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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광우병을 말하다 - 최신 연구로 확인하는 인간광우병의 실체와 운명
유수민 지음 / 지안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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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초 톰의 친구인 제리스러운 별칭으로 호명되고 있는 대통령께서 한미fta를 성공시키려는 목적으로 미국 소에 대한 개방을 실행하셨다. 졸속 협상으로, 광우병에 대한 리스크를 너그럽게 떠안는 협상이었기에 국민들은 광분했고 거리로 나가 촛불공장들의 수익을 마구 올려 주었다. 그때부터 ‘소’, ‘광우병’등은 정치적 사안을 끌고 올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하사받게 되었다. 그 단어들을, 순수하게 생물학적이든 수의학적이든, 종목 자체에만 집중하더라도 그 결과물들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사안과 맞물리게 된 것이다. 그 단어들이 그러한 운명을 부여받고 반년이 지났다. 거리의 사람들은 ‘촛불공장들 도움 주기’에 관심이 없어졌고, 이순신장군님 동상 밑의 어여쁜 산성 또한 사라졌고, 집회도 집중적 대규모에서 분산적 소규모로 변하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 광우병 관련 서적 하나가 출간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나온 것이 잘되었다고 생각된다. 광우병 파동이 활성화였던 당시 많은 광우병 서적이 나왔지만, 사건의 중심에서 그 책들은 상대편에 대한 반박 도구로 소비되었다. 개인적으로 그 책들 속 광우병을 광우병으로 읽으려 해도 자꾸만 ‘대통령 개자식’으로 읽혔다. 격양된 감정이 많이 가라앉은 지금 광우병에 대해 차분히 다가가 이해한 다음 우리는 파동의 본질로 이동하면 된다. 워낙 과잉의 에너지를 쏟았기에 잠시 휴식기를 가져야 할 지금이 광우병에 대해 정리하가 수월한 시기다. 그런 지금 ‘과학이 광우병을 말하다’가 나왔다.




  책의 내용은 광우병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 다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발생원인, 감염과정, 경로, 진행되고 있는 실험, 발병 조건, 대책 등을 서술하고 있다. 책 속 광우병이 아닌 다른 곁가지들은 광우병의 이해에 대한 다른 각도의 시선이고, 결국 모든 포인트를 광우병에 맞추려 한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것처럼 정치적인 것에서 떨어져 과학적 사안에만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음이 보이기는 한다. 허나 과연 얼마나 정치적인 것과 멀어졌을까?




  책을 읽고 있으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책의 구성이 두 가지를 해체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광우병 파동 당시 과장된 정보이다. 광우병 파동 당시 과장된 정보를 해체하기 위해 책은 중요히 부각된 정보들을 하나하나 짚어서 과학적 근거를 되며 사실을 제시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사실들에는 ‘고열에도 변형CJD가 없어지지 않지만 위험도가 현저히 준다’, ‘산발성CJD 중 변형CJD가 있을 수도 있다. 허나 확실하진 않다’, ‘소의 근육 부위에도 변형 프레이온 단백질이 있긴 하다. 허나 다른 부위에 비해 극소량이다.’, ‘한국인 유전자의 특성인 M/M형의 변형CJD에 대한 위험도가 높은 건 사실이지만, 광우병에 저항성이 있다고 보이는 G/L형도 함께 있기에 안전할 수도 있다.’ 등이 있다. 해체하기 위해 노력하는 또 다른 하나는 전염 가능성이다. 책의 1부의 구성은 광우병을 일으키는 변형 프레이온 단백질과, 광우병이 대량으로 발생한 영국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고, 감염 가능성에 대한 해체는 1부 이후부터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함께한다. 1부 이외의 전염 가능성 해체를 위한 2부, 3부, 4부는 결론적으로 수치 놀이다. 광우병 소 섭취로 인한 감염률, 서양과 동양의 감염률, 종 간 장벽으로 인한 감염률, 조리 방법으로 인한 감염률, 개월 수에 따른 감염률, 예방 시스템 유무에 의한 감염률 등 수많은 수치들로 수놓아져 있다. 1부의 식인문화를 지닌 쿠루족의 자극적 사례로 시작해 위험성을 팽창한 책은, 이후 미세한 단위의 감염 확률로 위협적이던 광우병의 위신을 끌어내린다.




