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시와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를 혐오한다.”

워싱턴 DC 어느 술집에서 들려온 말

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 중에서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라면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한다. 그가 정의하는 에로스는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실행하여 자기 계발적 주체가 따르고 있는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에서 벗어나 타자의 아토피아(atopia)와 만나는 것이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란 강요되는 기존의 선택항에서 벗어나 소유하고 붙잡을 수 없는 새로운 관계항을 만드는 행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에로스(eros)의 속성과 연결된다. 동일자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은 타자와의 관계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할 수 있음의 절대적 긍정성을 벗어버리고 타자의 시간으로서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병철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안전한사랑, 그러니까 타자의 결여에 응답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부의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마저 보장되지 않는 헬 조선에서는 조건부의 사랑마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n포 세대수저계급론과 같은 신조어의 출현이 함의하는 것은 사랑 따윈 필요 없게된 현실에 대한 극도의 절망과 냉소이다. 신자유주의가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을 통해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상태에 빠뜨린다는 한병철의 해석이 불충분한 것은, 이 성과주체를 소진상태에 빠뜨리는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에 대한 물음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체들은 지나친 긍정성에 노출되어 있는 동시에 그에 버금가는 부정성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은 강요되는 긍정성이 거짓이며 기만임을 그 자신이 누구보다 알고 있으며, 매일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과정에서 할 수 있음이 아니라 할 수 없음을 체험한다.

이러한 와중에 자신의 찌질함을 방패삼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여성, 장애인, 호남, 성소수자,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혐오 발언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을 약자로 위치시킨다. 억눌려왔던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자신과 같이 용기 있는행동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겁쟁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자기에 대한 혐오를 타자에 대한 공격적 혐오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이들의 행태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로서의 헤테로포비아(heterophobia)를 연상시킨다. 미지의 타자가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위험과 불안을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2. 시의 종말과 시인의 존재론

혐오는 한국문학에도 나타나고 있다. 신경숙 사태가 벌어지고 인터넷 댓글 중에는 그래서 나는 한국 소설(혹은 문학)을 읽지 않는다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취업이 되지 않는문과 출신이어서 죄송하다는 의미의 신조어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돌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이를 문학에 대한 혐오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쓰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시단의 기이한 구조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패배적인 냉소적 발언에 자기 혐오적인 측면마저 엿보인다는 것이다.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분노(anger)와 분개(indignation), 그리고 혐오(disgust)를 구별하면서, 혐오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라면서 이러한 감정이 주체를 대상과 가능한 멀리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주체와 대상을 마주치게 하는 분노나 분개와는 달리 혐오는 대상에 대한 개입을 방해하여 도피와 방기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에 대한 찬사가 드높아지고 시의 자유가 결사적으로 주장될수록 오늘날 시는 점점 더 아무것도 아니게 되거나, 심지어 (가장) 손쉬운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면서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2010년대의 시들을 시인이라는 존재의 위상과 관련해 징후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들이 던지는 에 대한 물음은 곧 에 대한 물음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신해욱은 일찍이 생물성(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에서 얼굴이 없는 불행”, 분열된 주체의 발견 이후 나타난 병든 말()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동시에 두 개의 말이 나와 말의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의 무력감이란 턱을 움직여 음식물을 씹을 수도없는, 자신의 얼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주체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의 모습은 둘이라는 혀를 가진 나”(박성준, 혀의 묘사, 몰아 쓴 일기, 문학과지성사, 2012)와 연결된다. “서로에게 혼잣말로 같이 가자라는 이 시에서의 제안에서 알 수 있듯이 소통 불능에 상황에서도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주면서 타자를 붙잡는다.

타자들과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계속해서 이인칭의 의 이름을 부르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황인찬의 발화(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와 안웅선의 발신(發信)(문장웹진, 20116월호)이 그러하다. 두 작품 모두 이인칭(‘’, ‘당신’)을 호명하지만 발신될 뿐 영원히 수신되지 않”(발신)는 혼잣말의 세계가 이어진다.

 

혼잣말을 하는 누이에게, 누이야. 그만 그쳐라.

혼자라는 성질만 가지고 가서 스스로 벼랑이 되어라. 하고

둘이라는 혀를 가진 나에게

내가 그토록 그리워한 것이 다른 네가 아니라 입속 다른 형식인

나라는 것을 중얼거리다 보면

건강한 묘지로 가 무덤을 핥아대는 입은

나처럼 내 입인가, 나와 멀어질, 나 같은 네 입인가.

