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기원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르네 지라르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아도 우리는 '욕망의 삼각형' 이나 '희생양' 개념에 대해 알고 있다.그 개념들은 지라르를 '이방인'취급하며 배제하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무시할 수 없으리 만큼 인용되고 있다.신문이나 잡지등에서 가끔 만나는 에세이등에서도 모방'과 '희생양'개념들은 약방의 감초처럼 인용된다.내가 르네 지라르를 알게 된 것은 라캉 전문가로 알려진 권택영의 <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이론>이라는 책을 통해서다.군대를 제대하고 연애문제로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였다. 90년대를 포효하던 문화연구의 관심은 그동안 거대담론에 소외 받았던 '몸'과 '욕망'의 문제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그런 트랜드의 한 복판에 들어갈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관심을 갖고 있다가 지라르와 라캉을 코끼리 더듬듯이 만났다.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간간이 다른 글을 읽다가 지라르의 이름을 볼 때면 그의 책들을 꼼지락거리고 싶은 욕망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늘상 순위에서 밀려났다.

<문화의 기원>을 읽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때문이다.테러의 문제를 문화인류학적으로 해설하는 그 책을 읽다가 지라르의 개념들이 머리를 어지럽혔기때문이다.이글턴은 <성스러운 테러>에서 직접적으로 지라르를 언급하지는 않는다.그렇지만 이글턴이 테러와 테러리스트를 보는 관점에서 우리는 쉽게 지라르의 '짝패'나 '희생양'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물론 지라르 이전에도 '모방'과 '희생양'의 관점으로 인류문화를 설명한 학자들은 많다.그러나 지라르가 스스로도 말하 듯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라는 형태로 이 문제를 끝까지 밀고 가는 사람도 그 자신 밖에 없다.

<문화의 기원>은 인터뷰 형식의 책이다.이 책을 통해 지라르는 자신이 평생동안 부여잡고 있는 '모방매커니즘'과 '희생양'이라는 개념에 대해 평이하게 설명할 기회를 갖는다.지라르의 가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욕망'이 '모방'된다는 즉 '모방적 욕망'부터 시작해야된다.이 말을 딱잘라 쉽게 말하면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다'라는 것이다.소아기적 주체론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내가 원하는 것이 남이 원하는 것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물론 지라르 역시 모든 욕망이 매개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또한 일방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그래도 너무나 당당하게 '내가 그걸 원해서'라고만 말할 수 있다면 '소아기'이름표를 계속 붙이고 다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모방'욕망이 경쟁과 갈등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데에 있다.이 단계에서 서로의 욕망은 서로를 투사하는 '짝패'가 된다.지라르가 9.11과 관련되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미국의 폭력적 정권을 '짝패'로 상정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테리 이글턴 역시 이런 '짝패'가설을 이용한다.결국 갈등은 폭발하게 되는데 이 폭발 과정에 꼭 필요한 것이 '희생양'이다.모방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갈등은 '제의적'살해를 통해 일차적으로 해소된다.지라르는 인류의 역사의 기원에 '초석적 살해'라는 것이 있었다고 말한다.결국 인류의 기원은 핏덩이 위에 서 있는 것이다.그러나 희생제의롤 통해 찾아진 안정은 임시적인 것이다.모방은은 항구적이기 때문이다.'모방매커니즘'에서 피해자인 '희생양'은 초기 단계에서는 '악'으로 묘사되지만 '제의'라는 과정을 거치고 또한 사회안정이라는 결과를 통해서 다시 '성스러운 존재'로 자리잡는다.지라르는 신화와 인류학적 문헌등을 통해 이를 증명한다.이런 '희생양'메커니즘의 가장 중요한 비밀 중에 하나는 집단구성원들이 그들의 집단적 살해와 이런 매커니즘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지라르는 '무의식'적인 집단 정신 대신에 이를 '인지불능'이라고 말하고 있다.)이런 매커니즘은 공동체라는 집단의식을 만들고 결국 제도로서 '국가의 기원'과도 연결된다.지라르는 현재의 문명은 -다들 인정하지 않지만-'희생양'제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제의적 살해'라는 형식이 문화의 형성과 전수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리고'제의'가 제도화 된 형태를 띠면 그것이  '종교'가 된다.지라르는 '종교'를 '문화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지라르의 이론에는 '신화와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런데 이 둘은 '희생양'을 대하는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신화에는 무수한 희생양이 등장한다.하지만 신화의 입장은 가해자 편에 선다는 것이 지라라의 주장이다.즉 신화속 희생양들은 흠결이 있고 그에 대한 운명의 처벌은 마땅한 것이었다.반면 구약에서는 우리 문명에 희생양이 존재하고 희생양이 무죄임을 언급하기 시작한다.구체적으로 지라라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예로 든다.그리고 본격적으로 희생양이 무죄임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은신약의 복음서에 와서이다.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모방욕망과 만장일치적 집단 폭력의 희생양이다. 그를 통해 인류는 희생양에 대한 기나긴 '인지불능'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현재의 문명도 그 영향하에 있다.지라르에 의하면 희생양에 대한 인류의 집단적 인지불능과 매커니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다.거기에는 인류를 움직여온 거대한 집단적 폭력과 희생양을 무죄로 인정하는 복음서의 시각이 한 공간안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지라르는 그의 희생양메커니즘을 성경 시편을 이용하여 함축하고 있다.