  자! 이 해체의 과정과 결과에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어찌되었든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과장된 괴담으로 알려진 것들이 근본적으로 사실에 근거하고, 눈 돌아가게 꼬아놓은 수치놀이의 결과 또한 감염 위험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결국, 광우병 사망자의 전부를 차지하는 M/M형 유전자를 보유한 한국인이 광우병 통제국의 30개월 미만 소의 등심을 고열에 구워 먹어도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CJD, BSE, RNA, TSE, 단백질 유일 가설, 코돈, 리보솜, 안티코돈, 겸상 적혈구 빈혈증, 메치오닌 등의 익숙하지 않은 용어의 숲을 지나 온 것이다.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의 숲은 다소 위험한데, 집중해 읽지 않는 이상 그 용어들의 숲에서 눈에 익숙한 단어만 끌어안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익숙한 단어들이란 결국 ‘안전하다’, ‘감염률이 내려간다’ 등이다. 그렇기에 이 익숙하지 않은 용어의 숲의 힘든 여정에서 핵심을 잃고, 결국 익숙한 단어들로 결론지어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에게 ‘감염 가능성이 있다’라는 불변의 진리와 함께 남은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굉장히 적은 확률’의 감염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광우병 파동 당시 유행한 로또 확률 비교설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보자. 감염 확률이 적으니 안심하고 먹으라는 것은, 로또 당첨 확률이 굉장히 적으니 안심하고 사지 말라는 논리와 같다. 어찌 되었든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누군가 당첨되어 인생역전을 하게 되고, 결국 누군가 감염되어 인생 역전을 하게 된다. 광우병 같은 경우, 사안 자체가 철저히 인재이기 때문에 굉장히 낮은 확률임에도 걸린 놈, 재수 없는 놈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위에 언급한 해체의 과정 속에 위험하게도, 확률 문제를 성립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비약하는 부분들이 몇 개가 있다. 이러한 것들이 위험한 까닭은, 저자가 위험도를 대폭 줄이기 위해 사용되는 가정들이기에 중요히 짚어야 할 듯싶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가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첫째, ‘CJD 질환 발병률이 동양인이 서양인에 비해서 더 높은지를 조사해보는 것이 합리적’이라하며, 조사 결과 M/M형이 동양인이 현격히 높음에도 CJD 감염률이 서양과 비슷한 추세임으로 변형 CJD에 대한 감염에 대해 크게 호들갑 떨 것 없다고 한다. 허나 이는 ‘동양인의 M/M형 분포가 서양인에 비해 현격히 높아 위험하다는 것’을 희석시키기 위한 비약이다. 이 전제가 비약인 이유는 동양인이 영국의 사례 같이 광우병 감염 위험도가 높은 조건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광우병이 걸린 다량의 소가 주위에 없고, 오염된 육골분 사료가 유통되지 않기에 한국인의 감염률이 낮다고 언급하면서, 서양과 동양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광우병 소가 없는 나라는 산발성 CJD가 없거나 극소수여야 하고, 소고기를 먹지 않는 나라에서는 산발성 CJD가 없거나 극소수이고, 결국 산발성 CJD가 발병한 나라는 광우병 소가 있고, 전 세계적으로 산발성 CJD가 발병했기에 광우병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만연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또한 논리적 비약이다. 이 비약이 등장하기 전 저자는 분명 산발성 CJD가 변형 CJD일 수도 있다는 가정은, 산발성 CJD라고 확진된 사례 중 오진이나 산발성 CJD로 보이지만 원인은 변형 프레이온 단백질에 의한 발병일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비약은 ‘모든’ 산발성 CJD가 ‘무조건’ 변형 CJD라는 전제하에 도출되는 것이기에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책의 후반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텍스트를 언급하는 장이 있다. 일병 한명을 위해 많은 이의 희생을 감수한다는 영화의 텍스트를 언급하며, 현재 광우병에 대한 조치가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것이다. 낯 뜨거운 예지만 남한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저자의 뜻대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텍스트가 적확히 맞아 떨어지기 위해선 외교적 압박 등에도 불구하고 광우병 소의 유입 가능성이 있는 미국산 소를 들여와 감염률을 높이는 것을 반대 했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조국은 많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반드시 지킨다는 본래의 영화 텍스트에 적합한 것이다. 허나 그 텍스트가 남한에선, 많은 희생을 감수한 것은 국민이고, 지켜낸 것은 ‘설치류’의 명예와 성과다. 그런 상황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끌고 오는 것은 스필버그 얼굴에 ET똥을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오인된 사실을 바로 잡으려 사투를 버리는 것이기에, 나도 흔히들 오해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광우병 파동이 일어난 핵심은 ‘개인의 성과를 위해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담보 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이 책의 불변의 진리가 ‘어찌되었든 결국 감염가능성이 있다’와 같은 광우병 파동의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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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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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이란 현재 남한에선 사람들의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와 있는 단어일 것이다. 아니 너무 가까이에 있어 그것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경쟁과 친숙하지 않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시점으로 보았을 때, 경쟁과 친하지 않다는 것은 게으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당연히 받아들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경쟁’이란 단어는 우리의 삶의 온갖 군데에서 패악을 부린다. 그 패악이 너무도 지독하기에 우리는 경쟁이란 단어를 구체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학교, 직장, 가정, 동호회 등 우리는 경쟁에 참여하고,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순위 매김 하여 가치를 측정했다. 그것은 경쟁의 수위가 적절할 때 당연한 듯 여겨졌지만, 한계로 내몰자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야만 했다.




