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OhY > 날짜:2002/03/25 20:47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은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지우 詩 늙어가는 아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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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죠?
전 끌리오에 이런 따뜻함이 넘쳤음 좋겠네요

그냥 눈에 띄더라구요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행복할꺼란 생각이 듭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첨 읽고 나니..그 느낌은
시는 좋은데 좀 느끼한 것도 같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스쳐가듯 한번쯤 눈에 익혀두면 나쁘지 않은 시임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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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님의 페이퍼 <날짜:2002/03/25 20:4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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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4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ika 2004-04-04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도 좋군요..이 시는
"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


김여흔 2004-04-04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다시 황지우 시집을 꺼내 보게 됐어요.
20대 초반에 마련해 두었던 시집이었는데,
그때는 시인의 그 맘을 다 헤아리지 못했는데 이제사 ...
철이 드나보네요.

2004-04-04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04-04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전 이시 첨 읽어 봐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에게
"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라는 부분.......참 좋네요...

이런 게 사랑이군요......역시 어려운 것입니다......



김여흔 2004-04-04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이어요, 냉열사님. ^^

2004-04-04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4-04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4-0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4-04-0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어요. 사랑한다는 말, 잘 못해요. 최선을 다해 그대와 더불어 늙어가서, 그때나 돼서 서로의 힘없는 눈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말일 거란거죠. 그래서 '사랑은'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어마무지한 말일 거에요. 충실히 살아낸 후 낮지만 자신있는 어조로 말할 수 있기를...

김여흔 2004-04-04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

OhY 2004-04-0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집중해서 읽어보았답니다. 소박한 관심과 정이 얼마나 큰 행복의 큰 힘인지 다시 생각나게 하네요..^^

김여흔 2004-04-0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덕이 아니구요, 님 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