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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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은 만화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펼치게 된다. 하지만 한장 한장 넘기고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묵직한 돌덩이를 가슴에 얹은 것처럼 뻐근해지고 만다. 그의 만화가 세상에 처음 고개를 내민 이 단편집 역시 신인시절의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풋풋하고 조악한 감상따위는 없다. 남들은 꺼내기 어려워하는 사회의 그늘이나 약자의 모습들이 직설적이고 담담하게 그려있다. 그리고 분명 반대편에서 그들을 바라봤을 자신과 우리를 향해 모진 비난과 부끄러움을 들춰내고 만다.


6가지 단편에는 그동안 그가 그려왔던 만화의 자양분이 됐을 거라 짐작하는 다양한 군상의 인물과 주제가 드러난다. 첫번째 단편인 사랑의 단백질은 <습지생태보고서>의 캐릭터들이 그대로 나오며 -이 단편이 습지생태보고서의 초석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콜라맨과 선택을 통해서는 <대한민국 원주민>의 추억이 떠오른다. 다른 책보다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타이틀인 단편 <공룡 둘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아기공룡 둘리>의 순수한 이미지를 짓밟고 비틀며, 암울한 이 시대의 단면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슬픈 작품이었다. 민증없는 이주노동자가 된 성인 둘리와 동물원으로 팔려간 또치, 외계인으로 취급되어 해부되는 도우너, 이 모두를 계획한 철수와 양아치 건달로 변한 희동이의 모습은 책 속의 평처럼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알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이 되고 만다.  

 
그의 작품은 한 번 읽고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두 번, 세 번 읽게 되는 것들이 많다. 곱씹고 다시 읽을수록 처음 놓쳤던 많은 부분들이 세세하게 보인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들다가도 차마 등돌리고 싶어지는 현실에 옹송그리게 된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진실은 불편하고 우울하다. 높은 빌딩 사이, 구부정한 등으로 목장갑을 낀 채 소주병과 잔을 들고 있는 고단한 노동자인 둘리의 모습은 어두운 뒷골목 어딘가에서 현실을 한탄하고 있을 누군가 같다.


그의 만화를 보고 있노라면 지독히도 어둡고 읍습한 느와르 장르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인간의 그늘진 내면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숨기고 싶어하는 본성, 혹은 야만성과 이기심이 만화적 상상력을 빌어 더없이 날카롭게 그려지고 있다. 단편의 중간 중간 짧은 컷으로 그려진 만화도 작가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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