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쓰기의 말들>을 지하철을 오가며 읽고 있다. 국문과 글쟁이가 글쓰기 수업을 맡아서 하면서 어떻게 하면 글을 처음 써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쓰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궁금해서 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책을 잘못 고른 것 같다.

 

이 책은 글을 쓰고 싶은데,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못 쓰고 있는 사람에게 글 쓰기란 이렇게나 매력적인 것이야, 얼른 써, 써, 라고 충동질해대는 책이기는 하지만 나처럼 글쓰기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야 하는 사람을 위한 책은 아니었다. 학점을 따기 위해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게 글쓰기의 매력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 수업의 목적 자체가 학술적 글쓰기 그러니까 소논문에 대한 것이고보면 이 수업 자체가 글쓰기의 매력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다만 이 책은 학생들이 아니라 나를 위해 '유용'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게 만들었고 또 앞으로도 매일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글을 쓰리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글을 잘 쓰고 싶으면 매일 쓰면 된다는, 그리고 스스로가 싫어질 만큼 자기 생각 없이 실실 웃기만 하는 바보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되고 싶으면 글을 써야 겠다는 단순하지만 어마어마한 깨달음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인상깊은 구절을 하나 적어둔다.

"돈과 나를 맞바꾸는 거래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나'를 만나는 일, 자기의 사회적 표정과 대결하며 본래의 표정을 되찾는 일이 어른의 글쓰기일지도 모르겠다." (97)

 

책을 잘못 고른 덕분에, 나는 이제 글을 쓰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분노의 정치와 증오의 정치

헌재 앞 태극기 집회 현장을 지나치다가 느꼈던 공포에 대해 말하자 C는 그들이 젊었을 때부터 '깡패'였을 것이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 반응 역시나 무섭다고 말하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분노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말했다. 자신은 그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해 보려는 것이라고. 나는 그건 '이해'가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그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을지 어려웠다. 그의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증오처럼 느껴졌던 그건 냉소일 뿐이지 않냐고 나중에서야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적절한 반응이 무엇인지. 그저 무섭다고 느끼는 것만도 능사는 아닐 터인데.

 

#말과 활 2016 겨울호를 읽다가

내 세계관의 터무니없이 좁음을 한참 깨닫고 있는 요즘,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글들을 닥치는 대로 사서 구해서 읽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 논점들을 정리하는 중. 그 중에 하나는 '미러링'. '미러링'이 뭐고 그것의 효과를 설명하다보면, 그것이 발화의 차원에서 되돌려 준다는 사실에 국한해서 설명하게 되는데(너네도 해왔는데 왜 우리는 안되냐), '여혐' 발화와의 불균등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수행 효과까지를 엄밀히 구별해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 즉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함의하는 것은 '미러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희진 선생님이 남혐은 불가능하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 그런 점에서 지속적으로 제도적 차원에서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필요한데, 90년대의 과오(제도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인식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 때의 '반발(backlash)')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운동'차원의 움직임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최근 '페미니즘'을 주제로 내세운 학회, 토론회에 몰리는 인파와 자발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독서모임 등은 주목할 만한 것 같다.

다만 '미러링'과 관련해서는 오카 마리가 지적한 것처럼, '유슬림'이라는 표현에서 무슬림을 비하하게 되는 것과 같이 '미러링'이라고 주장되는 일부 표현에서 '비하'되는 타자가 발생한다는 점은 어떤 식으로든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점에서 말과 활에 실린 글의 제목을 패러디하자면, 페미니즘은 항상 급진적인가, 라는 물음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 반성을 좀더 덧붙이면, 나는 어째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을 이론으로만 이해했는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여성으로서 차별을 '당연시' 해온 것인지, 페미니즘을 내 '삶'의 문제와 관련지어보지 않았던 이유가 지금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다.

 

#'사랑'

라깡과 관련된 강의를 듣다가, 드라마 <도깨비>에 나왔던 대사처럼, 모든 사랑이 첫사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했다. '사랑'도 주체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사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사랑이었고, 또 지나고 보니 그 전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었어서 사랑을 시작하는 자에게는 그 시절 시절의 사랑이 '첫' 사랑이게 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 '특수한' 인간이고 그와 하는 '사랑' 역시 특별한 것일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그 한 사람을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사랑의 언어를 발명해 내야만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하셨고, 나는 그 언어가 진부해지는 순간 그 사랑은 끝난 것이라는 말에 무엇보다 공감했다.

