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은 누가 자신에게 구도자 혹은 수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화를 낼 수도 있다. 구도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도를 깨우친 사람이 안 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낙담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소닭돼지를 열심히 씹어 비듬과 무좀으로 만들고 있는뻔뻔한 대머리 아저씨라고 고발하는 사람이다.(옛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 “암처럼 비행기 사고처럼 당연히 남의 일이어야 할 대머리가/내 목 위에 뻔뻔하게 붙어 있다고 남의 일인 양 말하다가,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오라는 곳 없어도 갈 곳은 참 많았겠구나라며 대머리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는다(대머리, ). 옆머리에 희끗희끗한 새치는 있어도 머리숱은 무성한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 이 시가 꼭 시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이 대머리이든 아니든 이미 그것은 중요치 않다. “제 못난 곳을 악착같이 감추어오다 감춘 사실마저 낱낱이들키고 말겠다는 자세로 시를 쓰는 그가 아닌가(오늘의 할 일, 갈라진다 갈라진다). 그는 어쩌다 자기비하의 달인이 되었는가.

김기택은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가 부단히도 되물어졌던 시대를 거쳐 왔다(그는 89년 등단했다). 당시 어쩌다 살아남게 된 자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살아남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도덕적 당위로 타이르지 않으면 안 되는 때였다. 그러다가 불현 듯 90년대가 되자 누군가는 시를 버렸으며 누군가는 시를 신비화시켰고 죽음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신화가 된 자도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기택은 다만 당위에 혹사당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그 어떤 당위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당위였다. 이것은 그가 시를 통해 살아남는, 혹은 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김훈은 김기택의 시가 저울의 자리’(태아의 잠해설)에 놓여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슬아슬한 균형에 얹혀 있으면서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의미였다(그의 지적은 여전히 적확하다). 죽음과 삶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시를 쓰는 것, 그것이 김기택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미학적 사명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그 자신이 아무리 부정할지라도 금욕적인 수행의 길을 걸어왔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법에 여러 설명이 붙기 시작했다. ‘투시적 상상력이라거나 해부학적 상상력’(이광호)이라는 명명이 등장했다. ‘시선의 다중성언어의 다변성’(최현식)이 나타난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은 김기택의 시가 기본적으로 관찰과 묘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데 공감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인식, 마음에 따라 그것을 변형시켜서 더 생생하고 미세한 것까지 표현해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 그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하는 의사의 시선이 아니라 이미 죽은 몸을 해부하는 부검의의 시선으로 시를 쓴다. 그는 카프카처럼 세계를 병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세계는 이미 죽은 것이다. 이것이 김기택의 시가 위태로워 보이는 결정적 이유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자칫하면 진부한 도덕적 관념에 빠지거나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지나친 반작용에 의해 도덕적 스캔들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 가령 사회적 약자들을 등장시키는 그의 시가 어떠한 경계선을 위태롭게 넘나들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의 시는 오히려 이 위태로움으로써 자유자재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아이 울음 하나 새어들어올 틈 없이 빽빽한 이 소리들이

바로 고요의 정체라는 것을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소리들이 돌처럼 내 귓구멍을 단단하게 막아주지 않는다면

내 불안은 내장처럼 한꺼번에 거리에 쏟아져나오지 않겠는가

일시에 소음이 사라져버린다면

심장이 베일 것 같은 차디찬 정적만이 남는다면

갑자기 내 내부의 정적은 공포가 되고

마음속 불안들은 모두 소음이 되어

내 좁은 머릿속에서 악을 써대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행히도 그럴 염려는 없는 것이다

― 「고요한 너무나도 고요한부분, 바늘구멍 속의 폭풍

 

소음으로 틀어 막혀 있는 귀가 고요이며, 그 외부의 고요가 없다면 내부의 불안이 소음이 되어 악을 써댈 것이다. 소음을 통해 오히려 마음의 고요가 있는 것이며, 흔들림을 통해 균형을 얻을 수 있다. 이 발견은 김기택이 세계에 만연한 죽음을, 부정성을, 악을 용인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해서, 그는 자기 자신과도 철저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마음과 육체에도 틈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틈에 의해서 시가 나온다는 것을 그는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빈틈없이(?) 이용한다. 그런 점에서 틈의 미학은 김기택의 시 세계를 떠받치는 기반인 동시에 끊임없는 균열을 만들어냄으로써 그의 성채를 움직이는 것으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 , , 틈틈틈틈틈……/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김기택이 구현하고 있는 틈의 미학은 말과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김기택에게 육체는 죽어서야 착하고 순한 것이 된다. 그 전까지는 추악하고 고집 세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것이 시체가 되어서야 용인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먼지, 소음, 불순물을 만들어내는 틈을 찬양한다. 틈은 무소불위다. 방사선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런데 틈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등장했다. 탐욕이 그렇다. 이 틈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어떻게든 채우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탐욕이다. 연작에서 중량을 늘리기 위해 물을 먹인 소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물결도 바람도 진동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지나치게 부풀고 거짓으로 꽉 찬 치욕의 상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마르고 뻣뻣하고 딱딱한 거짓을 만들어낼 뿐, 생명이 얼마나 연약하고 다치기 쉬운 것인지에 대해 조금도 상관치 않는다. 탐욕에는 끝도, 절제도, 그 어떤 이로움도 없다.