  강수돌의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는 경쟁에 순응하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파고 드려한다. 책은 우리가 경쟁을 ‘당연시’여기며 무엇을 잃고 있는지, 경쟁에 순응함으로 어떠한 결과물들을 불러오는지 제시한다. 수많은 자료들에 열거된 현실은 이제는 많이 익숙하긴 하지만 여전히 씁쓸하고, 여전히 참혹하다. 시험이 옭아매어 경쟁에 순응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배우지 못하는 것들, 경쟁 체제에서 밀려나 실업자들과 그 경쟁체제에 참여하기 위해 발악하는 취업지망생들의 모습, 경제의 경쟁구도를 강화하는 기업의 폐악, 전 세계를 시장으로 환원하려는 신자유주의가 말살하는 국가들의 모습은 과장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계의 자화상이다. 책은 그러한 수많은 이미지들을 모자이크하여 우리 세계의 자화상을 그린다. 하지만 책은 그 모자이크의 투박함을 미학으로 승격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라는 야심찬 제목에도 불구하고 책 자체는 매우 앙상하다. 수많은 자료와 실증들과 학자들의 발언이 빼곡히 차있어 그만큼 신빙성이 높고, 상황이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허나 신빙성이 높아지고, 상황이 구체적으로 그려질수록 책의 저자의 존립은 희박해 진다. 수많은 자료들이 늘어져 있지만 그것을 응집해 하나의 그림을 만들지 못하고 재료만 나열한 꼴이 되어버렸다. 또 그 자료들이 내미는 것들이 여러 곳을 통해 유포되어 수용된, 눈에 잔뜩 익은 것들만이 주를 이루고 있기에, 그 가치가 발하는 빛은 한없이 약해진다. 그러한 자료들에서 강수돌이 목소리가 발언되는 곳은 한결같이 ‘자기개발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론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책의 응집력은 한 없이 떨어진다. 결국 이 책은 강수돌의 자료 정리집 수준에 머물고 만다. 야심찬 제목이 주던 기대감에 한참 못 미치는 결과이기에 못내 아쉽다.




  이 책에서 가장 기분 나쁜 대목은 저자의 어머니의 죽음을 회고하는 대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대목이 있어야할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암 투병 수기와 같은 역할을 하며, 감정을 자극할 뿐이다. 저자가 제시하던 원론적 제안 등과도 엇갈리는 이 대목은 이 책의 가장 한심한 부분이다. 무엇을 원한건가? 격양된 감정을 품고 책을 덮으며 책이 지닌 단점이 가려지길 바란 것일까? 이 대목으로 인해, 이 책을 통해 다음 책으로 옮겨질 첫 디딤돌 역할을 할 수도 없는 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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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삶이냐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3
에리히 프롬 지음, 정성환 옮김 / 홍신문화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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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큰 전제가 무엇일까? 바로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명제일 것이다. 이 명제로 인해 인간의 소유욕이 발생되고, 소유하기 위해 자본을 축적하려하고, 그 자본 축적을 원활히 하기위해 시장을 만든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를 해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 해체의 과정은 문명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 역사 속 추앙받던 철학자와 종교인들의 말을 빌리며 우리가 왜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와 싸워야만 하는지 증명을 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는 본능에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본능이라고 여겨지기에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 명제를 반박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다른 본능이 제시되어야만 쉽사리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내세운 시장주의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시스템을 위한 것이라고, 프롬은 반박한다. 허나 시장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명제에 대한 대응책을 이성에 호소하고 있기에 다소 막막하게 느껴진다. 기독교, 힌두교, 유대교, 불교 등의 종교의 본래 정신을 내세우고, 철학의 역사상 수없이 반복된 텍스트를 내민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성에 호소하지 본능에 호소하지 못한다. 이성에 대한 호소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본능이라고 명해진 명제에 반박하기에, 프롬이 제시하는 것들이 너무 뭉뚱그려져 우리의 삶에 닿지 않는다. 프롬이 제시한 것들은 그 자체로 굉장히 의미 있고, 인간의 역사가 오랫동안 이기심에 맞서려 했음을 제시하며,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에 균열을 가하긴 하지만 그 균열을 해체할 파괴력을 지니지 않고 있는 것이다. 너무 절대적인 윤리를 내세우고, 그 뿌리들이 관념 속에서 박혀 있다. 그렇기에 프롬이 제안한 것들이 실현되기 위해 절제된 삶의 태도를 전제해야만 한다. 욕망에 의해 행동할 것에 길들여진 산업사회의 인간들에게는 단지 참고할만한 윤리적 사항일 뿐이다.




  프롬이 제시하는 대안들 중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있다. 소비를 국가에 맡겨 건전한 소비만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국가가 방임하여 시장의 활성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저 대안의 문제점은 윤리적 선택을 국가 권력에게 맡김으로 생길 위험성을 전혀 생각지 않고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에 그렇게 큰 선택을 내맡김으로 위험이 도래하면, 책 속에서 제시한 문제들이 가면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좋은 뜻으로 그러한 선택이 행해지더라도, 거시적 윤리를 내세우며 개인을 압박하는 꼴이 된다. ‘건전 소비를 국가 권력으로 다스리자’라는 대안은 이 책의 가장 큰 모순이며, 위험한 부분일 것이다.




