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 김진석을 알게 된 건 21세기 초입이다. 당시 나는 계간지 <당대비평>(삼인)과 <사회비평>(나남) 을 보고 있었다. 두 계간지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국 사회의 현실 문제와 담론 공간에 개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당대비평>은 탈근대적 지평 위에 있었고 <사회비평>은 근대적 지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평가는 그 잡지의 전체 성격과 필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뉘앙스를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당대비평>에는 편집위원으로 권혁범,임지현,문부식 등이 있었고, <사회비평>에는 김진석이 편집주간이었다. (김진석은 현재 <황해문화> 편집위원으로 있다.) 당시 내가 이 두 계간지에 관심을 갖게 된것은 임지현 교수가 제기한 '일상적 파시즘론'을 두고 이 두 잡지가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각기 지면을 통해 비판과 반비판이 이어졌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에서도 김진석은 '미시 파시즘론 비판'이란 형태로 이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 한다. '파시즘'이란 것은 20세기 정치에 나타난 매우 흥미로운 정치현상이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하에서 '유사파시즘'을 경험한 우리에게는 '반복의 우려'라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늘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임지현 교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을 통해 '미시 파시즘' 문제를 세간에 부각시켰다. 임지현의 이 책은 미디어의 관심을 받으며 인문서 중에서도 꽤나 대중적으로 읽힌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일상적 파시즘론'이 더듬어낸 한국 사회의 진단에 크게 공감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일까? 이런 생각의 와중에 <사회비평>의 글들은 내게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공감에 비판적 횡선을 그을 수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파시즘'을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방식에- 그 의미의 확장을 이해하고 그 문제 의식도 공유하지만- 주의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거기에는 김진석 교수가 과거 <사회비평>에서, 그리고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하는 '미시 파시즘 비판'에서 받은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다.  

김진석의 이야기를 하다가 '미시 파시즘론'부터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데, 일단 간략하게 마무리는 해야겠다. 김진석은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은 들뢰즈.가타리의 '미시파시즘론'이 갖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저작 <앙띠 오이디푸스>가 '일상적파시즘','미시파시즘'의 수원지가 되는 셈이다. 들뢰즈주의자들의 비판과 반비판이 그 동안 많이 일어났던 문제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이 책에 나타난 김진석의 주장만 요약하자면 '미시 파시즘론'은 근본주의의 위험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즉 '삶은 미시적 권력의 경연장' 이라고 설정할 때,모든 권력을 파시즘적 요소로 상정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모든 권력=파시즘'이 되는 근본주의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월드컵의 붉은 악마들이 모두 애국주의에 휩싸인 일상적 파시즘의 구성인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혹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월드컵의 붉은 악마나 한국의 스포츠 애국주의,또는 인터넷의 애국주의 폭력성-2PM의 재범이 사건같은-것을 두고 '파시즘 도래' 운운한다.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에도 '저강도 파시즘'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런 앙칼진 비판을 한  개인은 최소한 그로부터 분리된 - '반파시즘'의 사제로서- 자기 선명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긴 하다. 그렇다면 '촛불 집회'에 모인 전국적인 '대중'은 '파시스트'가 아닌가?  물론 그들이 공적인 목적으로,더 이성적인 자신의 정치적 또는 상식적 주장을 바탕으로 했다고 말한다면 차이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촛불의 '대중'은 모두 '각성된 엘리트' 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패거리와 힘을 부정할 경우 생기는 자가당착이다.즉 '모인 패거리'의 힘을 '파시즘'의 미심쩍은 시선으로 볼 때 그것은 '파시즘 근본주의'가 되어 스스로의 목도 조이게 되는 것이다.  김진석이 보기에 '미시파시즘' 에 대해 들뢰즈가 제시할 수 있는 방식은 '분열증적 혁명' 이나 '탈주' 외에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초월'이지 김진석의 말하는 '포월'은 되지 못한다. 김진석은 '폭력과 권력'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임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기우뚱한 균형찾기'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파시즘이란 지도 위에다 '미시 파시즘'을 올려 놓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고 미시 파시즘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조금 더 섬세하고 한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파시즘'이란 주제가 좀 길어졌다. 하지만 이 내용 역시 책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와 어깃장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김진석은 먼저 한국에서 지금까지 수용된 니체가 '정치철학적' 요소가 배제된, 즉 탈정치화된 니체라는 점을 문제시 한다. 애써 정치철학과 결합한 경우는 니체의 '반민주주의요소'를 나치나 또는 파시즘의 수원지 정도로 이해하고 비판하는 방식이다.(김진석은 박홍규의 <반민주적인, 너무도 반민주적인>을 이런 류의 텍스트로 본다.) 그 외에 니체 수용은 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요소만 강조되고 그의 정치적 반민주성, 반페미니스트적 요소들은 외면하거나 축소시켰다. 김진석은 데리다, 들뢰즈등을 경유하여 유입된 '탈근대론적 니체론'이 이 흐름을 주도했다고 본다. 그는 이런 해석들이 니체 열풍을 불러 일으키긴 했지만 그의 사상 중 걸림돌이 될만한 '반민주적 요소'들을 슬쩍 피해감으로서 오히려 또 다른 곡해만을 나았다고 본다. 결국 김진석은 니체의 반민주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니체라는 현실로 뛰어드는 것이다. 