그에 대한 분노가 김기택의 시를 변화시킨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사무원을 보라. 표현은 보다 난폭해지고 상상력은 대담해졌다. 연약한 것들을 물어뜯는 이빨에 대한 증오가 그 자신을 무자비한 이빨, 단단한 가시가 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고상하고 정신적이며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것을 물질과 육체의 차원으로 이행시키는 강도는 점점 강해진다. 심지어 그는 지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의 죽는 모습이 정말로 웃겼을까봐 두려웠다”(조성환의 죽음)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와중에 그의 전매특허인 세련되고 깔끔한 풍자가 풍채를 드러낸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사무원) 이때 그의 시를 김지하의 오적의 계보에 놓을 수 있는 것은, 그의 풍자가 자기 폭로에 이어 자기 모멸, 비하까지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풍자는 대상을 겉돌지 않고 내장까지 까발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김기택은 결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풍자를 성급하게 마무리 짓고 얼렁뚱땅 신명으로 넘어가는 것이 시를 진부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음을 안다. 대신 그의 시는 흥은 덜 나더라도 끈질기게 설득하는 방식을 택한다. 판소리 투가 아니더라도 그의 시가 가끔 요설처럼 느껴지는 것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설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기 검열의 기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그는 미친 사내를 보면서도 그 사내가 정말 미친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차분하고 끈기 있게 설득해야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 사내도 나를 보고 미친 사람이 너무 멀쩡해 보이는구나 생각하며 방금 지하철에서 내렸을지도 모를 일”(멋진 옷을 보고 놀라다, )이라며 다시 한 번 자기 논증의 과정을 곱씹어보기까지 한다. 대상을 허투루 보아 넘기거나 쉽게 단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그에게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결코 재판관이 아니다. 그는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온전히 소화된 것들만을 진실이라고 믿는 회의론자다.

이러한 회의는 때로 위험한 방향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먹자골목에서 풍겨오는 돼지갈비 냄새를 맡고 필시 그 죽음에는 오랫동안 떨던 불안과/일순간에 지나온 극도의 공포가 있었으리라/그러니 이 냄새에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먹자골목을 지나며, 바늘구멍 속의 폭풍)라는 의문을 제기할 때, 그는 다른 존재를 먹어야만살 수 있는 인간의 존재기반을 그 근본부터 흔들어버린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생존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것은 극단적인 회의론에 다다랐을 때 문제 삼게 되는, 인식론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중의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사물을 생명을 제거한 시체로 바라봄으로써, 그는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사물을 죽은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는 폭력이 가정된다. 그는 이러한 폭력을 피하고자 사물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본다. 하지만 사물을 생명이 있는 것으로 바라볼 때, 사물은 인식 자체를 거부하며 인간의 존재 자체가 폭력이라고 항변하고 만다.

사실 이는 앞서 인용한 고요한 너무나도 고요한에서부터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부분이다. 우글우글대는 소음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절시키거나 죽은 상태로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피하려면 틈 없이 빽빽한 소음 혹은 너무나도 고요한 상태를 견뎌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둘 다 불가능하다. 이제 이것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이거나 균형 잡기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때 김기택은 어떤 해결책을 택하는가. 놀랍게도 그는 자신을 사물의 자리에 내려놓는다. 이러한 변화는 관찰자의 입장을 도치시킨 것이되, 사물이 아니라 자신을 죽은 것으로 치부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제 그는 사물로서말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실험은 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된다. 졸음운전을 하는 버스 기사의 위험천만한 곡예를 유쾌하게 그려내는 것이나(즐거운 버스) 죽어서 받을 사람이 없는 데도 쌓여 가는 우편물들에게서 말을 사정(射精)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혀를 발견하는 시(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같은 것을 보라.

이러한 시들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묘한 공포감을 주는데, 그것은 사물들의 소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시선을 전복시킨 데서 오는 쾌락이기도 하다. 공포의 쾌락, 쾌락의 공포. 이로써 그는 일부러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두었던 금기의 영역을 파헤치는 반휴머니즘 실험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이제 김기택 시의 그로테스크함이 살기를 발하기 시작한다. 끔찍한 범죄현장과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첩시킨 다음 시들을 보라.

 

(영계의 흰 넓적다리 속에 삽입되는 순간 발기되는 이빨. 부드러운 근육의 탄력으로 이빨을 조여오는 육질. 쫄깃쫄깃하게 저항하다가 뜯겨지는 난폭한 뿌리들. 끈적끈적하게 분비되는 침들. 맛의 오르가슴을 느끼고 부르르 떠는 엄지발가락. 혀를 꽉 껴안고 전육하는 닭살.) 으으, 먹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 핫크리스피 치킨!

, 잠깐, 잠깐만. 건강이 막 나오려고 그래. 아으, 참을 수가 없어. 가만히 좀 있어봐. 쌀 것 같단 말이야.

― 「건강이 최고야부분,

 

방금 성폭행당한 요도(尿道)에서 나오는 뜨거운 오줌으로

팬티와 치마와 에쿠스 시트가 다 젖는 줄로 모르는 떨림으로

목 조르는 팔뚝 속으로 스며드는 월척 같은 파닥거림으로

그 꿈틀거림으로 더욱 짜릿해져가고 있을 손맛으로

그 손맛 때문에 더욱 단단하게 조여지고 있을 모가지로

아무리 격렬하게 발버둥쳐도 고요하기만 한 모가지로

빨간 스타킹 자국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모가지로

― 「목을 조르는 스타킹에게 애원함부분, 갈라진다 갈라진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고행과 징글징글한 그로테스크를 넘어서 오싹한 호러의 현장에 당도하였다. 세련되고 절제된 풍자의 칼날을 휘둘렀던 그가 이제 과격하게 피가 낭자한 살인의 추억을 향유하시 시작했다. ‘강간건강으로 바꾸었을 때 발휘되는 오싹함, 인간의 괴물스러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그는 역으로 조장한다. 너의 건강을 위해 강간당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참으로 지독하지 않은가. 목을 조르는 스타킹에게 애원함은 또 어떤가. 희생자가 아니라 범죄자의 쾌락을 그는 추궁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범죄자의 쾌락을 욕망하는 쾌락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이로써 이 범죄자의 쾌락에 몸서리치는 자의 내면에, 대리만족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발해낸다. 그러니 이 범죄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다소 진부한 해석이 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변화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펼쳐진 연옥의 단면을 목격할 수 있다. 노동의 고행을 강요하던 시대에서 구직난에 시달리다가 삶의 치욕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택하는 시대(구직)로의 이동. 죽음마저 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한 사랑으로 포장되어 팔려나가고(생명보험), 살려달라는 말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할여으에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할여으에어) 지옥 같은 삶의 나날들. 그런데 김기택은 이러한 현실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절대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너무도 끔찍해서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는 외설적인 어떤 부분을 건드린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쾌락을 즐기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이 목을 조르는 스타킹에게 애원함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도착적 진실이다.