  관념 속에 뿌리 두고 있어 막연하긴 하지만, 책 속 많은 견해들은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그것들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볼 기회와 시간을 준다. 이 책의 의미와 가치는 거기서 나올 것이다. 인간 자체를 물화하고, 인격을 상실하며, 인간 자체보다 이데올로기의 메카니즘만을 남기고, 소비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의 자아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 등은 책이 출간이 된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곱씹어 볼만한 상항이다. 또 그것들이 아직도 피부로 와 닿는 문제라는 사실이 씁쓸함을 만들기도 한다.




ps.  책을 사둔지 꽤 되었음에도 ‘소유냐 존재냐’란 거창한 제목 때문에 함부로 손 될 엄두를 두지 못하였다. 지레짐작 집어먹은 겁에 비해 책은 다소 말랑하게 구성되어 있다. 굳이 인상 써가며 읽을 부분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프트하게 책이 나온 되는 아무리 생각해도 번역자인 ‘차경아’ 교수의 번역 때문인 듯하다. 인문학서는 자칫 난해한 번역으로 원문을 잔뜩 꼬아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차경아’ 교수의 번역에선 그런 군더더기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말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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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6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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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조직이 대의를 내세우며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을 굉장히 혐오한다. 함께 행복하고, 개인의 욕심에 의해 다수가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선 대의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허나 그런 뜻으로 사람을 모아 조직을 만들고 난 뒤, 조직 속 개개인은 사라지고, 조직과 대의만 남아 희생을 요하는 상황은 끔찍할 뿐이다. 대의에 함몰당해 대의의 가치에 대해 열 번을 토하는 놈들도 끔찍하다. 이러한 상황들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기에 굉장히 혐오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혐오스러운 상황이 점점 내 주변에 자주 돌출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나인지라, 주변에 있는 친구들 대다수가 군대에 복무 중이거나 제대를 한 상황이다. 그런 친구들이 휴가나 제대 후 국방의 의무니, 국가를 위한 헌신이니, 남자라면 군대 등의 말을 내뱉을 때의 스트레스란 여간한 것이 아니다. 군 내부의 폭력은 내무반 속 남자들의 의리로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군인이란 것의 본질을 미화시키는 모양이다. 몇몇의 친구들이 애국반공마초로 변한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럽다. 이렇게 대의에 함몰 당했거나 대의를 따를 것을 요하는 친구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그들의 주댕이를 한방에 닥치게 할 만한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들이 내뱉는 숭고한 것들이 얼마나 허접한지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프고, 서로 얼굴 붉힐 일만 생기곤 했다. 이제 그런 걱정이 많이 줄었다. 드디어 그들을 한방에 보낼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난 이제 그들과 입 아프게 언성 높일 필요 없이 책 한권을 던져주며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키며 ‘꺼져’를 외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상황은 정리 될 것이다. 그리도 위대한 책은 바로 조지프 헬러의 ‘catch-22’다.

  ‘catch-22’는 이탈리아 해안의 피아노사란 섬에서 복무하는 미 공군 폭격수 요사리안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catch-22'는 미친놈의 이야기인데, 소설 속 인물들이 확고히 인정하는 미친놈은 요사리안뿐이다. 요사리안을 미친놈 취급하는 소설 속 인물들을 잠깐 설명하자면, 야한 사진을 찍기 위해 설치지만 영원히 찍지 못하는 놈, 걸리지도 않은 폐렴을 치료 안하고 죽겠다는 놈, 군목이면서 죄악을 저지를 때마다 기분이 좋은 놈, 목표물 폭격은 상관없이 탄착점 패턴만 예쁘길 바라는 놈, 7센트를 주고 산 달걀을 5센트를 받고 팔아 이윤을 보는 놈, 강간한 창녀를 창문으로 던져 죽이고 죄의식 없이 낄낄되는 놈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한 놈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소설 속에 이것보다 더하거나 덜하거나 비슷한 놈들이 한 가득이다. 분명한건 이런 놈들이 소설 속에서 정상인 취급을 받는다는 거다. 또 분명한건 저것들이 죄다 미친놈이고, 저런 미친놈들이 소설 속 온갖 사건을 일으키고, 그 미친놈들이 일으킨 사건들은 얽히고 연쇄되어 다른 미친 상황을 만든다. 앞서 언급했듯 소설 속 수많은 미친놈들은 요사리안을 미친놈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정상인 요사리안이 미친놈들 사이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수많은 미친놈들이 정상인인 우리의 주인공 요사리안을 미친놈 취급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소설이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미친놈들은 전쟁 속 질서, 군대 속 질서로 보았을 때는 지극히 정상이다. 이 말은, 전쟁과 군대 속에서 질서에 순응하는 놈들은 미친놈이란 말이기도 하다. 소설 속 미친놈들은 너무도 진지하게 군대와 전쟁 속 질서에 복종하고 행동하기에 우리의 웃음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함몰시킨 질서를, 그 질서 안에서만 합리적인 대의를 질서 밖의 사람들에게 강요할 때, 그걸 보고 웃지 않기란 힘들다. 온갖 부조리한 명령에도 상하복종이 완벽하고, 국가를 위해, 선임들을 위해 목숨 받쳐 죽으려 발광하고, 쓸데없는 열병식에서 한 동작도 틀리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광경은 끔찍하거나 우스울 뿐이다. 한껏 인상을 Tm고 근엄한 척을 해도, 그것들의 본질이 지니고 있는 부조리함은 지울 수 없다. 'catch-22'에선 우리가 숭고하다고 여기고, 질서라고 여긴 것들이 종이 한 장 정도의 가벼운 차이로 폭소를 자아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온갖 미친놈들이 과격한 소꿉장난을 버리며 일으키는 부조리극은 초중반에 몰려있다. 소설의 초중반은 5분에 한 번씩 폭소를 터뜨릴 수 있다. 하지만 너무도 아둔하고 부조리하여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는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후반부에 들어설수록 우리는 그 웃음 또한 고민하게 된다. 우리가 비웃고 조롱한 상황들이 끔찍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참혹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것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미련한 소설 속 인물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그것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헤친다. 얼마나 손쉽고 간단하게 내부의 희생자를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군인들의 자의적 희생을 만들어 내고, 군 상층부의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지 등을 들어낸다. 소설은 숭고한 대상을 인지시키고, 그것을 차분히 해체해 나간다. 전쟁과 군대에서 멈추지 않고 이데올로기에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얼마나 등신 같은 짓인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 실체란 것이 ‘자신이 미친놈임을 아는 미친놈은 미친놈이 아니기에 귀국할 수 없다.’란 소설의 제목인 ‘catch-22’만큼 부조리한 것임을 들어낸다. 너무도 아이러니하고 통쾌하게 그것을 입증시키는 대목이 있는데,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함축하는 말을 매음굴을 관리하는 노인의 입을 빌린다.

