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례한 삶, 움츠러드는 영혼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 김성실의 소설 속에 인용된 이 성경 구절은 그녀의 소설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김성실의 소설은 일관 되게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주어진 상황은 각기 다르지만 그녀의 소설들에는 삶의 무례함에 상처받은 움츠러든 영혼들이 공통적으로 출현한다. 삶이 무례하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주체들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그들을 존중하기는커녕 대체가능한 소모품으로 이용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쳐 버린다. 주어진 사회 규범에 복종(service)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인격(human personality)을 서비스 상품으로 내놓은 이들은 꼭두각시들처럼 자기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규격에 맞추어 이리저리 치이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상처를 입고 사회 바깥으로 내쫓겨 난다.

영혼과 믿음 없이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모욕 받고 있음을 느낀다. 모욕(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43). 이들은 인격을 부정당하며 일종의 사물로 취급된다. 모욕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며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힌 인간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배제와 감금과 추방은 이제 특정 인종이나 계층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갑을 관계는 언제든 역전될 수 있다. 서비스 직종을 비롯해 노동자 계층 전반에 친절이 강요되면서 심지어 인격적 모욕마저도 노동자가 감내해야 할 직무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모욕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인격이 있으며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인권 선언은 망각되어야만 하는 지난날의 영광일 따름이다.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나갈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삶은 모욕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취급을 받는다.

모욕은 이 시대의 정념이라 할 수 있는 불안이라는 감정과 관련된다. 자신의 인생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세계에 대한 전망의 부재에 불안의 근원이 존재한다. 취업에 대한 불안,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비롯한 생존에 대한 불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언제 사회 바깥으로 밀려나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힐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이 강고하게 자리 잡아 갈수록 타인에 대한 모욕 역시 일상화된다. 개인들은 불안을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으로 타파해 보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불안이 쉽게 잠재워질 리는 만무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탓할수록 불안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모욕의 원인을 자신들의 무능함 때문으로 귀결 시키며 낙오자 취급을 받을 까봐 불안해하는 동안 모욕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순환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해 주는 것은 그러한 삶에 대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벚꽃)라고 묻는 데서 비롯하는 것인지 모른다. 믿기지 않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어쩌다 이렇게 자신의 삶이 망가져 버렸는지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은 소설의 중요한 책무이리라. 김성실의 소설은 이러한 소설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자기들의 삶이 받고 있는 모욕이 어디에서 근원하는 것인지를 묻고 또 묻는다. 더 큰 불안과 곤경과 위험에 처하게 될 지라도 그 물음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마침내 어떤 구원의 순간과 마주한다. 영혼과 믿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첫 걸음은 어쩌다가 그 자신들이 영혼과 믿음을 잃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하는 것일 테다. 이들의 물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2. 서비스 노동과 기업화된 주체의 탄생

그녀의 등단작 수족관 이끼를 먼저 읽는다. 이 소설은 미란과 유경이라는 두 자매의 삶을 미묘하게 대비시킨다. 가령 개불을 보고 개의 성기를 연상하는 쪽과 거머리의 피부를 연상하는 것부터가 이들의 성향 차이를 보여준다. 미란은 자신의 성공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데 반해 유경은 자의식이 강하고 예민하며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성향을 지녔다. 횟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인 미란은 조리사는 두 손을 쓸 줄 알아야한다면서 양손으로 조리를 하는 것을 몸에 익히고, “주인하고 종업원의 마음이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푸코가 말한 기업가적 주체의 형상을 구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심세광전혜리조성은 옮김, 난장, 2012, 319). ‘난 할 수 있다는 구호를 내면화하여 자기 자신을 착취하며 성과를 내는 기업가적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미란과는 달리 유경의 자의식은 그녀가 사회에서 원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번번이 가로막는다. 무려 44시간의 서비스 교육을 받은 이후에도 눈썹과 입 꼬리만 올라가는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유경은 성공은커녕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버거워 보인다.