도대체 목을 조여 오는 공포가 가상일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믿는 이상, 그들은 공포의 견고한 벽에 부딪혀 태아의 발가락처럼 꿈틀거릴 뿐”(, )이다. 김기택이 사물, 이미 죽은 자, 죽어가고 있는 자의 입을 빌려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러한 심상치 않은 변화와 관련되는 것일 게다. 살아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닌 어떤 것들이 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방울”(거품)하며, 부글거리고 우글거리는 파괴와 탄생의 장면을 그는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도 모르겠다. 거기에서 자궁을 부숴버리고 바깥으로 나오는 씨앗들의 그 번개 같은 힘이 나오는 것일까. 스스로의 목을 조르던 힘이 무언가를 잉태해내는 생명의 힘으로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일까. 도무지 주위가 어둠이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온몸이 어둠이라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암구름과 수구름은 몸이 달아 자꾸 으르렁거리는데

땅과 어둠은 서로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고 들썩거리는데

암우주와 수우주는 서로 꼬리를 물고 돌며 똬리를 틀고 있는데

― 「번개를 기다림부분, 갈라진다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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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진의 시는 인공에 대한 것이다. 거기에는 우연이 들어설 틈이 없다. 그의 시집 동경(창비, 2011)에서 이러한 구절을 발견한다. “오늘 내가 연 문과 닫은 문의 개수가 같을까봐 무섭다 우리에겐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없을지 모른다.”(그의 각오) 이 구절을 읽고 정말로 무서워졌다. 나 역시 그와 동일한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는 실감 때문이었다. 세계가 자신에게 열어놓은 가능성만을 전부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다. 우연성이 제거된 세계에는 어떠한 생성도 불가능하다. 목적론적 필연성과 인과론의 법칙에 갇혀 활력을 잃어버린 인공의 세계에서는 동일성만이 반복될 뿐이다. 하지만 최정진의 시는 이 인공의 세계를 신비로운 자연에 대한 환상으로 대치시키지 않는다. 필연성이 지배하는 인공의 세계에 우연을 도입하기 위해 있는 힘껏 안간힘을 다할 따름이다.

 

누군가 익은 열매를 손에 쥔다. 나와 내 마음이 떨어진 것 같이 뛴다. 여기서 사랑이 시작된다면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미 떨어진 것으로부터,

떨어진 것 같은 순간은 무엇인가.

 

누군가 익은 열매를 손에 쥔다. 그것을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새라고 믿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그런데 나와 내 마음도 이전엔 붙어있었다는 듯이 뛴다.

 

여기서 사랑이 시작된다면 누군가 돌아왔냐고 묻는다.

 

나와 닮은 나뭇가지들을 분질르러 왔습니다. 등 뒤에서 여러 명이 한 목소리로 답한다.

― 「인과전문

 

인과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인과 작업은 폭력적인 것으로 귀결되기 쉽다. 서로 관련이 없는 것들을 일정한 목적에 따라 배치하면서 그와 관련이 없는 성질들을 무차별하게 소거시키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는 사랑을 인과 관계로 설명하지 않는다. 어떠한 인과관계에 의해 사랑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일까. 최정진에게는 두 대상이 떨어진 것 같을 때 사랑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리고 설명을 덧붙인다. 원래 그 두 대상은 붙어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미 떨어진 것으로부터,/떨어진 것 같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설명에 다시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쯤에서 시인은 말을 멈춘다. 아니 오히려 그 자신이 묻는다. 그 순간은 무엇인가.

여기서 다시 누군가 익은 열매를 손에 쥔다는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그리고 시는 변주된다. 일종의 실험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장면의 반복은 시에서 사랑은 어떤 순간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시에 우연을 도입하여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차이를 통해 인과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이 그것이다. 최정진은 여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사랑의 실험을 통해 누군가 돌아왔냐고 묻는다.” 실험결과 무엇이 도출되었는가. “등 뒤에서 여러 명이 한 목소리로 답하는 소리를 듣는다. 하나와 같은 다수성, 다수적인 하나의 산출. 그리하여 첫 번째 실험은 종료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실험. 이는 니체와 보들레르의 가설에 대한 반증명((disproof)이다. 니체는 자연은 우연이다.”라고 했다(우상의 황혼). 권력과 의지를 결합해서 우연의 파도들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니체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인공을 낙원으로 변모시키려는 실험에 착수했다. 이들의 가설은 과연 성공적인가, 최정진은 의문을 품는다. 인공에서 어떻게 낙원이 가능한가. 그것은 혹시 자기기만은 아닌가. 아니 질문을 바꿔야 하는 지도 모른다. 보들레르가 말하는 인공의 세계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어떤 일도 벌어질 것 같지 않은 폐쇄적인 인공의 세계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과연 어떠한가. 이에 대한 최정진의 결론. 낙원은 사라지고 호수만 남았다. 이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인공낙원사이에 어떤 차이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누르는 것이다.

 

둘레에서 둘레로

우리는 서로에게서 생것을 맛본다.