― 「혀의 묘사부분

 

찌개가 혼자서 넘쳐흐르고 있다

불이 혼자서 꺼지고 있다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지나친다

― 「발화부분

 

당신, 흔적이 아닌 적 있었던가 웃거나 화내지 않음으로 야만의 박동이 된다 간신히 무채색을 꿈꿀 수 있다 덧칠을 덜어낸 화가의 자리 웃자란 가지들이 시야를 벗겨내고 있어요 입술이 붙었다가 간신히 떨어지는 순간을

새벽의 공중전화 숨어 울기 좋은 크기로 일어나세요 나도 사람입니다 여름이란 참 눈에게 많은 무늬를 주는군요 이제 길거리에 팔리는 이야기들이 늘어 가지만 당신, 그것은 발신될 뿐 영원히 수신되지 않아

― 「발신부분

 

2000년대 미래파 시인들이 를 분열시키거나 우연한 를 발명하는 방식으로 이질적인 것을 환대하는 양상을 보여주었을 때 이는 에 대한 심급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만큼은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미래파가 비평가들의 승인을 받아 그 의의를 인정받을수록 아방가르드 시학의 파괴성은 가감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였다. 미래파 시가 이질적인 것을 도입함으로써 끌어냈던 파괴성이 급격히 낡은것이 되어 버린 것은 그것이 일종의 유행으로 인식되었다. 아방가르드를 유행으로 인식하는 낡은현실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이들의 호전성은 현실 안에서 파괴력을 가지기는 힘들었다.

김수영은 전위적인 예술과 낡은 현실 사이의 분열에 대해,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서시)라고 통탄한 바 있다. 여기서 첨단의 노래첨단의 노래가 불리는 현실과 불화한다. 김수영이 지지한 노래를/더러운 노래를 생기 없는 노래를부르겠노라고 역설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김수영의 절망은 첨단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이 낙후해 있다는 데 있다. 시와 현실의 분열에 그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김수영이 말한 지지한 노래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첨단의 노래와 불화하고 있는 낙후한 현실을 끊임없이 소환해냄으로써 시와 현실의 간극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는 시인에게만 주어진 명령은 아닐 것이다. 작품이 완성되면 시인의 존재와 무관한 해석의 장에 놓이게 된다는 데서 이 간극은 생산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비평가는 이 텍스트가 현실과 불화하면서 일으키는 생산성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미래파의 전위성은 시와 (시가 읽히지 않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적극적으로 상기시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는 이런 맥락에서 주목된다. 신해욱이 강박적으로 를 탐구하며 “‘잃어버린 나, 더 나아가면, ‘잃어버린 나를 잊어버린 나’”를 탐구한다면, 황인찬은 잃어버린 시, 나아가 잃어버린 시를 잊어버린 시에 대한 애도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다시, 에로스의 종말

황인찬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2012년 이후 가장 많이 팔린 시집으로 꼽힌다. 이 시집으로 최연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황인찬의 펴낸 차기작에 대한 기대는 희지의 세계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졌다. 우선 박상수는 황인찬을 “‘몰락하는 중간계급의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으로 꼽으면서 그가 감각의 귀족주의자라고 명명한 이장욱, 김행숙, 이근화, 하재연 등의 시인과 구분 짓는다. 타자와 세상에 대한 기대 자체가 사라져버린 황인찬을 비롯한 몰락하는 중간계급의 시에는 ‘A는 그저 A’인 것이라는 식의 내용 없는-반복적인 말이 중얼거려질 뿐이라는 것이다. 황인찬의 시에서는 어쩔 수 없는 미니멀리즘’”이라고 할 만한 시어의 단순화가 두드러지면서 여기서 비롯되는 기묘한 아름다움이 발생하는데, 박상수는 이것이 하강하는 중간계급의 정서를 미적 형상으로 반영하는 과정에서 눈앞의 현실 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관점을 통해 중간계급의 집단적 불안과 두려움을 차단하고 위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박상수를 비롯해 황인찬의 시에서 달관의 태도를 발견하는 이들은 현실을 포기함으로써 주체가 얻는 안락한 깨달음의 상태를 미니멀리즘이라는 미적 전략의 형상화로 이해한다. 박상수는 황인찬의 시적 주체를 사토리 세대와 유사한 것으로 규정짓고 있다. 한편 황인찬의 시에서 히키코모리적인 세계”(장이지)를 발견하는 태도라든가 황인찬 시에 나타난 정치적 무의식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파시즘으로 치달을 수조차 있는 피할 길 없는 시()의 냉담함”(이강진)을 지적하는 이들 역시 황인찬의 시적 주체들이 지닌 고립적 속성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희지의 세계만 해도 결핍이 없는, 모든 것이 충족된 듯한 가상의 세계가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희지의 오래된 생활은 혼자 산다는 한 마디로 규정된다. “짧게 사랑을 나눈 뒤라는 구절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희지가 사랑을 나누는 대상의 소재는 불분명하다. 타자의 부재는 희지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타자에게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누군가 문을 두드렸지만 열지 않았다―「풍속) 황인찬의 시에서 타자는 와의 물리적정서적 거리가 분명하게 유지된다.