  “국가가 뭐지? 국가는 흔히 인위적인 경계선으로 사방을 둘러싼 땅 덩어리에 지니지 않아. 영국 사람들은 영국을 위해 죽고, 미국 사람들은 미국을 위해 죽고, 독일 사람들은 독일을 위해 죽고, 러시아 사람은 러시아를 위해 죽지. 지금 전쟁에서 싸우는 나라의 숫자는 쉰이나 예순쯤 되지,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모두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분명히 거짓말이야 ...(중략)... 그리고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할 가치가 있지”

  개인적으로 소설 속에서 가장 빛났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마일로에 관한 것이었다. 마일로는 전시 상황에서 신디케이트를 통해 기업을 운영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거래하는 곳마다 시장이 되고 후작이 되는 등 권력 층 꼭대기에 자리 잡게 된다. 적과 아군 가리지 않고 거래하며 권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마일로는 그 자체로 전쟁의 속성을 들어내고, 자본가가 얼마나 흉폭할 수 있는지 들어낸다. 바로 2차대전에서 미국이 전쟁을 통해 돈 맛을 보는 속성을 들어내고, 그 전쟁에서 자본가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들어내는 것이다. 마일로가 주창하는 시장의 자유, 그 자유를 통해 활성화 된 시장이 경제적 이익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 이익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라며 포장되고, 애국의 상징이 된다. 이것이 마일로가 이익 창출을 위해 자국 부대를 자신의 기업이 소유한 폭격기로 폭격하고도 추앙 받는 대의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 사는 우리는 이런 식의 포장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정부 측 발언, ‘경제 활성화’와 ‘애국이란 이데올로기’를 조합한 기업들의 쇼비니즘 광고 등을 통해 쉽게 봐 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들어내는 마일로의 말이 있다.

“우린 국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돈은 우리가 간직하고, 중간 과정은 생략할 수 있죠. 솔직히 얘기해서 전 정부가 전쟁에서 손을 떼고 그 일을 전부 개인 기업에 맡겼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가진 돈을 모두 정부에 지불한다면, 그것을 즉 자기편 장병과 비행기를 스스로 폭격하는 개인들의 기를 꺽고 정부만 옹호하는 샘이 됩니다. 우린 그들의 보상을 박탈하게 되는 셈이죠.”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마일로에게 악의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충실히 시장이 이끄는 질서에 자신의 머리와 행동을 맡겼을 뿐이다.

  이런 부조리와 부조리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을 담고 있는 소설은 다소 특이한 구성을 담고 있다. 예를 들자면, 간혹 인물들의 대화는 말의 주인이 표시가 되지 않아 누가 말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되는 상황, 한 문단 속 공간과 시간이 별다른 표시 없이 쉼 없이 바뀌고, 대화 도중 쉼 없이 바뀐 시간과 공간으로 답변자가 바뀌는 경우 등이다. 이러한 공간, 시간, 발언자, 답변자가 쉼 없이, 그리고 갑작스레 바뀌는 구성은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공간, 시간, 인간으로 촘촘히 엮어내게 된다. 그렇게 하여 응축된 것들은 부조리한 혼동, 그 자체를 들어낸다. 어느 장소에서, 어떤 시간에, 누가 말하던 전쟁과 군대 속에선 죄다 미친 상황과 미친놈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전쟁이란 것이, 군대란 것이, 대의에 목숨 거는 것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미친 짓인지 들어내는 것이다.

  'catch-22'는 내가 본 반전 소설 중 가장 유쾌하고, 적나라하고, 슬프고, 참혹하며, 끔찍하고, 위대한 소설 중 하나다. 조지프 헬러는 소설 속 오르처럼 치밀하고 명랑하며 적나라하게 전쟁을 분해하고, 그 전쟁을 포장하는 이데올로기를 해체 했기에, 소설을 읽고 남는 것은 감탄뿐이다. 이제 한없이 진지하게 구는 그 수많은 전쟁영화를 어떻게 감동하며 볼 것인가? 죄다 ‘지옥의 영웅들’, ‘닥터 스레인지러브’, ‘철십자 훈장’처럼 보일 것 같아 걱정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흙먼지 뒤집어쓰고 폼을 잡아 멋있는 척하는 영화들이 얼마나 부조리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요사리안이 오르의 진실을 깨닫기 전, 자신을 강박적으로 괴롭히던 스노든과의 참혹한 기억이 갖고 있는 진리를 밝히는 글로, 이 글을 맺는다.