 

풀밭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풀밭으로

우리는 누르지 않아도 넘치지 않는다.

우리에게 걸은 기억은 없다.

 

둘레에 한가운데가 많아진다.

 

우리는 눌러도 넘치지 않고 생것이 넘친다.

― 「인공과 호수전문

 

인공과 호수는 대등하다. 인공적인 호수가 아니라 인공호수를 각각의 개별체로 인정해야 한다. 인공적인 것에서 낙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보들레르적인 가능성은 종료되었다. 세계는 닫혀 있고 이 닫힌 세계에서 가능한 것은 인공에서 낙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과 낙원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대신 결합되었던 하나의 기호를 둘로, 혹은 넷으로 다섯으로 증식시키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때 분열된 기호들은 각자가 자신의 중심을 가져야 한다. 둘레가 둘레로 남지 않고 둘레에 한가운데가 많아지게 하는 것이 실험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생것이 그 다수들 내에 존재해야 한다. ‘생것야외라는 시에서는 날것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바, “오전의 볕에 드러난 건물의 낡음에서/근사한 의미를 만드는 것과 등치된다. 낡음에서도 근사함을 만들어내는 근사한 기술, 그것이 사물들에 각자의 중심을 부여한다.

보들레르에게 인공낙원은 축제적인 가운데 가능했다. 영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삶속에서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하지만 최정진의 낙원은 도취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누르지 않아도’ ‘눌러도조건이 변하더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성취되는 결과를 원한다. 그의 시 작업을 실험에 비유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나뭇가지들을 분질르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단호함과 차가워진 음식을 일그러진 표정으로/먹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자기 처벌적인 측면마저 있다.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실험조건을 조금씩 변형시켜 가면서 그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어내려는 것일까. 무엇이 이렇게 진지한 것일까. 혹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이 그를 이토록 진지하게 만든 것일까. 그는 감히 도취와 죽음의 상관성을 논할 여력이 없다. 그는 그저 문이 닫혔다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계단이 유일한 텅 빈 실내에서

누가 의도를 선점할 수 있든.

해석과 맞설 수 있든.

내가 문을 여는데 쓰는 열쇠를 누군가 문을 닫는데 쓰든.

문이 닫혔다는 것만으로 고통 받는 것.

너는 고통만으로 열린 것.

날카로운 것, 풀려나오는 것, 일어서는 것이 웅성인다.

나를 잠그고 네가 울리지 않는다고 울었을 것이다.

웃음이 의도를 의도할 수 있는가

너는 문이 벽이 되지 않는다고 울었을 것이다.

열쇠가 헐고 갈라지는 것, 파헤쳐진 것, 솟는 것이 웅성인다.

― 「빛과 타워전문

 

필연은 문을 열거나 닫는 데 꼭 맞는 열쇠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문이 열리거나 닫히는 것과 상관없이 그 세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주는 고통이 있다. 문을 열고 나가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고통, 차라리 문이 벽이기를 바라는 절박함. 그러니 누가그 문을 열고 닫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이 시는 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통에서 시작된다. 고통만으로 열리는 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과연 는 누구인가.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아마 미로일지 모른다. 최정진이 실험의 연속을 통해 만들어낸 것은 일종의 미로다. 폐쇄된 공간을 미로로 만들어내려는 열정이 그의 실험을 작동시킨다. 그것은 배분의 작업이기도 하다. 벽을 만들고 문을 만들어 자신을 헤매게 하는 것이다. 없는 공간을 있는 공간처럼 만들어 갇혀 있다는 데서 발생하는 고통을 망각케 할 수 있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문은 오히려 절망의 비유가 된다. 다만 계단 밖에 없는 텅 빈 공간을 웅성이는 미로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시에 나오는 울음과 웃음의 의미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실험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탓이다. 헐고 갈라지고 파헤쳐진 것, 솟는 것으로서 웅성이는 우연이 무엇을 생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도 불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최정진이 만들어놓은 인공의 세계에 필요한 것은 우연의 높이마저도 선점할 수 있는 초월적 시선일지도 모른다. 그가 만들어놓은 미로에서 우연은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되어야 한다. 만일 스스로가 아리아드네가 아닌 미로에 갇혀 버린 테세우스가 되어 버린다면 인공과 날것, 울음과 웃음의 차이를 따지는 것조차가 무색한 일이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웃음은 어떠한 의도가 아니라 그저 우연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웃음을 통해서 근사한 의미로의 솟아오름도 가능해진다. 그래야만 이러한 작업은 그의 다음 시가 예고하는 것처럼, 이미 펼쳐져 있는 사전을 다른사전으로 펼쳐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방엔 사전이 있다. 그것은 두껍다. 언제나 놓인 채로 펼쳐져 있다. 펼쳐져 있는 페이지가 펼쳐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의 방엔 음식이 넘치고 옷이 넘치고 그것들은 상하지 않는다. 상하지 않는 음식과 옷들이 그의 방을 무너뜨렸다. 그의 집이 있는 골목들이 복잡해진다.

 

그는 시간과,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없었다.

― 「무더운 번역전문

 

빛과 타워가 미완의 실험이라면 무더운 번역은 일종의 실험에 대한 설계도처럼 읽힌다. 앞으로 진행될 실험을 예상하며 어떠한 조건들이 세팅되어 있는 상황을 체크해 보자.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언제나 놓인 채로 펼쳐져 있는 두꺼운 사전이다. “상하지 않는 음식과 옷은 이 사전에서 제시하는 고정된 의미에 대해, 아니 사전의 존재하는 양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불어나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있어도 음식은 익어 상하지 않는다”(인과)라는 것은 펼쳐진 것을 펼쳐진 것으로 두되, “펼쳐져 있는 페이지가 펼쳐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라며 해석의 미로를 만드는 무위의 작업을 통해 생성되는 인과의 작용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미로의 복잡성을 만들어낸다.