니체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는 꽤나 알려져 있다. 이런 인용을 보자

"우리,(무리짐승의 믿음과) 다른 믿음을 가진 우리는 민주주의적 운동을 단순히 정치조직의 타락형식이라고만 여기지 않고 인간의 타락 형식이며 왜소화 형식, 그리고 인간의 평준화와 가치의 낮춤이라고 여긴다."  .... <선악의 너머에서> NO.203 

대중, 민주주의, 평등, 선함, 베품, 연민 등등에 대한 니체의 모진 발언들은 니체 중기 이후 철학적인 양상의 진전과 함께 전면에 드러난다. 거기에 니체의 아포리즘적인 문체와 상호모순적 발언들은 니체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김진석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체제가 역사적 결과물로서 문제가 많지만 역사적인 차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하는 지평에서 니체에 접근한다. 결국 역사적 선상에서-현재의 흐름 위에서 본다면- 니체는 '반시대적'이며 '반민주주의자'였다는 점은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니체같은 위대한 지성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김진석은 니체의 텍스트가 아직 민주주의가 도래하고는 있지만 아직 정착되기 이전의 것이었음을 말한다. 니체는 그런 이행기에 귀족적이며 엘리트주의적 입장에 서 있지만 또한 민주주의가 펼쳐보이게 될 몇 몇 지평에 대해 뛰어난 예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진석이 보기에 니체의 가장 큰 모험은 -겹치기도 하지만- 구분 되어야 할 '철학적 개념'의 선분과 '정치적 지평'라는 선분을 무리하게 중첩시키려고 한데 있다. (김진석은 이 둘 사이에 분명히 틈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니체에 대한 접근법은 먼저 이걸 전제해두고, 그의 반민주적인 발언들을 철학적 태도로 설명한 이후, 다시 정치와 역사라는 현실의 프레임 넣어서  가두어지지 않는 부분들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표지는 그런 면에서 책의 성격을 잘 요약해 냈다. 자유를 상징하는 날개, 평등의 저울, 가치의 파괴자 니체의 망치, 그리고 상호 여집함을 남기는 세가지의 프레임들....현실에서 우리는 조금은 해괴한 다형의 틀을 쓴 니체로 만날 수 밖에 없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를-여기에는 사회주의도,공산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무리짐승의 도덕이라며 악담을 퍼부었을까? 그냥 박홍규 선생이나 김상봉 선생처럼 말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책의 절반 정도를 할애한다. 요약하면, '위대한 정치'에 대한 그의 정의, '강자의 고귀함'에 대한 그의 강박, '격차의 열정' 에 대한 그의 응원이 결과적으로 평등을 전제에 깔고 있는 민주주의에 적대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니체가 서양 역사와 사상사의 전복자였다는 점과 동시에 읽어야만 한다. 그에게 '위대한 정치'는 고결한 정신이 이끄는 정치이다. 이 정신은 기독교적 죄의식 또는 도덕과는 관련이 없다. 니체는 '권력의지'라는 강자의 철학이 이런 '선한 정치'가 아닌 '좋은 정치' 를 만든다고 믿었다. 니체의 강자 역시 그런 '영혼의 위계성' 에 바탕을 둔 철학적 개념이다. 이는 현실적 변용과정에서 보수주의적으로 적용되고는 한다. 김진석은 이 점에 대해 니체의 태도를 단순한 귀족적 보수주의와 구분하여 '귀족주의적 급진주의'라는 말로 설명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철학사의 반성과 성찰 속에서 나온 것이고 그 스펙트럼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 니체는 거기서 나아가려했다는 것에서 '위험한 철학자'가 된 것이다. 쉽게 이해해서 '철학'을 그대로 '현실정치'에 대입하려 했다는 것이 김진석의 니체 기소 내용의 핵심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역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 권력이나 격차의 위계라는 것 역시 비역사적 공간이나 초월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책의 절반 정도는 니체를 경유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다.들뢰즈와 데리다의 니체 해석이 주요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일단 '미사 파시즘론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이 작업은 진행된다. 