“그의 창자가 전하는 뜻은 이해하기는 간단했다. 인간이란 물질이다. 이것이 스노든의 비밀이다. 창문에 던지면 그는 떨어지리라. 불을 붙이면 그는 타버리리라. 그를 묻어 버리면 그는 다른 쓰레기나 마찬가지로 썩으리라. 영혼이 사라지면 인간은 쓰레기다. 그것이 스노든의 비밀이었다. 모두가 곪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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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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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이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아니 체감한 것으로만 따지면 어찌나 긴지 가늠하기 힘들다. 지난 시간들을 정리하려 머리를 굴리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소고기 파동, 촛불, 물대포, 비정규직, 부동산 투기, 사채, 재개발, 낙하산, 유해도서 등 온갖 이미지들이 쏟아져 내리는 시간을 쉽게 정리하기 힘들다. 그 지난 시간에 대해 공안정국이란 별명을 붙이고 당선자에게 쥐새끼 등의 별명이 붙었다. 한나라당이나 자유선진당 등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쳤지만, 대선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은 40년은 족히 지난 것만 같다. 아 그 길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 속 광경은 결국 쑥대밭이다. 말 그대로 괴물 한 마리가 탄생되어 남한을 한껏 짓밟아 놓은 것만 같다. 쿵쾅! 쿵쾅!

  솔직히 최근까지 삐쳐있었다. 그 끔찍한 스펙터클의 시간을, 그 시간을 이루어낸 장로 대통령을 국민들이 원해 뽑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번에 호되게 당해봐라’를 곱씹었지만 그러한 원한은 결국 부질없는 것임이 곧 들어났다. 이번 대선의 결과는 남한 사람이 극한의 이기적이고 악랄한 놈들 투성이라서 생긴 것이 아닌 구조 문제였다. 결국 또 그놈이 문제였다. 그러한 구조 속 명박 경제는 기류였고, 질서였고, 대의였다. ‘이기적’의 척도로 따졌을 때 현 기류상 ‘경제만 살려라’가 행복 찾기의 유일한 척도였다. 누굴 원망하리. 지금 생각해도 ‘경제만 살려라’아니 ‘경제만 살아라’는 무지몽매한 선택일 뿐이다. 그러한 아둔한 선택의 원인을 주변에서 주어보고 들은바, 한국민이 부자를 좋아해서란 말과 한국민의 계급적 이해도가 어리석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개인적으로 후자의 견해가 적확하다 생각되고 눈에 좋고 귀에 좋다. 투표자 대부분이 자신의 계급을 올림해서 가늠했기에 그 터무니없는, 소수를 위한 공약이 자신의 것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전부 중산층은 되는지 알았던 모양이다. 그로인해 집 없는 사람이 뉴타운 공약에 만만세를 외쳤다. 집 떨어져라라고 빈 주문보다 허무맹랑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집 잃고 가게 잃고 패인 주름을 더 패가며 넋을 잃어도 현재의 지옥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소망교회에 가서 하느님의 시험이라 자위해도 현실은 지옥일 뿐인 것이다.

  지옥 속 우리는 원망의 대상을 찾게 되고 그 대상을 찾아 온갖 미움을 쏟아 부으며 안도를 맛본다. 그런 원망의 대상은 개인일수록 빛을 발한다. 하지만 IMF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김대중 혹은 탄핵 돌파 후 무서울게 없는 노무현의 성장에 대한 꿈을 위한 FTA 등 개인의 오인된 선택으로 ‘괴물의 탄생’을 마련한 것 같지 않다. 또 이명박이 태생 자체가 괴물 같은 놈이라 지금의 지옥을 만든 것 같진 않다. 우석훈 박사의 ‘괴물의 탄생’의 말미 주목할 만한 말이 나온다.


“한국 경제는 설날 덕담으로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던 바로 그 1990년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순간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가 ‘괴물의 탄생’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부자 되란 말인 즉 행복하게 살라는 말일 것이다. 허나 부자 되란 말에서 행복하란 말을 찾아야 했을 때, 부자가 행복하기 위한 하나의 척도가 아닌 절대적 조건으로 자리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부자 되세요’의 폐해를 지적하는 우석훈의 말이 김정은을 때려 죽여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명박 역시 때려 죽여야 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명박이 다소 멍청하고, 다소 악질적이고, 심할 정도로 유머감각이 없지만 그가 괴물의 실체는 아니다. 괴물의 실체는 우리에게 있다. 땅값을 따지고 올리기 위해 발악하고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부자 되세요’를 덕담으로 씹어 뱉은 우리가 괴물인 것이다.