에셔의 무한한 공간으로서의 미로를 떠올려보면 최정진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이해하기가 수월할 지도 모르겠다. 2차원의 세계를 3차원으로 변화시키는 에셔의 마술은 평면을 분할하는 대칭과 순환의 원리에 따라 무한을 만들어낸다. 이 무한의 공간에서 죽어 있던 사물은 운동을 시작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생것의 근사한 의미에 근사(近似)하려나. 그러니 최정진이 만들어낸 이 미로의 공간에는 시간이 무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공간에는 무한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주체와 타자, 안과 바깥이 분리되지 않는 이 무한의 공간에서야말로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다. 가령 두 나선형 띠가 한 여성과 남성의 두상을 두르며 하나의 띠로 이어져 있는 에셔의 <확고한 유대>같은 것. 그들의 앞과 옆, 뒤를 떠다니고 있는 공들이 무한한 시공간을 상징한다는 화가의 친절한 설명도 함께 첨부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가설을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최정진이 생것이나 날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익은 열매를 사랑하기 위해 그것을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새로 변형시키는 작업과 같은 것이다. 이를 통해 시시하던 사물의 의미는 근사한 것 혹은 살아 있는 생것’ ‘날것의 웃음으로 변한다. 이것들은 폐쇄된 공간에 숨 쉴 통로를 뚫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 변형을 가하여 사물에 차이를 도입하는 것, 그리하여 차이와 그 차이로 인해 발생한 다수성과 우연을 모두 긍정할 수 있게 하는 실험. 최정진은 평면적인 폐쇄회로를 입체적인 무한으로 변형시키는 마술적인 실험을 하는 중이다.

 

2015 <현대시>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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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이미지즘의 세계

차한수, 뜨거운 달(서정시학, 2015)

 

한국 현대시에서 '이미지즘의 계보에 속하는 시는 도시적 풍경을 중심에 둔 김광균이나 김기림 식의 차가운 이미지즘과 자연적 풍경을 중심에 둔 정지용, 신석정, 장만영 등의 따뜻한 이미지즘의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가 도시적 서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주지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낸다면, 후자는 자연적 서정의 계열로 청신한 감각과 세밀한 언어표현을 통해 세계를 표현하려는 경향이 주로 나타난다. 물론 이들 시인이 단일한 시풍을 고수한 것은 아니다. “작은 어족(魚族)의 무리들은 일요일(日曜日) 아침의 처녀(處女)들처럼 꼬리를 내저으며 돌아댕깁니다”(바다의 아츰)라며 김기림은 자연의 생명력을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 한편 촉촉이 젖은 리본 떨어진 낭만풍(浪漫風)의 모자(帽子) 밑에는 금()붕어의 분류(奔流)와 같은 밤경치가 흘러 나려갑니다라며 우수에 젖은 도회의 풍경을 예리하게 잡아낸 정지용의 황마차(幌馬車)에는 모더니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나타나 있다.

갑작스레 1930년대 이미지즘의 계보를 꺼내본 것은 차한수의 이미지즘이 지니는 변별점을 짚어내기 위함이다. 차한수의 시들은 자연의 이미지들을 섬세하게 조탁된 언어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따뜻한 이미지즘의 계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조창환은 이 시집의 해설에서 그의 시는, 그러니까 고독한 이미지스트 혹은 고립된 결벽주의자의 초상화라 할 수 있고, 그 고독감과 고립감을 꼼꼼하게 조립하고 재현하여 보여주는 섬세한 언어적 세공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향토적이며 자연친화적인 이미지들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일정한 미학적 거리감 속에서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집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뜨거운 달과 같은 작품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곁불처럼” “꽃망울처럼” “물결처럼과 같이 직유법을 주로 사용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차한수의 시집에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한 이미지즘의 차원 역시 발견된다. 그것은 그가 단순하고 소박하게 자연에 대한 서정을 노래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물의 본질에 닿으려는 투사의 시선을 보여줄 때 나타난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야만인의 허기가 강심에 고인 달을 훌훌 마십니다.

 

봄날 썰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래를 바라보고, 밤이 깊어 가면 그리운 달빛이 뜨거워 그대 이름만 부릅니다.

 

아무리 눈을 떠도 캄캄한 사랑, 파도의 산맥처럼 멀어지고 있습니다.