이들의 대비되는 성향은 유경의 병원 직장동료로 등장하는 강 선배라는 인물을 통해 부각된다. 음식 조리를 할 때 양손을 쓰는 미란을 보며 두 손을 쓰는 것이야말로 효율성의 극대화를 노리는 병원에서 환영 받을 만한 일일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하는 유경의 말을 빌리자면, 강 선배는 병원에서 요구한다면 양손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강 선배와 미란은 미묘하게 중첩되며, 성공한 것처럼 그려지는 미란의 삶이 실제로는 강 선배의 삶이 그러했듯이 유경만큼이나 위태한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된다. 바로 이 때문에 유경은 강 선배에게 이중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유경이 미란의 다복스러운 인정과 열정을 부러워하면서도 미란에게 동화되지는 못하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 가면서 거침없이 환자를 구해냈던 강 선배를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 강 선배가 병원의 요구에 무작정 설득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기실 한국 사회는 이처럼 조직과 개인을 동일시하며 조직의 성공을 곧 자신의 성공으로 치환하는 데 익숙하다. ‘병원을 살리자는취지에서 서비스 교육을 실시한다고 하면서 희생하고 받아들이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무수한 언어와 행동들이 자판기 커피처럼 뽑혀 나오기를요구할 때, 노동자들은 병원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은 조직과 개인 간의 결코 일치할 수 없는 입장차를 확인할 때에서야 어김없이 확인된다. 강 선배와 유경이 병원을 살리기 위해선택한 희생은 고스란히 이들 각자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조직을 위해 희생자가 되기를 선택했지만, 조직은 그들의 희생을 인정하기는커녕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개인이 철저한 희생으로 조직의 성공을 위해 이바지할수록 그들은 스스로 약자의 위치를 자처하고 있었던 셈이다. “노동조합원들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등 병원이라는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강 선배가 결국 조직이 적대시하는 위험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결코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이 소설에서 문제 삼고 있는 서비스 교육은 바로 이런 점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서비스는 노동자 주체가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제공하는 특수한 형태의 노동이다. 서비스 직종 노동자들은 자신의 인격을 상품으로 판매하라는 요구에 직면한다. 이는 개인의 고유한 주체성을 삭제하고 상품의 형식에 개체를 짜 맞추어야 한다는 명령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의 주체성을 버릴 것을 강요받는 서비스 노동자들은 그 어떤 모욕도 감내하는 순응적인 주체로 변해간다. 이런 점에서 유경이 병원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기치 않게 서비스 교육의 숨겨진 목적을 폭로한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기업가적 주체라기보다 기업화된 주체로 성공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서비스 노동의 메커니즘이 문제적인 것은 주체성의 소거가 고객에게 친절하라는 일차원적인 명령을 넘어 그것을 요구하는 조직에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순응적 근로자상을 구축한다는 데 있다. “서비스 맛을 알아버린자본주의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려하지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객과 조직에 복종의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어 버린 사회에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많지 않다. ‘거머리혹은 광어처럼 입을 다물고 엎드려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면서 자신을 가두고 있는 알량한 수족관을 깨버리고 싶다는 분노를 억압하며 살아가거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욕망에 부합하기 위해 그 자신의 불안한 영혼을 소거시키고 상품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자는 유경의 삶의 방식이()고 후자는 미란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다. 허나 이들의 삶이 파국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강 선배의 망가진 삶을 통해 예시되고 있다. 이렇게 망가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자신이 놓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이 사회에 수도 없이 많은 개인들의 비극이 펼쳐지는 이유일 것이다. 다만 김성실의 소설에서 이 비극들은 삶이 망가져 있음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이지 않던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역할을 한다.

 