  우석훈 박사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 마지막 권인 ‘괴물의 탄생’은 괴물이 탄생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찾고 탄생의 순간을 추적하여 해체에 대한 방법을 제안한다. 1부에선 세계 경제의 흐름과 경제이론의 역사적 변화를 짚어 본다. 그 과정 속 경제를 신봉하는 한국에서의 경제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꼬마들도 경제란 단어를 입에 담는 남한의 경제학 수준은, 순수이론가는 거의 전멸하였고 ‘배운 대로 응용’하고 ‘단순 (이론)수입’을 하는 학자들이 한국을 채워버린 현실을 맞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국 경제학자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전문가’임을 내세우며 실속을 차지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아 자랑스러운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여. 그러한 ‘단순 수입형’ 학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은 기존 이론들을 한국 실정에 맞게 변화 대입 시키는 것이 아닌, 단순 대입과 오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 캐인즈 등의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증발한 체 문장과 공식만 남아 오독되고 잘못 알려져 왔다. 특히 한국에서 내세우는 애덤 스미스는 악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시장주의는 현 한국에서 말하는 시장주의와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쉽게 말해 현 한국에서 말하는 시장주의란 5% 남짓의 상위 계층의 사람과 시장만이 남는 시장주의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는 국부론을 읽어만 보아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에 악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괴물의 탄생’ 속 우리가 오독, 악용하는 애덤 스미스란 이름이 갖는 가치와 진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는 말이 있다.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위대한 건, 그 전 2세기 동안 지배적이던 중상주의를 깬 것도 있지만 국민 경제 프레임을 개괄한 것도 있다. 중세를 지배하던 ‘귀족’들을 ‘지주’라는 이름으로 격하시켰고, 농노에서 노동자로 새로운 시민이 될 사람에게는 ‘임금’이라는 장치로 그들이 움직일 공간을 마련해 주고, 20세기 내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기업들을 향해 ‘견제’란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조율한 정부의 위상을 조세와 무역, 국방 등 활동을 통해서 중요한 조정자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조율할 정부의 위상을 조세와 무역, 국방 등 활동을 통해서 중요한 조정자로 올려놓은 것이다.”

이것이 모든 걸 증발 시킨 채 ‘시장주의 창시자’로 불리던 애덤 스미스의 가치다. 이렇게 1부는 한국 경제학의 수준과 한국 학자들이 오독 악용한 순수이론과 이론자들을 반추해보며 지금의 한국 경제란 것이 얼마나 앙상하고 잔혹한지를 들어내고 있다.

 

  2부의 초기는 신화의 파괴로 구성되어 있고, 후기는 신화 위에 건축된 한국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로인한 붕괴에 대한 시나리오로 구성되어 있다. 2부 초기의 신화 파괴에서 지칭하는 신화란 한국의 우익이 설파하는 ‘잃어버린 10년’ 전을 뜻한다. 그 잃어버린 10년 전의 신화의 파괴는 대통령들의 실체와 지금 추억하는 것만큼 그 시절의 자본주의가 (지금에 비해) 흉폭 하지 않다는 것을 들어낸다. 한국 근대화의 신화로 불리는 박정희 정권이 1974년 석유파동을 맞으며, 유가 상승과 부동산 투기로 인해 한국 경제는 점차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빠져들고 2차 석유파동까지 겪게 된다. 그로인해 고용불안이 생기고 물가 불안이 생기면서 국민경제의 안정성이란 말은 민망하게 되었다. 그로한 국민경제의 불안은 결국 박정희 정권을 전복 시키고 ‘그 시절 먹고 살기 좋았다’란 신화가 갖는 실체란 이런 것이다.  기업을 철저히 국가에 귀속시키고 수익에 대한 분배와 적극적 국책 사업 등 반공을 외치면서도 정권성격이 굉장히 사회주의적인 것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 번째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집중적으로 다뤘듯이 한국의 진보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신화 또한 파괴한다. 미국 경제조차 붕괴 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김대중이고 완전히 본격화 한 것이 노무현이다. 특히 노무현은 MB전 한국 역대 정권상 가장 건설자본에 기대어 있었다는 것을 들어내고 임기 당시 시행한 새만금은 노무현 정권의 진가를 들어내는 표상이다. 또 역대 대통령 중 기업에 가장 많은 권력을 실어 준 것 또한 노무현임이 들어난다. 그리고 한국 보수에서 잃어버린 10년 전에 대해 설파하면서, 그 당시에 비해 굉장히 악랄한 자본주의를 펼친다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심화되는 사교육과 건설 자본을 위한 환경 파괴는, 박정희 정권 당시 제정된 그린벨트와 전두환 정권 당시 사교육 금지 증에서 볼 수 있듯 굉장히 아둔한 선택과 악질적 행태임을 들어낸다. 재미있는 점은 박정희의 정치 운용이 굉장히 사회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2부 초기는 역대 대통령과 정권을 되짚어 보며 그들의 선택과 그들에 대한 재평가와 그러한 과정 속 발전해 나간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2부 후기는 앞서 말했듯 한국 자본주의가 같는 폐해와 그 폐해로 인해 맞게 될 붕괴에 대한 시나리오로 구성되어 있다. 노무현 정권 당시 적극적인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기업에 대한 국가의 귀속으로 인해 사법권마저 기업에 무릎 꿇게 되는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압축 성장으로 생겨난 중앙형 시스템과 지방 토호 등이 얽힌 건설 자본의 패악과 만나 시너지를 발휘하게 된다. 단기간 압축으로 인해 시장의 활성화가 가장 극심한 서울로 인구가 몰리게 된다. 농촌에서 빠져나온 인구가 전국으로 분산되지 못하고 수도로 유입되며 국가가 맞는 위험에 대한 버퍼들이 미약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방의 힘이 미약해지고 그 미약한 곳을 중앙 토호와 지방 토호의 투기의 장으로 탈바꿈 시키게 된다. 제주도만 해도 60% 면적이 외부인 소유로 되어 있는 현실을 맞게 된것이다. 저자는 그런 투기의 폐해가 극한으로 달리지 않는 건, 헌법121조가 지닌 경자유전이 간신히 막고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상황이 코앞에 와 있는 것이다. 한국자본주의가 갖는 가장 큰 단점은 역시 건설만능주의다. 이게 마약과 같아서 위태로울 때마다 맞고 성장률을 부흥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명박이 대운하에 집착하는 이유는 노무현이 새만금을 시행해서 본 효과를 뻔히 알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을 담당한 대책 모두 건설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그린벨트는 갈수록 좀먹고 희미하나마 재 역할을 한 종부세 등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건설만능주의의 끝은 무엇일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일본의 헤이세공황만 봐도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건설은 한국 자본주의가 가진 가장 큰 단점이지만 그 건설이란 것이 생존해 있는 것은 투기에 동참하고 동의하고 경제 성장‘률’이 주는 쾌감에 안심하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 살 깎아 먹는 행위는 중산층을 증발시켰고 극심한 양극화를 부르게 된다. 8자형 경제 구조가 도래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한 중남미형 경제로 향하는 행렬 속 극심한 경제난으로 증오를 쏟아 부을 대상을 찾게 되고 그로인해 파시즘을 부를 것이라는게 저자의 붕괴 시나리오다. 그러한 붕괴 전 괴물의 탄생을 마련한 대상은 우리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하고 우리가 전환해야 괴물은 해체될 것이다. 3장은 우리의 전환을 통한 괴물의 해체에 대해 다룬다.