― 「고백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야만인의 허기”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래” “파도의 산맥과 같은 것은 이미지즘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흄(T. E Hulme)이 강조했던 명료하고 견고한 이미지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이들 이미지는 세계를 지성의 작용에 의해 고정된 이미지로 바라보는 근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야만적인시선에 의해 추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달에 수록된 시편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뜨거움은 여기서 기인한다. 그칠 줄 모르고 달빛을 집어삼키는 봄날 썰물의 도도한 흐름을 야만인의 허기에 비유하고 있는 이 시에서 일종의 광적인(lunatic) 열광과 도취를 발견할 수 있다. 허나 정작 허기를 느끼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달빛의 뜨거움에 도취되어 그대의 이름을 불러보는 자신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빈속에 독주를 채워 넣듯이 허허로운 마음을 뜨거운 달빛으로 달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와 같이 차한수의 뜨거운 이미지즘은 사물을 투시하는 시선으로 사물의 깊이를 끄집어내려고 한다. 이럴 때 이미지는 단순히 세계의 표상으로 나타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체의 내면을 달구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그러고 보면 달과 광기의 관계에 대한 소박한 탐구는 정지용에게서도 제출된 바가 있다. 정지용은 달과 자유라는 글에서 이태백의 어머니가 태몽에 달을 집어 먹고 이태백을 낳았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이태백의 광적인 주정과 달은 선척적인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환한 달빛 아래 미친 듯이 짖어대는 개를 보다가, 사람도 그와 다르지 않아서 달 밝은 밤에 골목으로 돌아다니는 청년의 발작에 가까운 잡가 소리를 떠올리거나 소박담장(素服淡粧)한 미망인들이 나돌아 다니는 장면을 언급하는 식이다. 이런 점에서 정지용 역시 그것을 광기라고 표현했을지언정 이는 인간이 도덕적인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능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것은 이성의 눈으로 보건대 그야말로 광기 어린 시선이 아닐 수 없다. 과학적 인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시가 외면을 받고 있는 이유 역시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에 기인할 것이다. 이미지즘은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에 대응하여 시가 간결하고 정확하며 뚜렷한 이미지를 통해 과학적 인식과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가 과학적 진술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무엇을 의도하고자 하는 것 역시 분명해야 한다. 이때 차한수의 시는 이미지에도 깊이가 있으며, 이 깊이를 보여주지 않는 시란 과학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파편화하고 주체를 분열시키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야만인의 시선이 필요한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세계를 통합적으로 인식하여 사물들에 내재해 있는 열기를 감지해내기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뛰어난 이미지스트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김기림이나 정지용이 모더니티에 대해 표명하는 날카로운 비판의식 역시 이러한 야만적인 시선의 재발견을 통해 모더니티를 낯설게 인식하고자 하는 리얼리즘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시선은 차가운 것이자 동시에 뜨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미지에 깊이에 열기를 더하기 위해서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칠흑의 어둠이 깊다

 

소나기 묻어오는 먼 산을 바라보고

 

거꾸로 선 이름을 찾다가 눈을 감았다 떴다

 

어깨 너머로 스쳐간 수많은 어제가

 

돌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밭두렁을 날고 있는 노랑나비를 보다가

 

말라버린 듬벙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거꾸로 선 나무를 불러보다가

 

안개비로 젖은 몽돌이 말이 없다가

 

이슬 머금은 수수 이파리 맞는 아침을 기억하고

 

땅을 뚫고 손 내미는 달래 냉이

 

눈짓에 취한 노래가 하나 둘 별이 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물구나무서서 보기전문

 

이미지는 눈이 아니라 기억으로 보는 것임을 차한수의 시를 읽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 눈은 머릿속에 기억된 것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구성해낸다. 보는 것이 단순히 생리적인 작용이 아니라는 것은 눈을 감을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된다. 이 시에서도 본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파악해야 한다. 세계를 볼 때 그것은 곧 자신의 심연을 보는 것이다. 그 심연을 통해 차한수는 이미지에 내재한 온도를 읽어낸다. 어두워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는 어깨 너머로 스쳐간 수많은 어제의 눈으로 다시풍경을 본다. 감았다 뜬 눈에 이런 저런 기억들이 교차해 가면서 풍경을 엮어낸다. 이러한 이미지는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에도 절절해서 금세 뜨거워진다. 그렇게 본다는 것과 기억하는 것이 눈짓으로 서로 소통하면서 노래가 만들어지고 또 그 노래가 별이 된다는 발상은 얼마나 시적인가.

그런 점에서 이 시에서 말하는 물구나무서서 보기는 사물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의 기억은 성운(星雲)이라는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전설(傳說)로 그려진다. “액자 속 별들의/솔씨 같은 기억//정적이 깊어갈수록/나무액자의 네 각이 비죽비죽 틀어지는/이 되어/물속을 걸어가는 전설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혹은 바다가 뛰면과 같은 시에서 바다가 뛰면/해질녘 서산마루에 걸린/물비늘이 뛴다/매티미가 뛴다/숭어가 뛴다라면서 이미지의 율()을 노래하는 것은 어떤가. 차한수는 어둠, , , 바다와 같은 자연물들을 기호 체계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이미지 세계를 구축해내는데, 이것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상상적 이미지들을 엮은 것이라는 데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 초월적 세계를 그리는 신화와 달리 전설은 어떤 공동체의 내력이나 자연물의 유래와 같은 것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것이어서, 거기에는 사물과 관련된 기억에 얽혀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들이 올올이 배어 있다.

 

돌고래가 거울을 보고 웃었습니다

웃는 얼굴이 우스워 울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웃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울음도 간 곳이 없습니다

다시 보아도 우는지 웃는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웃음과 울음이 엉겨

밤새도록 우박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 「돌고래가 거울을 보고전문

 

