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베란다 원예
이토 세이코 지음, 김효진 옮김 / 플레이타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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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넘 이쁘고 내용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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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말들>을 지하철을 오가며 읽고 있다. 국문과 글쟁이가 글쓰기 수업을 맡아서 하면서 어떻게 하면 글을 처음 써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쓰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궁금해서 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책을 잘못 고른 것 같다.

 

이 책은 글을 쓰고 싶은데,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못 쓰고 있는 사람에게 글 쓰기란 이렇게나 매력적인 것이야, 얼른 써, 써, 라고 충동질해대는 책이기는 하지만 나처럼 글쓰기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야 하는 사람을 위한 책은 아니었다. 학점을 따기 위해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게 글쓰기의 매력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 수업의 목적 자체가 학술적 글쓰기 그러니까 소논문에 대한 것이고보면 이 수업 자체가 글쓰기의 매력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다만 이 책은 학생들이 아니라 나를 위해 '유용'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게 만들었고 또 앞으로도 매일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글을 쓰리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글을 잘 쓰고 싶으면 매일 쓰면 된다는, 그리고 스스로가 싫어질 만큼 자기 생각 없이 실실 웃기만 하는 바보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되고 싶으면 글을 써야 겠다는 단순하지만 어마어마한 깨달음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인상깊은 구절을 하나 적어둔다.

"돈과 나를 맞바꾸는 거래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나'를 만나는 일, 자기의 사회적 표정과 대결하며 본래의 표정을 되찾는 일이 어른의 글쓰기일지도 모르겠다." (97)

 

책을 잘못 고른 덕분에, 나는 이제 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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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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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역적>을 본다. 마침 4화인가 5화에서 길동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구요."

길동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행해질까봐 자기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힘을 쓰지 않다보니 아버지 아모개가 그러했듯 힘이 없어져 버렸다.

 

이 소설을 보다가 그 대사가 생각났다. 책 속표지에 이렇게 써 있어서.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

둘의 차이는 뭘까. 전자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후자는 사물을 가리킬 때 쓴다는 것의 의미? 그렇게 단순한 차이는 아닐 것 같다. 길동이가 그랬듯이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말할 때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표현을 쓰니까. 그것은 모멸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아무도 아닌, 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어떤 존재'가 되기까지 '아무도 아닌' 상태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황정은이 "계속해 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어떠어떠한 존재라고, 우리의 삶(이야기)은/는 이미 끝났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함부로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이 책에는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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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노의 정치와 증오의 정치

헌재 앞 태극기 집회 현장을 지나치다가 느꼈던 공포에 대해 말하자 C는 그들이 젊었을 때부터 '깡패'였을 것이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 반응 역시나 무섭다고 말하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분노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말했다. 자신은 그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해 보려는 것이라고. 나는 그건 '이해'가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그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을지 어려웠다. 그의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증오처럼 느껴졌던 그건 냉소일 뿐이지 않냐고 나중에서야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적절한 반응이 무엇인지. 그저 무섭다고 느끼는 것만도 능사는 아닐 터인데.

 

#말과 활 2016 겨울호를 읽다가

내 세계관의 터무니없이 좁음을 한참 깨닫고 있는 요즘,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글들을 닥치는 대로 사서 구해서 읽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 논점들을 정리하는 중. 그 중에 하나는 '미러링'. '미러링'이 뭐고 그것의 효과를 설명하다보면, 그것이 발화의 차원에서 되돌려 준다는 사실에 국한해서 설명하게 되는데(너네도 해왔는데 왜 우리는 안되냐), '여혐' 발화와의 불균등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수행 효과까지를 엄밀히 구별해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 즉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함의하는 것은 '미러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희진 선생님이 남혐은 불가능하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 그런 점에서 지속적으로 제도적 차원에서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필요한데, 90년대의 과오(제도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인식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 때의 '반발(backlash)')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운동'차원의 움직임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최근 '페미니즘'을 주제로 내세운 학회, 토론회에 몰리는 인파와 자발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독서모임 등은 주목할 만한 것 같다.

다만 '미러링'과 관련해서는 오카 마리가 지적한 것처럼, '유슬림'이라는 표현에서 무슬림을 비하하게 되는 것과 같이 '미러링'이라고 주장되는 일부 표현에서 '비하'되는 타자가 발생한다는 점은 어떤 식으로든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점에서 말과 활에 실린 글의 제목을 패러디하자면, 페미니즘은 항상 급진적인가, 라는 물음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 반성을 좀더 덧붙이면, 나는 어째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을 이론으로만 이해했는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여성으로서 차별을 '당연시' 해온 것인지, 페미니즘을 내 '삶'의 문제와 관련지어보지 않았던 이유가 지금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다.

 

#'사랑'

라깡과 관련된 강의를 듣다가, 드라마 <도깨비>에 나왔던 대사처럼, 모든 사랑이 첫사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했다. '사랑'도 주체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사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사랑이었고, 또 지나고 보니 그 전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었어서 사랑을 시작하는 자에게는 그 시절 시절의 사랑이 '첫' 사랑이게 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 '특수한' 인간이고 그와 하는 '사랑' 역시 특별한 것일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그 한 사람을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사랑의 언어를 발명해 내야만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하셨고, 나는 그 언어가 진부해지는 순간 그 사랑은 끝난 것이라는 말에 무엇보다 공감했다.

안티고네를 비혼주의자로서 주목하는 해석 역시 흥미로웠는데, 비혼주의자로서의 여성이 '국가'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예외적 존재인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안티고네는 햄릿과 유사한건가. 자기 운명의 주사위가 결정된 후 '결혼'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결혼'에 대한 거부와 '국가(법)'에 대한 거부는 무슨 관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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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이후 일본에서 나오는 문화 창작물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든다. 세월호 이후 한국에서 창작되는 것들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너의 이름은>이 그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그랬다. (같이 본 동행인의 말에 따르면 이와지 슌지의 <립반 윙클의 신부>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단다) 영화뿐 아니라 일본 드라마에서도 그런 인상들을 받았었고..내가 본 대부분의 창작물들은 주로 어떻게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를 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왜 자꾸 치유하려고만 해, 좀더 우울해하자, 좀더 슬픔과 상처에 대해 말하자, 여기서 섣부르게 벗어나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자, 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슬픔을 극복하자는 내용이 아니다. 남자 주인공의 성장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지만, 그때의 성장이 결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슬픔을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려다가 평생 벗어나지 못할 뻔했던 남자가 '슬픔'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는' 내용이다. '깊은 마음', 남자가 아이에게 물었던 질문 '너에게도 깊은 마음이 있니', 에 대해 아이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직 아이에게는 고독이나 깊은 마음 따위가 있으리 없겠지. 없을까?

 

유세윤을 닮은 모토키 마사히로가 연기를 썩 잘한다. 아역들도 이에 못지 않다. 타케하라 피스톨이라는 일본 남자냄새가 많이나는 사내의 의뭉스러운 표정 연기도 볼만하다. 간만에 본 후카츠 에리는 얼마 안되는 등장에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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