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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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11일, 세계 경제의 위기감이 극도에 달했을 때 미국의 증권회사 메릴린치는 주요 일간지에 대대적인 전면광고를 냈다. 광고의 제목은 ‘세계는 이제 열 살’이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세계에서 가장 어린 경제인 글로벌 경제가 출생했고, 그 나이가 이제 겨우 열 살에 불과하니 아직 제자리를 못 잡고 흔들리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이라고 부른 그 사건은 또한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격렬한 산통이었다. 그 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폭풍이 전 세계를 휩쓸었고 우리도 1997년 IMF사태로 호되게 쓴 맛을 봐야 했다.

 그 후 10년 세월이 더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달라진 우리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드는데 이게 쉽지 않다. 특히 경제 쪽은 문외한들이 상황 판단하기가 힘들다. 세 전문가의 대담 형식으로 만들어진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짙은 안개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독자들에게 한줄기 빛을 던져준다.

 이 책의 독자는 자신의 고정관념에 가해지는 도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소 박정희 개발 독재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정부 주도의 시장 개입을 적극 지지하는 지은이들의 입장에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종속이론에 바탕을 두고 ‘박정희가 한국경제를 종속시켰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오히려 당시가 종속적 색채가 덜했고,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옹호하는 이른바 개혁세력들이 개혁을 추진한 결과 종속 구도가 훨씬 심화되었다는 지은이들의 주장에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재벌에 대한 평가도 이채롭다. 지은이들은 재벌이 과감한 투자를 통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주역이라고 평가하면서, 재벌 개혁을 목표로 소액주주 운동을 펼치는 시민운동이 결코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 과정에서 재미를 보는 것은 오히려 외국인 투자자와 금융자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민운동가들이 ‘삽질’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쯤 되면 독자는 지은이들을 수구 지식인으로 바라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은이들은 최근 한국 사회가 맞이한 양극화 문제의 근본 원인을 1990년대부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서 찾는다. 이 세계화 바람의 1단계가 김영삼 시대이며 김대중, 노무현 시대는 세계화 2단계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세계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장 논리이고 시장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시스템이다. 시장주의에서는 약자인 노동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도 보수 세력은 노무현 정부를 좌파로 몰아세우고 있다. 하지만 시장주의를 옹호하는 좌파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서구 기준으로 보면 좌파는 기본적으로 친노동, 반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장주의를 공격하는 이 책의 저자들은 모두 좌파 지식인들인가.

 지은이들의 주장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non-liberal democracy)이다. 민주주의를 추구하되 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나라를 바람직한 모델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평소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으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서로 궁합이 잘 맞는 이념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를 배제한 민주주의라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다. 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 계기 자체가 유산자 계급이 자신의 사유재산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는 다수자, 특히 가난한 다수자의 지배를 의미하며, 서양정치사상사의 출발에서부터 민주주의는 우려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므로 ‘자유=민주’라는 등식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19세기까지만 해도 반(反)민주주의자들이었다. 서구 자유주의 사상의 핵심은 시장의 자유와 재산권이다. 시장의 자유는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사회를 나누게 마련이고, 그렇게 형성된 ‘있는 자’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사유재산을 지키려 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은 ‘없는 자’들에게까지 투표권을 주겠다는 민주주의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돈 없는 자들이 투표권을 부여받아 정치권력을 장악했다간 부자들의 사유재산을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19세기 서양 사회에서 민중은 자유주의자들과의 길고도 고단한 투쟁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해냈다. 그 후 자유주의자들이 계속 풀이 죽어지내오다가, 1980년대 초부터 융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체제이자 저성장체제로 간주한다. 예컨대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경제개혁이라는 슬로건 아래 추진해온 주주 자본주의는 장기적 전망을 가진 기업 운영이 어렵게 만들었다. 경영자들은 재임 기간 동안 주식 가치를 올려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장기적 투자와 기술혁신은 뒷전이다. 경영자는 퇴임 후 기업이 어떻게 되건 간에 일단 주가를 올려놓고 봐야 한다.  단기주의가 판치게 되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노동시장의 유연화이다. 노동자들을 해고하면 주식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결국 주주 자본주의(=신자유주의=시장주의)는 주주와 경영자들이 야합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래도 시장보다는 국가가 비교적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조직 아닐까요? ……국가 외에 누가 감히 시장을 견제하겠습니까? 시장에서 튕겨져 나오는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메커니즘도 국가 외에는 아직 없는 것 아닌가요? (<쾌도난마 한국경제> 186쪽)

 
민주주의를 위해 자유주의를 내던지자는 것이다. ‘가진 자’의 독무대인 시장 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전 국민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민주정부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은 박정희 체제 경제개발의 성공 원인이 독재(즉 반민주주의)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자유주의적 정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지은이들의 박정희 업적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그의 비자유주의적 측면이지, 반민주주의적 측면이 아니다.

