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이후 일본에서 나오는 문화 창작물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든다. 세월호 이후 한국에서 창작되는 것들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너의 이름은>이 그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그랬다. (같이 본 동행인의 말에 따르면 이와지 슌지의 <립반 윙클의 신부>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단다) 영화뿐 아니라 일본 드라마에서도 그런 인상들을 받았었고..내가 본 대부분의 창작물들은 주로 어떻게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를 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왜 자꾸 치유하려고만 해, 좀더 우울해하자, 좀더 슬픔과 상처에 대해 말하자, 여기서 섣부르게 벗어나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자, 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슬픔을 극복하자는 내용이 아니다. 남자 주인공의 성장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지만, 그때의 성장이 결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슬픔을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려다가 평생 벗어나지 못할 뻔했던 남자가 '슬픔'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는' 내용이다. '깊은 마음', 남자가 아이에게 물었던 질문 '너에게도 깊은 마음이 있니', 에 대해 아이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직 아이에게는 고독이나 깊은 마음 따위가 있으리 없겠지. 없을까?

 

유세윤을 닮은 모토키 마사히로가 연기를 썩 잘한다. 아역들도 이에 못지 않다. 타케하라 피스톨이라는 일본 남자냄새가 많이나는 사내의 의뭉스러운 표정 연기도 볼만하다. 간만에 본 후카츠 에리는 얼마 안되는 등장에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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