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삶이냐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3
에리히 프롬 지음, 정성환 옮김 / 홍신문화사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큰 전제가 무엇일까? 바로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명제일 것이다. 이 명제로 인해 인간의 소유욕이 발생되고, 소유하기 위해 자본을 축적하려하고, 그 자본 축적을 원활히 하기위해 시장을 만든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를 해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 해체의 과정은 문명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 역사 속 추앙받던 철학자와 종교인들의 말을 빌리며 우리가 왜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와 싸워야만 하는지 증명을 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는 본능에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본능이라고 여겨지기에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 명제를 반박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다른 본능이 제시되어야만 쉽사리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내세운 시장주의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시스템을 위한 것이라고, 프롬은 반박한다. 허나 시장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명제에 대한 대응책을 이성에 호소하고 있기에 다소 막막하게 느껴진다. 기독교, 힌두교, 유대교, 불교 등의 종교의 본래 정신을 내세우고, 철학의 역사상 수없이 반복된 텍스트를 내민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성에 호소하지 본능에 호소하지 못한다. 이성에 대한 호소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본능이라고 명해진 명제에 반박하기에, 프롬이 제시하는 것들이 너무 뭉뚱그려져 우리의 삶에 닿지 않는다. 프롬이 제시한 것들은 그 자체로 굉장히 의미 있고, 인간의 역사가 오랫동안 이기심에 맞서려 했음을 제시하며,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에 균열을 가하긴 하지만 그 균열을 해체할 파괴력을 지니지 않고 있는 것이다. 너무 절대적인 윤리를 내세우고, 그 뿌리들이 관념 속에서 박혀 있다. 그렇기에 프롬이 제안한 것들이 실현되기 위해 절제된 삶의 태도를 전제해야만 한다. 욕망에 의해 행동할 것에 길들여진 산업사회의 인간들에게는 단지 참고할만한 윤리적 사항일 뿐이다.




  프롬이 제시하는 대안들 중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있다. 소비를 국가에 맡겨 건전한 소비만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국가가 방임하여 시장의 활성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저 대안의 문제점은 윤리적 선택을 국가 권력에게 맡김으로 생길 위험성을 전혀 생각지 않고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에 그렇게 큰 선택을 내맡김으로 위험이 도래하면, 책 속에서 제시한 문제들이 가면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좋은 뜻으로 그러한 선택이 행해지더라도, 거시적 윤리를 내세우며 개인을 압박하는 꼴이 된다. ‘건전 소비를 국가 권력으로 다스리자’라는 대안은 이 책의 가장 큰 모순이며, 위험한 부분일 것이다.




  관념 속에 뿌리 두고 있어 막연하긴 하지만, 책 속 많은 견해들은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그것들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볼 기회와 시간을 준다. 이 책의 의미와 가치는 거기서 나올 것이다. 인간 자체를 물화하고, 인격을 상실하며, 인간 자체보다 이데올로기의 메카니즘만을 남기고, 소비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의 자아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 등은 책이 출간이 된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곱씹어 볼만한 상항이다. 또 그것들이 아직도 피부로 와 닿는 문제라는 사실이 씁쓸함을 만들기도 한다.




ps.  책을 사둔지 꽤 되었음에도 ‘소유냐 존재냐’란 거창한 제목 때문에 함부로 손 될 엄두를 두지 못하였다. 지레짐작 집어먹은 겁에 비해 책은 다소 말랑하게 구성되어 있다. 굳이 인상 써가며 읽을 부분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프트하게 책이 나온 되는 아무리 생각해도 번역자인 ‘차경아’ 교수의 번역 때문인 듯하다. 인문학서는 자칫 난해한 번역으로 원문을 잔뜩 꼬아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차경아’ 교수의 번역에선 그런 군더더기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말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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