이 시에서 거울뜨거운 달이나 고백에 등장하는 달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사랑에 대한 허기로 달빛을 꿀꺽꿀꺽 삼키는 목마른 자의 애타는 시선이 우박과도 같은 별빛이 쏟아지는 바다를 유영하는 돌고래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돌고래는 거울-달을 보고 웃다가 울다가 한다. 그렇게 돌고래의 웃음과 울음이 파도의 일렁임 속에서 하나로 엉겨서 그것이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지경까지 되어 버린다. 이미지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를 전제로 한 것인데 반해, 차한수가 그리는 이미지는 사물의 표면을 뚫고 들어갔다가는 그 안에서 들끓고 있는 뜨거운 사랑의 에너지를 발견해내고는 그 이미지를 온통 방사(放射)시켜 버린다. 그의 시에서 이미지가 마치 광선으로 변환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는 울음과 웃음으로 사물의 표면에 균열을 내고는 그 안에서 잠재되어 있던 블랙홀과 같은 어둠을 끄집어내어 사물에 농축되어 있는 에너지를 폭발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전략은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태도와 관련되는 것일 게다. 가령 맨발의 허무를 빨간 피의 열기로, 그리고 그 열기로 인해 재가 되는 장면으로 변용시켜낸 발바닥의 숨소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차한수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유동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그러니 그에게는 당연하게도 이미지 역시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차한수의 시에서는 직유보다 은유가 빛을 발한다. 거칠게나마 정리하면, 직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 모두를 각자의 자리에 고정시켜 놓고 양자를 연결시키는 다리를 놓는 전략을 취하는 데 반해,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양쪽에서 밀어붙임으로써 이들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지평을 발견해내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차한수의 경우에는 밀어붙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애를 웃음과 울음으로 번갈아 전환시키면서 이미지의 화학반응을 통해 역동적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이런 점에서 우박처럼 쏟아지거나 해처럼 솟구치는(솟아라 솟아라 해야 솟아라) 이미지들의 역동성을 차한수의 뜨거운 이미지즘을 정의하는 특성으로 추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서정시학> 2015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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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힘을 잃어가는 시대다. 말은 타락하고 상처 입으며 정착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말 바꾸기, 우기기, 유체 이탈적인 영혼이 없는 말들에 의해 말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가면서 가벼워진 말들이 어느 때보다 현실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허하고 아무 의미도 담보하지 못한 말들이 그 어떤 말들보다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게 된다. 소통의 가능성을 불신하게 만드는 말들은 냉소와 환멸의 언어를 생산하거나 침묵을 택하게 한다. 말의 힘을 부정하는 말들이 그 어떤 말들보다 강력한 위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말의 힘을 박탈하려는 이들이 내보이는 퇴행성은 무지가 아니라 계산된 영악함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이 지닌 효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말의 지옥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판도 안에서, 그들과 다른말을 고안해낼 수 없는 극단으로 치우쳐갈 때 비로소 펼쳐진다. 용산 참사 이후, 그리고 세월호 사건 이후 시가 써지지 않는다는 시인들의 고백을 들으며 그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몸서리가 쳐졌다. ‘말 같지 않은 말이 횡행하는 이 세계에서 글을 쓸 수도 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 시인들은 갇혀 버린 것이다. 쓴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며, 그것은 글이 아니며,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참담함, 이러한 참담함을 시인 자신만의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말이 말하게 함으로써 그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시의 역할이 아니던가. 말의 지옥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그 누구보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말 그 자신이다. 김근의 다음 시는 그렇게 읽힌다.

 

천사는 어떻게 우는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우리가 쏟아진 얼굴을

미처 쓸어담지 못하고 우물만

쭈물만 거려 거리고 있을 때

금 간 담벼락에나 우리의 심장이

가까스로 숨어만 들어 들고 숨이

숨이 수숨이 헐떡 헐헐떡 헐떡만

대는 개의 혓바닥에서처럼 토해져

나올 때 뜨거울 때 뜨거워도

마지막 표정은 기억나지 않고

마지막 눈빛이 마지막 발음이

마지막 목소리가 마지막 풍경이

마지막 당신이 발 없는 바람이

무수히 발자국을 찍어 바람의 행방

도무지 알 수 없고 주름도 없이

구름은 마지막 짠 먼지들을 끌어

올리는데 기억은 나지도 전혀 않고

마지막이라고 말할 때 마지막

입술의 녹청이 이마의 서늘함과

눈꺼풀의 떨림이 온전한 얼굴도 없이

헤아릴 수 없는 저녁의 모든 모음들

죄 관절이 꺾이는데 허여 허옇게만

그만 흐너지고 흩어만 지고 모음들

골목의 어느 창문에도 입김조차

불지 못하는데 아직 다 쏟아지지 않은

얼굴 간신히 손으로 가린 채 죽었는지

살았는지 천사는 천사 천사 천천사는

어떻게 우는가 어떻게, 살아, 나나

김근 천사는 어떻게, 창작과 비평가을호

 

이 시에서 말의 더듬거림은 흐느낌에서 비롯한다. 울음을 참으려고 할 때 흐느낌은 딸꾹질로 변하며 말을 머뭇거리게 한다. 이 시는 그렇게 울음을 참으려는 머뭇거림에서 비롯한다.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라 그 당사자의 고통으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의 위치에서 이 시는 쓰여 졌다. 이 시의 발화 주체는 고통을 당한 당사자는 아니다. 그는 그 당사자에 대한 기억을 붙들고 있는 최후의 목격자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 기억을 마치 자신의 목숨인 양 놓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묘사할 수조차 없는 그 고통 때문에 그는 자기 존재가 해체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려 있다. 시에서 쏟아진 얼굴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이를 암시한다. 이때 헤아릴 수 없는 저녁의 모든 모음들은 그 마지막을 공유할 수 있게 해 주는 담보물이 된다. 그 무엇도 기억이 나지도 않고 다만 고통스러웠다는 사실만이 상흔처럼 남아 있는 가운데, 말은 그 형상은 온전히 갖추지 못하고 흩어진 채로 기록된다.

말이 처해 있는 극단의 절망이 그 말을 하는 존재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의 극단과 존재의 절망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이에 대해 말하기 위해 김근은 더듬거림을 들고 온다. 이때의 더듬거림은 말을 더듬는 것()이기도 하다. 고통이 섞이지 않은 말로는 천사의 말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울퉁불퉁하고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라며, 순서가 어긋난 말들을 통해 말이 처한 위기가 비로소 드러난다. 김근은 말이 지향해야 하는 초월적 지평을 천사의 존재로 암시하는 한편, 거기에 도달하려는 몸짓이 온전한 표현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말을 더듬듯,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천사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천사의 울음을 자신의 심장에 새기지 않고는 천사를 살려낼 수 없다. 말을, 혹은 천사를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 그와 함께 울어야 한다. 분열되고 해체된 존재들을 다시 조립하여 복원해내는 존재로서 천사는 이렇게 불려나온 것은 아니려나.

이와 달리 다음 시에서 이은규는 홀로 고백하고 선언하는 존재로서 미치광이 시인을 가져온다. 자못 비장한 데가 있는 이 시에는 김근의 시와는 다른 차원의 절박함이 배어있다.