3. 거짓된 삶에의 유혹과 실종되어 가는 이름들

벚꽃은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 가운데 유일하게 스릴러 장르 기법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불안과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특히 주인공 가 검은 복장을 한 사람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은(이것이 살해의 위협인지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것인지를 명확치 않지만) 그의 애인이었던 y가 겪었던 사학 비리 및 공천 헌금 비리 의혹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긴장감이 배가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선악의 대립구도는 y가 그 비리의 희생자일 뿐 아니라 일시적이나마 가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로 인해 복잡해진다. y에게는 촬영기자로 근무하던 방송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도 정원 감축 대상에 포함되었던 전사(前史)가 있다. 이후 한 지방사립대의 사진영상미디어 학과의 강사로 가게 된 그는 노력한 만큼 대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절감하며 교수가 되려면 어차피 기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총장의 회유에 넘어가버린다. “뱃속 깊은 곳에서 교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어느 정도의 불의와 희생은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들은 억대 대출자가 되어 자신들의 돈을 공천헌금이랍시고 의원 밑구멍으로 처박았지만, 현실은 y를 비롯해 욕망의 눈이 먼 자들의 순진함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사학비리로 학교가 문을 닫고 개처럼 끌려 나가내동댕이쳐지는 일밖에는 당할 수 없었던 y는 이내 실종된다. 그의 실종(absence)은 그가 사회 바깥으로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실종자가 된 그는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socially dead person)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소설 속에서 줄곧 실명 대신 y라는 이니셜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그의 실종사태와 관련된다. 실제로 는 학교의 어느 곳에서도 y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 실패한다. 이때 는 그 비리의 현장으로 내려가 비리에 가담한 인물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녀의 물음은 yy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던 에게 되돌려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국 좋은 것을 찾아내고 이룩하고, 서로 돕고 나누는 감동적인 존재라고 믿었y는 어쩌다가 번식을 막지 못할 탐욕에 휘둘리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y의 순수함을 사랑했던 는 왜 y를 말리지 못했을까.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꼈던 이들이 그에 대한 복수로 사회가 요구하는 욕망의 대열에 합류해 버릴 때 복수의 부메랑이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음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가 아무리 파워 블로거라고 해도 작금의 현실에 비춰봤을 때 y와 관련된 비리가 제대로 파헤쳐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화려한 벚꽃을 피우기 위해 남모르게 추악한 곳에 뿌리를 뻗고 제 몸을 살찌우는 인간들, 지방의원이 된 구 농협장처럼 수완 좋게성공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들을 악취 나는 쓰레기라고 욕을 하면서도 그들의 성공을 부러워하면서 그들을 한 나라의 지도자로, 국회의원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들은 성공하고 싶다는 자신의 탐욕에 복종하면서 자기 인격이 모욕당하는 것마저 용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낯선 타인이 건네는 위로와 그들이 자신을 지지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명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는 영혼의 선함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을 탐욕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방어막이 되어 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 는 이니셜 대신 유성규라는 y의 이름을 호명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소피아를 만나다역시 개인적인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믿음과 이해를 회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소설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살 미수에 그쳤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이 같은 병실을 쓰는 세 명의 여인들과 지내면서 변화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노파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소피아 성당을 연상하는 윤의 시선을 따라가며 소설이 시작된다. 죽은 살을 잘라내면 새 살이 돋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윤은 노파의 엉덩이를 보며 무참하게 회칠당해 얼룩덜룩한 소피아 성당의 내부를 떠올린다. 노파의 엉덩이에서 과산화수소가 하얀 거품처럼 밀려 오르는 장면을 떠올리며 윤은 울다가 웃다가 한다. 한편 노파의 옆 침상에는 노숙자라는 이름을 지닌 환자와 그를 돌보는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에게는 노파와 마찬가지로 이름이 없다(노파는 김현석의 어미이고 여자는 노숙자의 친척일 따름이다. 이렇게 김성실 소설에서 인물들의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다만 바람피우고 술 마시고 때리는 남편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망가져 버린 조카를 돌보면서, 오지랖 넓게도 옆 침상의 노파까지 알뜰하게 챙기는, 그러면서 유일한 취미생활일 법한 춤추러 다니기도 빠뜨리지 않는 부지런하고 활달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윤은 이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감정적 유대를 맺지 못한다. 사회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거짓투성이의 삶을 살아왔던 그녀가 이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젊은 시절 금수저논란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 말고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어쩌면 뭘 해야 할지조차 몰랐던 그녀에게 부잣집 막둥이 남편은 그녀를 행복의 나라로 데려다줄 행운의 마차처럼 보였다. 하지만 부풀었던 환상이 깨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의자박약의 남편은 번번이 사업에 실패하다가 결국 그녀를 현금인출기로 이용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시부모는 윤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며 버려진 사람” “목숨을 걸고 부둣가로 숨어든 난민쯤으로 취급당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더라도, 그녀가 실수로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락한 사건은 삶의 궤적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보험회사 직원이 그녀의 거짓투성이 삶을 추궁하는 일을 겪으며 그녀는 그동안 스스로에게 해 왔던 것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 변명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금수저가 아니니까, 실력만 괜찮으면 학력을 위조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등 거짓말을 합리화해 왔던 자신의 행적이 결국 보험금을 받기 위해 죽음마저도 거짓으로 위장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게 하는 데 이른 것이다.

그러다 윤은 자신의 삶에서도 거짓 아닌 것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윤은 아이를 가르치며 최고의 선생이 되려고 했던 자신의 인생은 일정부분 진짜였다고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넨다. 그런데 이 실낱같은 위로와 희망으로 인해 윤의 태도는 변화에 이른다. 가짜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삶에도 작은 인생을 연출하고자 했던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었음을 기억해낸 것이다. “살려고 몸부림칠수록 자신이 내뿜는 배설물로 병이 깊어가는 치명적인 상처를 안고 사는 노파와 자신을 동일시하던 윤은 새살이 돋을 때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더라도, 그래서 그 시간 동안을 더러운 배설물 속에서 자신의 불행과 대면하며 살아가야 할지라도 결코 그것을 외면하지 않기로 한다. 훼손되기 전의 소피아 성당을 상상하며 소피아가 영원히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대신 어째서 사람들이 회칠당해 얼룩덜룩소피아를 방문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4. 우리는 모두 아프다

