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
김현진.김나리 지음 / 박하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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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는 86개다. 

그 중 4개는 이미 사망해 연락할 길이 없는 죽은 번호다. 차마 지우지 못하여 그의 생전에 쓰던 번호는 여전히 내 폰에 남아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을 알면서도, 셀룰러 폰을 사용하던 그 순간부터 늘 나는 전화번호 목록의 전화번호들이 무거웠다. 안다. 말도 안되는 거. 희한하게도 이쪽으로 결벽성향이 있다. 남의 전화번호를 잘 저장하지 않는다. 저장했다가도 그 관계의 시절인연이 끝나면 얼른 지운다. 당연히 업체의 전화번호는 저장하는 일이 없다. 네이버 만세. 


이러면서도 희한하게 과거의 대화 기록은 잘 지우지 않는다. 그래서 내 폰에는 과거 카톡이나 문자 대화방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들이 꽤 있다. 영혼까지 복구해준다는 아이폰의 위엄이다. 아이폰 만세.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 침대에 누워 과거의 대화창들을 열어 읽을 때가 있다. 이 시기에 내가 이런 물건을 팔았고, 이런 물건을 샀구나, 이 사람과 이런 대화들을 나누었구나. 하는 생각. 

카톡창의 대화는 매우 즉각적이고 즉흥적이라 그 당시의 날 것의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묘한 기분을 준다.

 

편지와 이메일의 거리만큼이나 이메일과 대화창의 거리도 멀다. (실은 편지와 이메일간의 거리가 더 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터넷 초창기시절부터 꽤 오래 드림위즈 메일을 썼는데 이제는 그 서버가 없어져버려 그 당시의 메일들을 복구할 길이 없다. 슬프다.)


이 소설은 그 새벽의 카톡창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김현진이라는 작가를 좋아한다. 그 선명한 정치적 스탠스도 좋아하고, 자신을 치장하지 않는 위악적인 태도도 좋아한다. 이 책을 처음 선택한 이유는 김현진이라는 작가 때문이었고, 초반 몇장의 덜그럭거리는 느낌의 서술 역시 김현진을 이유로 참았다. 읽다보면 괜찮을 거야. 하고. 그리고 소설이 카톡 대화창으로 넘어갔을 땐 어라, 이럴거면 서간체 소설을 쓰시지 왜. 라고 생각했다가 곧 납득이 됐다. 이건 서간체 소설로는 안되는 이야기다. 더이상은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기다리는 세대가 아니고 이메일 확인을 재촉하는 세대도 아니다, 하는 세태 반영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날 것의,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려면 실시간의 (완전한 실시간은 아닙니다만) 대화창이라는 설정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정확히는 국민학교) 때 편지 쓰는 법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편지를 쓸 때는 다른 노트에 대충 써 본 뒤에 편지지에 형식을 잘 갖춰서 배껴 쓰라고 배웠다. (진짜다! 지금 생각하니 그 무슨 미친소린가 싶지만 말이다. 교과서에 실려있었다, 그렇게) 편지 쓸 내용을 머릿속에 정하고 초고를 쓴 다음 다시 정제하여 편지지에 옮기는 과정에 날 것의 감정은 모두 휘발된다. 그리고 잘 정돈된 마음과 그 내용만이 남게된다. 편지를 써서는 절대로 이런 내용을 말할 수 없다. 자기 검열에 걸릴테니까. 그 이후 등장한 이메일이라는 형태도 그리 다르지 않다. 심지어 이메일은 발신취소기능까지 존재하니까, "밤에 쓰는 편지" 라는 감정 과잉조차 자진 삭제가 가능하다. (물론 카카오톡에도 보낸 톡 삭제하기 기능이 존재합니다만, 이 소설이 출간된 2016년에는 그 기능이 없었습니다!!!) 카톡의 실시간 대화창에는 즉각적인 감정의 출렁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가능하다.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한밤중이 아니라면,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다면 하지 않았을 말들이 이 소설에서는 흥건하게 흘러넘친다. 카톡 대화창이라는 즉물적인 소통방법,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특성 탓에 (특성 덕에?) 내밀한 고백이 가능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것이다. 익명의 상대라는 것, 내가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고, 상대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물론 이름과 나이, 하는 일 정도는 알고 있지만 어느 회사에 다니는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는 모른다.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 있겠지만-그리고 결국 찾았지만- 굳이?) 내가 이 사람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내 주변에 가 닿지 않는다. 소설의 중간에 등장하는 말처럼 "소중하게 쓴 편지를 깨끗한 소주병에 담아 해운대 앞바다에 띄워보낸 병을 발견한"(p.165) 것에 불과하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발견한 것과 다르지 않은, 소문의 가능성이 없는 수다. 그렇기에 그녀들의 대화는 한층 대담하고 솔직해진다. 혈육에 대한 혐오, 부모에게 받은 학대에 대한 고백. 


이런 고백을 할 때 익명성이 사라진 주변 지인의 반응은 정확히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아무리 미워도, 낳아주신 분인데."(p.263) 이라는 것과 둘째는 "안쓰러워 웃으면서, 그런데 참 잘 컸네."(p.275)라는 것. 그 둘 어느것도 학대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사람에게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얼굴을 마주 댄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 이외의 반응을 보일 수가 없다. 마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건. 바로 이 지점에서 우연히 가 닿은  익명의 커넥트가 빛을 발한다. 기명을 벗어던진 두 사람은 익명에 기대어 사회적 동물로서의 예의 대신 공감과 위로를 서로에게 보일 수 있다. 


소설은 9년 간의 외사랑(짝사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을 하던 29살 여자가 결혼식을 하였으나 혼인신고 없이 헤어져 이혼녀라고 하기에도 미혼녀라고 하기에도 애매해 스스로를 이-미혼녀라고 칭하는 30초의 여자에게 의지하고 위로받으며 그 외사랑을 끝장내 버리는 이야기.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수미라고 해야겠다. 둘 다 아버지라는 남성에게 상처를 받았고, 사랑했던 남자에게 상처를 받아 상처 투성이가 된 여자다. 수미의 결심은 그들의 대화를 읽어가던 사람에게 그래, 라고 박수를 쳐 주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블랙 코미디 같던 결말. 스릴러 물이 아니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몇번이고 몇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고 수미야, 민정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라고 말하게 되는. 그딴 인간을 응징하자고 니들 인생이 망가지면 안되잖니,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니. 라고 말하게 되는 나는 결국 "아무리 미워도 낳아주신 분인데, 훗날 후회하면 어쩌려고. 니들이 얼마나 잘컸는데 그 노력을 망가트리지 마." 라고 말하는 하찮고 하찮은 지인에 불과한 인간이고. 


카톡 대화창을 열어 읽는 형식의 소설은 독특한 형식이고, 그 독특한 형식을 차용한 효과가 여실히 드러나 좋았지만, 응. 그래 그랬어. 별 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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