 

모든 고백은 선언이다

 

나는 안장에 앉아 고삐를 쥔 자가 아니어라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어라

노래는 말이 아니어라

 

마부의 채찍질에도 꼼짝하지 않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는 한 사람

세상이 수근거린다 지혜를 사랑하다니, 미치광이

 

그가 오래 흐느낀 이유는

동물의 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세상의 말에 귀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 펜을 쥔 자가 아니어라, 나는

향기로운 문장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어라

말은 노래가 아니어라

 

나는 누군가 늦췄다 당겼다 하는 고삐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발자국

누군가 함부로 휘두르는 채찍에

고개 숙여 히잉먼 소리를 내는 목울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하는 자

그러나 나는 이 은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고삐를 움켜쥔 손아귀의 힘을 상상하며

채찍을 다루는 손목의 습관을 증오하며

 

말보다는 노래에 노래보다는 말에

그보다 행간 사이를 서성이는 동안

초록이 진다 한들, 온다 한들 한 점 꽃이

그러나 나는 이 은유를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오래 미치광이라 불리는 사람과 같이

가까스로 초록을 지키는 식물과 같이

이은규, 말의 목을 끌어안고, 현대시학8월호

 

이 시는 지나치게 꽉 차 있다. 가령, 이 시는 미치광이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치광이의 언어를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를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다짐하는 형태를 띤다. 다만 이렇게 설득하고 다짐하는 가 남아 있는 이상, 이 시는 다른 누군가가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는 부정의 제스처로 표현될 따름이다. ‘는 말의 고삐를 쥔 자,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며, “책상에 앉아 펜을 쥔 자향기로운 문장을 휘두르는 자도 아니다. 노래는 말이 아니고 말은 노래가 아니다. 이로써 이 시는 말(/)이 학대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인 자의 부끄러움을 증언한다. ‘는 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말의 목을 잡고 운다고 한들, 짐작할 수 없는 말의 고통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흐느껴 우는 것은 말의 고통에 무감한 사람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해하지도 못하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자를 미치광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여기서 시인은 은유를 요청한다. 은유는 이러한 부끄러움을 뚫고 타자의 고통에 닿으려는 초월의 필요성에 의해 불러내어진다. 은유를 통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발자국이자 고개 숙여 히잉먼 소리를 내는 목울대가 된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은유를 통해 행간 사이를 서성이는존재의 언어를 발견해낸다면 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어쩐지 이 시 스스로가 은유의 불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으로 읽히는 것은 왜일까. “그러나로 이어지는 시인의 선언은 지나치게 단호하다. 어째서 시인은 이와 같이 단호하고 직설적인 어법으로 은유를 다짐할 수밖에 없는가. 이는 김근의 더듬거리는 말만큼이나 말이 혹사당하고 있는 이 시대의 증후인 것은 아닐까. 이러한 증후에 화답하는 것으로 다음의 시를 마지막으로 읽어보자.

 

모았던 손을 풀었다 이제는 기도하지 않는다

 

화병이 굳어 있다

예쁜 꽃은 꽂아 두지 않는다

 

멈춰 있는 상태가 오래 지속될 때의 마음을

조금 알고 있다

 

맞물리지 않는 유리병과 뚜껑을

두 손에 쥐고서

 

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너의 등을 두드리면서

 

부서진다

밤은 희미하게

 

새의 얼굴을 하고 앉아

창 안을 보고 있다

 

노래하듯 말하면 더듬지 않을 수 있다

안이 더 밝아 보인다

 

자주 꾸는 악몽은 어제 있었던 일 같고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물에 번지는 이름

살아 있자고 했다

안미옥, 아이에게, 시와 반시가을호

 

안미옥의 시는 고통스런 외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면서 어둠을 빛으로 바꾸어낸다. 그것은 기도와 같은 초월적인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변화 없는 세계를 견뎌야 하는 막막함을 금세 시들어버릴 꽃의 유한한 아름다움에 기대어서는 버틸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세계와 주체의 관계가 딱 들어맞아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과 주체의 관계도 다르지 않아서 하고 싶은 말이 오롯이 전달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말하는 존재에게 허무함을 던져준다. 김근이 머뭇거림을 통해, 이은규가 은유를 밀어붙임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려 했다면 안미옥은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 그녀의 시에서 간결하게 배치된 단어와 문장들의 연결은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 가운데 희미하게 부서지는 밤의 풍경이나 창 안을 바라보고 있는 꿈결 같은 이미지들이 나타나고, 이렇게 노래하듯 이어지는 이미지들의 부드러운 연쇄작용은 부서지는 밤의 악몽을 그저 어제 있었던 일처럼 심상히 지나가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안미옥의 시는 김근과 이은규의 시에 화답하는 것처럼 읽힌다. “노래하듯 말하면 더듬지 않을 수 있다는 구절이 특히나 그렇다. 안미옥은 고통을 꼭 쥐고 붙잡고 있지 않는다. 슬쩍 놓아주며 말 스스로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기까지를 기다려 주는 것 같다. 안미옥의 간절함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귓가를 맴도는 멜로디쯤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불러주는 자장가처럼 그녀의 노래는 아련하기만 하다. 타인에 대한 위로를 하는 것이 그 자신을 위로하는 차원으로, 자신에 대한 위로가 또한 타인에 대한 위로로 소통하는 조심스러운 관계 속에서 주체의 견고함은 물에 번지는 이름처럼 흐려진다. 그리하여 마지막의 살아 있자는 청유는 다분히 중의적으로 읽힌다. ‘살아 있음이 무엇일까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물음은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심연이 망각되어 가는 시인들은 죽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살아 있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시로 여는 세상> 2015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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