소피아를 만나다도 그렇거니와 , 겨울 억새, 등 김성실의 소설은 아픈 자들 간의 연대를 다룬다. 이 소설들은 병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여러 가지 사유로 병원을 찾은 환자들을 등장인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주제의식은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김성실의 소설에서 치료받는 자와 치료하는 자의 구분은 명확치 않다. 치료자의 위치에 있는 간호사가 병을 가진 환자이기도 하고, 치료 받아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는 환자가 그들을 돌봐주는 자들을 역으로 치유해주는 역전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고 그들의 병명이 무엇이든지와 관계없이 이들은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가 아프다는 사실에서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과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하는 행위를 개시한다. 이는 벚꽃수족관 이끼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과 타자에 대한 돌봄(care)이 일으키는 상호 과정 속에서 고통은 우리로 변모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겨울 억새는 이와 같은 역전 현상이 표면적으로 나타난 작품들이다. 겨울 억새에는 외부 침입자로부터 몸을 지켜줘야 할 면역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잔인한 병으로 설명되는 베체트병에 걸린 간호사와 겨울 억새에 등장하는 십이지장과 췌장머리에 암세포를 가진 전직 의사 사내, 그리고 그를 담당하고 있는 유방암에 걸린 간호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누군가를 치료하는 혹은 치료했던 자들이면서 동시에 병을 가진 환자이기도 하다. 이 중첩된 정체성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 한다. 환자의 병에 대해서 일정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그들을 일종의 사물처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들이 자신에게 숙명처럼 찾아온 병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두지 못한다.

하지만 삶에 대해 지독한 집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아픈 자들을 만나면서 이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죄를 짓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죽음을 앞둔 사내의 인공호흡기를 떼려다 벌겋게 충혈된 사내의 눈과 마주친 겨울 억새의 서술자 는 그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금기의 메시지를 읽는다. 그것은 누구도 다른 이의 삶을 대신할 수 없는 이상 그 생명에 부여된 신성함을 함부로 거둘 수 없다는 전언에 다름 아니었다. 인간은 그가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누구로부터도 그의 생명에 대한 모욕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해 는 유전이 아님에도 자신에게 유전된 불치병을 남기고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렸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억세보다 질기고 강한 어머니의 기다림은 생에의 의지를 버리지 않기 위한 고통스런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아랑곳 않고 뱃속의 아이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의 등장인물 영란역시 생명의 유일무이함이라는 가치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정자나 난자를 향해 헤엄친 순간부터 생명은 이미 고결한 것인지 몰랐다라는 생명에의 신념은 김성실의 소설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겨울 억새가 고통의 보편성을 상기시키며 상호 돌봄의 연결고리를 단단하게 매듭지으려 한다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은 시어머니에 대한 돌봄 노동을 하던 여성의 가출을 통해 이 연결 고리가 지속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때 작가는 아내를 가출시킨 가부장 남성을 서술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변명을 읊조리던 가 타자와의 소통에 대한 간절한 욕망을 갖게 되는 변모 양상을 드러낸다. 그는 강한 가장이 되고 싶었다는 변명이 아내를 감시하고 그녀의 공간을 박탈하며(“가끔씩 무언가를 찾는 듯 그림자가 한참동안 멈춰 서곤 했었다. 아내는 재봉틀 놓을 자리나 자신이 머무를 천 조각만한 공간이라도 찾고 있었던 것일까.”) 홀로 어머니 간병을 도맡게 했던 지난날의 행동을 정당화 시켜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누구보다 아내의 의지처가 되었어야 할 자신이 오히려 그녀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해 왔음을,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물려받은 유전병과 같은 피해의식을 아내에게 투사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김성실 소설은 이렇게 다소 뒤늦게 찾아오는 후회에 의해 통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의 비극이 제시된다. 허나 이 비극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김성실은 비극의 와중에도 인간의 영혼의 선함과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가령 수족관 이끼에서 유경은 수족관이 깨지고 나서야 거기에 들러붙어 있던 이끼를 발견한다. 유경은 이끼가 젖은 먼지 같고 비릿한 냄새까지 풍기는 비루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이끼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내 유경은 깨닫는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끼는 자신의 생명을 꿋꿋이 피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를 통해 유경은 자신 역시 강 선배가 뿌리를 내릴 작은 틈새가 되어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삶을 타자의 고통스러운 삶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장소로 기꺼이 제공해 주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작은 틈새가 되어줄 때, 시시하고 비루하고 미미한 존재들도 모욕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니 아픈 것이 대수이랴. 고통으로 인해 우리는 혼자가 아닐 수 있다. 이끼들의 통증연대기는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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