김진석은 이들의 작업이 '신선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시대의 변호를 예측하고 예고한' 점은 인정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사회적 변화를 서술하는 일을 지나치게 상징화하고 추상화할 위험'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니체 텍스트를 '탈정치화'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를 '힘의 의지'로 번역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그런 예로 거론된다. 그는 들뢰즈의 탈코드적인 노마니즘을 예로 들면서 그의 '바깥사유'의 강조가- 정작 들뢰즈는 안과 밖의 단절과 연결을 매우 강조했음에도- 일련의 오해과 통속적 이해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김진석이 비판의 선을 대고 있는 부분은 오히려 '포스트사상의 한국적수용'에 있지 않나 싶다. 그는 이것이 전체적으로 사회적 대항철학의 공간을 잠식하게 될 부분을 우려한다.(반대편에서는 이는 대항-철학 공간의 확장으로 이해한다.) 어쨋거나 그는 '망치로 철학하기는 부수기라도 하지만 부수지 못한 채 떠돌기만 하는 비결정성은 자칫하면 공허한 보수성을 띠거나 텍스트의 우울함에 빠지기 쉽다.'라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그는 일련의 포스트모던한 관점들이 다 유효성이 없는 공허한 말장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효과들에 대해 보완하고 수정할 여지가 있다는 점, 특히 현실 세계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점을 말한다. 그가 이 책의 한 장의 제목을 '오, 니체, 여기는 한국이오'라고 정한 점은 서구 철학을 열심히 파고들어 결국 한국 사회를 지도삼아 적용하려는 작업들에 주의를 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실제 지식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나마 어려운 말들로 담론 공간에서나 활약하여 대중파급력이 미약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결론적으로 김진석은 니체를 읽는 독자에게 어떤 가이드라인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우선 니체의 시대와 현시대가 인식틀에 변화가 있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니체를 철학사적인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안티-플라톤주의자였지만 철학사의 우월성을 현실로 적용하려는 점에서는 오히려 그와 닮아 있다는 것이 김진석의 주장이다. 니체 철학을 깨끗한 표백제로 탈색하려는 것 역시 니체의 핵심을 비켜간다고 말한다. 폭력이라는 것은 '문화'의 숨겨진 이면이다. 그러므로 모든 폭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력적이다.폭력-권력의 문제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반민주주의적 요인들은 니체 중반기 이후의 텍스트에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텍스트의 심장을 뛰게하는 근원과 닿아있다'라고 그는 말한다.이렇게 해야지-비록 오남용의 위험도 있지만-능동적 가능성도 동시에 열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니체를 통해 일방적인 평등주의를 지양하고 '싸움을 인정하는 탈현대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로랜스 해텁을 인용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김진석은 '니체 텍스트 이어달리기'라는 표현을 통해 니체 해석의 역사가 만들어 온 지평들을 부분수용,보완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니체를 교대하고 교체하면서, 어렵게 땅을 찾고 길을 찾는다. 우리는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에 착지한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그동안 김진석이 보여준 관점의 반복일 수도 있다. 김진석도 가끔 회색주의자란 말을 쓰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우리는 가끔 ' 진리는 회색 속에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곤 한다. 최소한 그 어딘가에서 접점이 생기지 않을까? 다양한 번역본의 니체 저작이 나오고 또 다양한 해석서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 책이 학술적으로 꼼꼼함이 돋보인다고 이야기하긴 힘들 것이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니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던져준다는데,또 대중적읽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읽어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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