안티고네를 비혼주의자로서 주목하는 해석 역시 흥미로웠는데, 비혼주의자로서의 여성이 '국가'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예외적 존재인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안티고네는 햄릿과 유사한건가. 자기 운명의 주사위가 결정된 후 '결혼'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결혼'에 대한 거부와 '국가(법)'에 대한 거부는 무슨 관계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3.11 이후 일본에서 나오는 문화 창작물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든다. 세월호 이후 한국에서 창작되는 것들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너의 이름은>이 그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그랬다. (같이 본 동행인의 말에 따르면 이와지 슌지의 <립반 윙클의 신부>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단다) 영화뿐 아니라 일본 드라마에서도 그런 인상들을 받았었고..내가 본 대부분의 창작물들은 주로 어떻게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를 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왜 자꾸 치유하려고만 해, 좀더 우울해하자, 좀더 슬픔과 상처에 대해 말하자, 여기서 섣부르게 벗어나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자, 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슬픔을 극복하자는 내용이 아니다. 남자 주인공의 성장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지만, 그때의 성장이 결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슬픔을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려다가 평생 벗어나지 못할 뻔했던 남자가 '슬픔'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는' 내용이다. '깊은 마음', 남자가 아이에게 물었던 질문 '너에게도 깊은 마음이 있니', 에 대해 아이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직 아이에게는 고독이나 깊은 마음 따위가 있으리 없겠지. 없을까?

 

유세윤을 닮은 모토키 마사히로가 연기를 썩 잘한다. 아역들도 이에 못지 않다. 타케하라 피스톨이라는 일본 남자냄새가 많이나는 사내의 의뭉스러운 표정 연기도 볼만하다. 간만에 본 후카츠 에리는 얼마 안되는 등장에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안 그래도 수업을 하는 데는 자신이 없어서 그동안 한 수업에 대한 평을 잘 보지 않으려고 했다. 충북대는 평가를 보지 않으면 성적을 매길 수가 없어서 봤더니 생각보다 평들이 나쁘지 않았고(수업 진행이 너무 주관적이라는 지적이 있기는 했지만) 한림대는 수향 언니 말로는 평이 나쁘지 않다고 했고.. 그래서 내가 더 재밌게 했다고 생각한 서울대 평가도 나름 기대를 했는데

 

역시 서울대 애들은 뭔가 평가가 엄격하다. 자신들이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입장이 누구보다 확고한듯. 계절학기의 특수성(고학번, 재수강이 많다는 점)이 있어서인지 강의를 통해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가 냉정하게 평가되고 있어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인정이 없다는 것이 이런 말일까. 한달 여간 주3일씩 보면서, 그리고 서로가 쓴 글들을 읽고 평을 하면서 개개인들에 대해 알아간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친구들은 그저 이 '수업'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얻어갈지에 대해 '계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태도가 좋고 나쁘고 평가하는 것을 떠나 이 친구들은 내가 수업을 즐긴만큼도 '수업'을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수업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거나 인문학적 글쓰기에 치우쳐 있었다거나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하는 평을 떠올리면 지금은 실소가 나온다. 나 역시 내가 즐기지 못한 수업에 대해서는 가혹한 수업평가를 하기도 했으니 남의 얘기만도 아닌 셈이다. 수업을 한다는 것, 수업을 듣는다는 것. 무엇을 위한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글쓰기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글에 대한 피드백이고, 그 피드백이 단순히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을때 내 수업이 그런 지점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수업 하나 듣는다고 해서 학생들 글쓰기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지는 않는다는 자조와 냉소가 한몫했으려나. 그럼에도 수업을 하는 동안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감탄을 했었는데, 그건 그저 고학번, 재수강이라는 요소가 작동했기 때문일뿐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 혼자 들떴다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계절학기라는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어떤 식으로 강의를 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 하게 된다. 학생들도 '학점'을 따는 것을 넘어 수업을 즐길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식으로 커리를 운영하면 좋을까. 나만 재미있는 수업이 아닌,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그러면서도 수업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해 봅시다.

