하게 보인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들다가도 차마 등돌리고 싶어지는 현실에 옹송그리게 된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진실은 불편하고 우울하다. 높은 빌딩 사이, 구부정한 등으로 목장갑을 낀 채 소주병과 잔을 들고 있는 고단한 노동자인 둘리의 모습은 어두운 뒷골목 어딘가에서 현실을 한탄하고 있을 누군가 같다.


그의 만화를 보고 있노라면 지독히도 어둡고 읍습한 느와르 장르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인간의 그늘진 내면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숨기고 싶어하는 본성, 혹은 야만성과 이기심이 만화적 상상력을 빌어 더없이 날카롭게 그려지고 있다. 단편의 중간 중간 짧은 컷으로 그려진 만화도 작가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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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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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장에 적힌 '작가의 말'을 보며 아!하고 무릎을 쳤다. 6월민주항쟁은 작가의 나이 겨우 10살에 일어난 민주화시위였다. 어떻게 그 당시를 생생히 의식화하며 떠올릴 수 있느냐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제안받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거절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작업을 하기로 했던건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기 때문이었단다. 다분히 계몽의 성격이 짙었지만 그는 그 작업을 통해 교과서에서는 만날 수 없는, 민주항쟁을 통해 피흘리며 죽어간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 역시 6월민주화항쟁에 대해 더 알아보게 되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의 독재정치타도와 장기집권강화에 반기를 든 전국민적민주항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잡혀가고 고문으로 죽어갔다. 이 책에도 영호라는 대학생이 등장한다. 그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느새 선후배들의 활동에 가세하게 되고 누구보다 강경해지며 결국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빨갱이로 몰려 무고하게 죽어간 자신의 어머니때문에 아들이 그런 데모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남동생과 여동생을 감옥에 보냈다는 한 여인과의 동행을 통해 아들의 생각이 올바랐음을 알게 된다. 자신 역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감옥의 높은 담장을 넘기도 하며 아들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한사람이 된다.


1987년 내 나이 겨우 7살에 일어난 일이 작가처럼 강원도 산골에 살고 있던 나와 가족들, 주변사람들에게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으니 내게도 먼나라 일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교과서나 근현대 소설에서 한번씩 보았을 뿐이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민주항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와 일반시민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켜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밟으면 일어서고 더 질겨지는 산길의 질경이처럼 그들의 피,땀으로 우리가 지금의 민주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축복받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숙연해지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보며 최근에 읽은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책에도 특별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공장노동자로 근근히 하루를 살아가는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사회주의 혁명에 몰두하면서 자신 역시 그 투쟁에 몸담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이 책과 상당히 흡사한 전개다. 다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이념이지만 무조건적으로 아들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배움을 통해 결코 아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들은 변화를 겪는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야기였다. 세상을 바꾸려는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는다는 극 중 대사를 통해 정당한 분노란 이런 것이구나 알게 되고 보니 요즘 우리가 얼마나 분노를 삭히며 체념하고 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 그리고 옳은 쪽에 서지 않는 태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자세, 그 분들이 이어준 민주시대를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했다. 
 

"영호학생"

"그렇게 슬퍼하는 것도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슬퍼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겁니다"

"뭐가 두렵단 건가?"

"끝이 없을 것 같아서요"

"처음 그 사람들 만났을 때는 그 열정에 반해서, 그런 사람들이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조직이 깨지고 사람들이 잡혀가고 죽어갈 때도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길 수 있는 건지...... 끝이 있긴 있는 건지."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보면 불을 얼마나 더 때야 할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가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더 불을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그렇다 해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남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어떻게 수십년을 버텨내셨습니까?"

"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았겠나. 다만 그럴 때마다 지금은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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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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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거리를 풍부히 남겨주는 최규석 작가의 만화는 이번달 나의 테마였다. 가장 먼저 읽은 <습지생태보고서>와는 또 다른 차원의 솔직하고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책 역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주로 어머니와 누나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1970~80년대 과거이야기가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작가와는 3년의 나이차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의 가족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했다. 간간히 들려주시는 추억담에서야 상상할 수 있는 어머니나 아버지세대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때묻지 않고 순수했던 그 시절 사람들을,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시대를 살아온 "원주민"이라고 칭하는 작가의 의도대로 왠지모를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책의 첫장에 등장하는 <어디에나 있다>란 에피소드에 보면 도로가옆에서 고추를 심는 할머니나 옥수수를 따는 할아버지의 모습, 고층빌딩 사이 이국땅의 잔디밭에서 천진한 웃음으로 쑥을 캐는 할머니의 모습은 울타리밖으로 밀려난 영락없는 원주민의 모습이었다. 지킬 수는 없었지만 마음 속 한 켠에는 늘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사람들. 그들을 통해 잊은 듯 살았지만 나의 유년에 큰 영향을 미친 할머니가 생각났다.


이 책에서도 최규석작가 특유의 자기삶에 대한 애정과 긍정이 묻어난다. 겨우 한 페이지의 만화지만 작가 특유의 깊은 사유와 힘든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 대한 예우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의 책, 겨우 두 권이지만 작가의 삶 전체를 관통한 가난이란 놈을 창피해하지 않고 당당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그의 공부를 위해  적금을 깨준 누나나 가족들을 위한 고마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 옛날 추억들이 그를 지금까지 키운 자양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책이었다. 아마 작가도 이 책을 그리고 쓰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역시 읽고 나서 가벼운 마음이 될 수 없는 것이 그의 만화에서 느끼는 매력이다. 그의 만화를 보며 또 한 번 아득하게 먼 과거를 상상해본다. 박물관에서 먼지 쌓인 채 사라져가지만 몸 속에 각인된 유전자의 기억은 그의 만화를 보며 반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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