  3부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괴물의 해체에 대해 헌급한다. 경제를 위해 희생시키는 가치들에 대해 설파하고 그를 통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 인식의 전환이란 ‘부자 되세요’가 ‘행복 하세요’로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3부에서 다루는 대안들 중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띄는 건 ‘제3부문’에 대한 언급이다. 제3부문은 GDP 4만불에 넘거나 도달한 선진국에서 꼭 찾을 수 있는 점임을 지적하며, 저자가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3부문은 공공부문과 기업, 2부문으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진 국민경제의 다른 한 축이다. 저자는 ‘사회적 경제’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예를 들자면 생협이나 사회적 기업 등이 제3부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제3부문의 특징은 단순히 소득 창출이 최우선에 놓여 있던 경제 행위에서 조금은 탈피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제3부문에 마에스트로나 생협 등 과다 생산 체계와는 맞지 않은, 조금 느리고 생산률이 더뎌도 자연적이고 좀더 인간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GDP가 4만불이 넘은 나라에선 항상 목격되는 모습인데, 저자는 이것이 국가 경제 위기에 범퍼 역할을 하며 위기를 줄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일본의 ‘헤이세 공황’ 속 일본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지방에 잘 구축된 생협 덕분이라고 지적한다. 미친 듯 가속화되는 시장주의의 마지막 종착점이 중남미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사람이 살만한 경제를 획득하기 위한 비결이 제3부문이라는 것이다. 조금은 감상적인 견해일지 모르나 제3부문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조금은 더 사람을 위해 가동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3부에서 좀더 사람답게 살기 위한 인식이 무엇인지 설파하고 경제에 종속되는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며 제3부문이 보여주는 작은 희망의 가치를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대안은 공론의 장에서 나온 작은 주장에 불과하며 그 다음은 독자들이 꾸리길 희망하고 있다.

  ‘괴물의 탄생’에서 굵직굵직하게 짚고 넘어간 경제사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등은 문장들 사이사이 공백의 공간을 지니고 있다. 저자가 다음을 독자에게 맡겼듯 그 공백들 또한 우리가 채워야 할 것이다. 생각할 거리를 남겨둔 것이 말할수도 있고 앙상한 것이라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저자의 이러한 구성이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경제를 쉼 없이 외치고 경제가 향해야 할 길을 진지하게 고민한 학자들을 오독하며 저지를 아둔한 선택들은 그 공백을 채워가며 지우고 새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공백들이 꼭 경제학만이 체워야 할 것은 아니라 생각되는데, 존재하는 문장들과 공백의 자리가 지향하는 문장의 가치란 매 한가지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알게 되어 ‘부자 되세요’란 말을 덕담인양 내뱉는 것이 염치없는 행동임을 알 때를 저자는 바라고 있다. 

  ‘괴물의 탄생은’ 평소 곱씹으며 생각하던 것들과 겹치고 합일되고 저자의 전작과 블로그를 애독한 결과 완전히 새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자신이 3류임을 자처하는 한 경제학자의 눈으로 진심을 다해 인간을 위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감동을 연장하기 위해 소시민의 삶과 투쟁이 점점 가까워지는 참혹한 세상에 감동을 안겨준 이 책의 마지막 문구를 되새기고 싶다.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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