 

어쨌든 피드백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일은 기형도에 대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80년대와 90년대를 이전과는 다르게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을 가져와서 2000년대 초반 일어난 근대문학의 종언 관련 논쟁의 의미를 기형도와 관련해서 새롭게 짚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기원을 썼을 때 이미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것과, 근대문학의 기원이 네이션의 탄생과 관련된 것처럼 근대문학의 종언은 근대적 주체를 만들어냈던 네이션의 붕괴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2000년대 초반의 논쟁을 김홍중 선생님이 말한 '진정성의 종언'과 관련지어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김홍중 선생님이 진정성의 종언을 다소는 우려스럽게 진단하셨다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면서, 진정한 '나'를 추구하려는 80년대 문학의 가능성이 문을 닫는 그 순간 기형도 문학이 출현했다는 그 우연성의 의미를 밝혀보고 싶었다.

 

'기형도 신화'라는 걸 만들어낸 김현의 죽음과 기형도 자신의 죽음이 '80년대는 끝났다'라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 상승 작용을 만들어냈다는 점, 그래서 '기형도 신화'에 대해 당시 '운동권'들이 가졌던 불편함을 이해해보고 싶었다. '운동권'을 비판하면서 공적 주체의 차원을 소거시킨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이들과도 다른 맥락에서 '기형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형도가 호이징아의 <중세의 가을>을 읽으면서 꿈꾸었던 '중세'가 무엇이었는지를, 김현이 말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개념과 연결지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 스스로 해결되지 않는 물음들이 발표문의 요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기형도의 시적 주체는 '진정성의 주체'가 아닌가, 기형도 문학이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닌다면 그 가능성의 의미란 무엇인가? 기형도 문학을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으로까지 보는 것은 과장이 아닌가?

 

그러다가 오늘 김정근의 <그림자들의 섬>을 보았다. 충북대에서 수업을 마치고 5시 버스를 타고 길이 막혀서 영화가 시작하는 7시 반을 훌쩍 넘긴 43분에야 영화관에 겨우 들어갔다. 숨을 고르고 영화를 보는데, 영화는 80년대부터 시작했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조선소 노동자들이 어떻게 민주노조를 만들게 되고, 노조위원장이 의문사를 당하고 시신을 탈취당하고, 다시 싸우고 일어나 형편이 나아지니 한때는 동지였던 이가 대통령이 되어 탄압에 앞장서고 그리하여 또 다른 동지를 잃고, 그 동지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가 없어서 누군가는 다시 크레인에 올라가고, 하지만 뜻하지도 않게 희망버스라는 전환의 순간이 생기고 다시 싸울 힘을 얻었다가는 그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는 절망의 깊이로 인해 누군가는 또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그렇게 80년대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억압적인' 80년대에서 '자유로운' 90년대로 설명되어왔던 것에 대해 86 아시아게임, 88올림픽, 조용필의 유행, 애마부인의 시대 등을 이야기하며, 기존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80년대의 분위기에 주목하는 것은, 90년대의 급작스러운 분위기 변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그림자들의 섬>을 보면서 이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적인 것'이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함께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선행연구들에서 이런 점을 지적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리석은 내가 미처 그 중요성을 깨우치지 못했을 뿐이다). 영화에서 김진숙 위원이 말하는 것처럼 '나'와 '너'의 잘못이 아닌데 서로 죄책감을 가지게 만드는 그 자본과 권력은 건재하다. 하지만 그 권력에 맞서싸웠던 연대의 힘은 갈수록 그 기반이 줄어들고 있다. 80년대 노동자들의 연대가 짐승과도 같은 삶을 인간의 것으로 바꿔왔다면, 이제는 인간의 삶이 짐승의 그것으로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를 말하기란 어렵다. 다만 적어도 무엇이 진정한 것일까, 무엇이 옳은 것일까를 고민하는 삶, 그것이 '너'와 '나'를 연대하게 하는 다리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은 권태에 빠지기 쉽다. 죽은 자들은 우리의 발목을 가끔씩 부여잡고 무엇을 잊고 살아가지는 않는지를 묻는다. 그 자들이 그리워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일 때,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생각하며 흥얼거려볼 때, 그래, 이런 것이었지, 우리가 같이 만들려고 했던 세상은 이런 것이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는 현재의 발목을 잡고 그가 다른 미래를 걸어가게 해 준다. 여전히 먹먹할 수 있어서, 그래도 웃으면서 다시 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