 민주정부(=민주국가)의 역할에 대한 지은이들의 기대는 매우 크다. 그리고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보여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저자들의 기대는 장하준의 최근작 <국가의 역할>에서 확대, 심화되고 있다. 두 책은 시장과 정부의 개념과 기능을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과 개혁진영이 그동안 얼마나 모순된 행태를 보였는지 드러낸다.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진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문외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이념적 양극화와 경직된 교조주의의 강고한 틀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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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6-12-28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 글월문님 서평을 읽으니 저도 생각이 더 잘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 '국가의 역할'을 읽기 시작했는데 무척 기대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장하준 교수가 분석한 대로의 현상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정책 집행자들의 사고가 유연해져서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안티고네 2006-12-3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쾌도난마>에 비해 <국가의 역할>은 전문학술서를 번역한 책이다보니 읽기가 그리 쉽진 않군요. -.-;
 
평화는 나의 여행
임영신 지음 / 소나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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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이라크 전쟁은 대부분 CNN이 보여주는 이미지이다. 우리는 이 전쟁을 마치 비디오 게임 구경하듯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포탄이 난무하는 현지의 아비규환은 그저 ‘강 건너 불’이다. 그들의 뉴스에는 ‘사람’은 없고 ‘전쟁’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그들이 의도하는 뉴스만을 보고 들을 뿐이다. 이라크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공포는 우리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고통 받는 이웃의 삶을 외면하는 몰인정하고 냉담한 인간이 되고 만다.

 

세 아이를 둔 엄마가, 지난 12년간 달마다(‘해마다’가 아니다!) 5천 명의 이라크 아이들이 죽어갔다는 이 전쟁터를 찾았다. 엄마의 시선으로 전쟁터를 보려는 것이다. 그는 부상당한 한 어린이의 집을 방문한다. 무고한 어린이가 당한 처참한 부상에 통역을 하던 현지인이 울음을 터뜨린다. 울지 말라고 다그치던 사람도 울고, 사진을 찍던 기자들은 카메라로 젖은 눈을 가린다.

 

부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동정심과 인정이 조금이나마 회복될 수 있었으면 한다. (이 책을 읽을 때는 꼭 손수건 한 장씩 지참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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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색 -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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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대한민국 상식백과사전’이라고 불러도 될만한 책이다. 사랑, 불륜, 질투, 순결, 키스, 욕망, 열정, 배신 등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20개 주제를 선정, ‘한국인론’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현대인들의 인간관계 유형을 밀도 있게 구체화 했다. 그런데 이 책의 방점(傍點)은 아무래도 마지막의 ‘배신’에 찍혀 있는 듯하다.

 

저자는 민주당 분당이라는 동전의 앞면은 정치개혁이라는 명분의 문제였지만, 뒷면은 ‘배신과 왕따’라는 내부도덕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대중은 정치의 앞면만 볼뿐 뒷면은 보지 않거나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성공했지만 민주당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최근 열린우리당의 몰락과 민주당의 약진에서 은근히 ‘배신자’의 암담한 미래를 기대하는 듯하다(256쪽). 그리고 이렇듯 명분보다 내부도덕에 더 비중을 두는 듯한 저자의 입장은, 결국 제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의리’ 또는 ‘싸가지’의 비중을 간과하기는 힘들다는 뜻으로 읽힌다.

 

시시비비를 확연하게 구분하던 이전의 입장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 듯한 저자의 태도는,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진 2006년 우리 사회의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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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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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은 흥미롭다. 현대사회의 소비는 소비자가 주체가 되어 상품(대상)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유명 광고 모델(매개자)이 쓰는 것을 따라가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욕망에는 전염성마저 있다고 한다. 정당의 정강정책(대상)보다는 정당의 지역성(매개자)을 보고 투표권을 ‘소비’하는 한국 유권자들의 ‘지역감정’도 이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할 듯싶다.

 

귀족적 품위를 뜻하는 'distinction'은 차별, 구별을 뜻한다. 귀족이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차이’이지 ‘재화’ 그 자체가 아니다. 부하 직원이 외제차를 타면 자신은 소형 국산차를 사용함으로써 차별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준다. 아래 계층과 구별되는 차이의 효과 그 하나이고, 돈 많은 사람이 소박하고 겸손하기까지 하여 서민에게 친근감을 준다는 것이 그 두 번째이다. 그렇다면 거부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만나 10달러대의 검소한 식사를 한 것도 과소소비(under-consumption)를 통한 차별화 시도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서울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서울대 폐지론 주장자들을 한국의 ‘주류’로 간주하는 것은 생뚱맞다(119쪽). 이 같은 인식 오류는 ‘지적 반(反)소비현상’일까(103쪽)? 아니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일까(187쪽)? ‘잃어버린 10년’에 방향감각을 잃은 이 시대 ‘주류’ 지식인의 어지러운 내면의 일단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미덕도 덤으로 갖춘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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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용어 바로쓰기
박명림, 서중석 외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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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은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을 자기네와 가까운 지역이란 의미에서 근동(Near East)이라 불렀고, 자기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동쪽지역을 극동(Far East)이라 불렀다. 근동, 극동이란 말은 철두철미 유럽인의 시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쪽에서 동쪽을 대상화, 타자화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극동’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쳐보자. 극동방송, 극동문제연구소, 극동건설, 극동대학교, 극동해운…….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는 이름이 지금도 너무나 당당하게 사용되고 있다. 자아정체성, 민족주체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언어는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건만.

 

한국고대사의 시대구분용어인 ‘삼국시대’란 말도 엄연히 우리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가야의 존재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사국시대’로 불러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도 마찬가지다. 발해도 엄연히 우리 역사인 만큼, 통일신라와 발해를 아우르는 ‘남북국시대’로 고쳐 쓰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먼저 우리 안을 들여다볼 일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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