"사람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다.( 시편 118:22 ) " 이는 복음서가 증명하고 있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중요한 아포리즘으로 지라르에 의해 선택된다.중요한 것이 '버린다'라는 개념과 '머릿돌'이라는 메타포이다.

<문화의 기원>이 르네 지라르의 입문서로서 가장 좋을 것이라는 평가는 옳은 듯 보인다.내가 지라르를 더 읽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누구든 단 한권만 읽는다면 이 책이 좋을 듯하다.먼저 지라르 자신이 그의 가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때문이다.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론이 갖는 평가와 위치들이다.(사실 지라르의 책만 읽는다면 이런 부문에 대해 알기 힘들다.) 이 책은 인터뷰를 토대로 구성되었다.질문자들은 지라르의 이론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통해서 지라르의 반비판을 끌어낸다.지라라는 사실 양쪽으로 공격을 받는 위치에 서있다.즉 학계에서는 반과학적이고 환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또한 기독교를 상정해 놓고 결과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비판도 받는다.또한 기독교입장에서는 신학적인 것을 과학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치부하기도 한다.지라라는 자신의 연구가 처음부터 신학과 과학을 연결해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그러면서 각 비판에 대해 또렷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지라르는 현대문명과 관련해서 분명히 '희생양'제의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기독교의 영향으로 희생양제의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최초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낙관적인 평가를 내린다.반면 더이상 희생양제의라는 보호책이 없는 상황에서 폭력의 둑이 무너질 경우 무방비일 수 밖에 없는 묵시록적 세상도 우려한다.질문자들은 조금 더 직접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을 묻지만 지라르의 대답은 그닥 신통치 않은 양시론적 입장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지라르가 자신의 가설을 조금더 사회적으로 확장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그는 '희생양'을 언급했던 많은 연구자들이 조금 더 깊이 '초석적 살해'와 '만장일치적 폭력'그리고 '희생양'의 효과에 대해 인정하고 밀고 나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지적한다.그런 차원에서 지라르의 '희생양'의 외연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원론적이지만 '착취'라는 개념은 결국 그 대상을 상정할 수 밖에 없다.죽임을 당하는 희생양은 아니지만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분명 같은 말을 쓸 수 있다.(지라르의 희생양은 은유적 개념보다는 사실적 개념이다.)또한 '착취'에 대한 집단적 인지불능도 작용해야 한다.그람시의 헤게모니가 그런 차원의 해석일 것이다.야만적 자본주의 광풍 하에서 현재 사회구조로 희생양 메커니즘을 확대한다면 결국 우리 세상에는 여전히 여전히 수많은 '희생양'들이 존재한다.다만 그들을 제단 위에 올려 놓고 칼로 베는 직접적 행위만 있지 않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