그 결과 그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해 그는 재잘거리기를 좋아하는 평균 신장과 체중의 한국인이다 그는 내 품에 안겨서 멍청한 표정을 짓는 사랑스러운 서울 출신의 이십대 남성이다”(동시대 게임)라고 제시하는 데 그칠 뿐 그 어떤 주관적인 묘사도 자제한다. 타자는 환대의 대상도 혐오의 대상도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거리감이다. ‘에로스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태가 황인찬의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그가 나르시시즘적 성과 주체’(한병철)이기 때문일까. 다시 말해,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할 줄 모르는 성과주체들이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황인찬의 시적 주체의 우울은 성공에 대한 추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황인찬을 비롯해 2010년대 시에는 나르시시즘적 에고가 철저히 거세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거세의 배경에 자기애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세계가 버티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황인찬은 그렇게 써 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거나 나무는 기다린다 나무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해 본 적이 없다”(서정2)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해 본다고 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로 인한 절망은, 자신이 죽기만을 바라는 천사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는 섬뜩한 상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기록). 이와 같은 총체적인 무력감은 황인찬 뿐만 아니라 2010년대 시인들의 시에서 공통적인 속성으로 지적된 바 있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무력하다는 것과 무력하다고 토로하는 텍스트를 쓰는 것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황인찬은 무력감에 대해쓴다. 김수영의 절망이 세계가 시시하고 지겨운 것이라는 데 대한 것이라면, 황인찬은 자신의 절망이 시시하고 지겹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래서 그는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씩씩하다. “오늘은 죽어야지, 생각하면서/씩씩하게 잘 걷습니다”(영원한 친구)라는 구절 같은 데서 발견되는 위악적인 태도 같은 것을 보라. 시시하고 지겨운 자신이 싫어서 죽어야지 생각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씩씩하게 살아가고, 또 그런 자기가 시시하고 지겨워서 죽어야지 생각하는 것의 반복이 바로 인 것이다.

 

아직도 시를 쓰고 있군요 어깨가 움직이고 있군요 시가 싫어서 미치겠는데도 지겹다고 자꾸 새처럼 짖으면서도 왜 쓰는지도 모르는군요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머리 있으니까 더 머리 있으니까

 

누군가 말을 걸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는군요 혹시 시인 아니시냐고 묻는 사람이군요 굳이 못 알아듣는 척을 하다 맞다는 말을 하는군요

 

그 사람은 알겠다고 하고 바로 떠나는군요

그래요 압니다

 

다 압니다

모든 게 안 좋아요 언젠가 좋아질 테지만

― 「머리와 어깨부분

 

무력한데 무력하지 않다고 쓸 수는 없다.’ 그래서 황인찬은 시가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해 쓴다. “아직도 시를 쓰고 있군요라는 말에는, 무기력과 무능감에도 불구하고 시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의 열등감, 패배감 등이 녹아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우울함, 왜 쓰는지도 모르면서 시를 쓰고 있는 자신에 대한 혐오 같은 것이 시집 후반부로 갈수록 짙어진다. 그런데 황인찬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고 또 쓴다. 이 무기력과 무능감이 로 발화됨으로써 그것은 문제로서 인식된다. “언젠가 좋아질 테지만그것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모든 게 안 좋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오지 않을 과거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패배이다. 이것이 그가 명확한 것, 좋지 않지만 너무나 명료한 현재에 대해 이야기할 뿐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조건적인 현재에 대한 수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건부의 현재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를 쓰는 한에서 존재하는 현재이다.

 

4. 취향의 헤테로토피아

여기서 취향이 중요해진다. 시를 읽거나 쓴다는 것은 취향의 문제다. 영화를 보거나 미술 전시회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택 가능한 여러 문화적 체험 가운데, 그것도 소수에 의해 향유되는 문화적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또한 동시에 지하철 승강장 안전문의 여백을 심심치 않게 해주는 애매한 대중성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는 지나치게 소수에 의해 향유되는 마니아 혹은 오타쿠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카페인 없는 커피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황인찬은 이러한 현실에 분노하거나 절망한다는 것이 부질없으며 시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시를 쓰는 자신의 취향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하거나 그것이 단순한 취향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소극적인 물러남의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시를 쓰거나 읽는 것을 취향이라고 말하는 그의 태도에는 다소 복잡한 뉘앙스가 있다.

이와 관련해 희지의 세계와 연관된 한 웹툰이 주목된다. 시집의 제목으로도 쓰인 희지의 세계이자혜의 만화 미지의 세계에서 제목을 빌려 시를 쓰려다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라고 황인찬은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이자혜의 만화 미지의 세계는 대학생 조미지의 일상을 담은 웹툰이다. 이 만화는 병맛 만화의 여성판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드코어한 조미지의 욕망을 가감 없이 그려낸다. 그런데 황인찬이 이 만화의 제목을 일부러 강조하면서 특히 자신이 착각을 하고 말았다는 단서를 붙인 정황은 무엇일까. 그는 이 착각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를 하기보다, 의도적으로 이 착각을 시집에까지 유지하면서 이 착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만화에서 제목을 빌려왔다고 하는 희지의 세계가 만화 미지의 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는 점이 이 착각의 의미를 묻게 한다.

만화에서 주인공 미지의 이름은 미지(未知)’이다. 그녀는 게이 포르노를 즐겨보며 자위를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중증 변태로 피해의식, 열등감, 자기혐오 등으로 자살을 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조미지의 이상과 현재적 삶의 비루함은 극단적 대조를 이루며, 이러한 격차가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독자들에게도 공유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분명한 자기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향유할 때에는 자살할 기미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 만화에 나타난 조미지의 독특한 취향은 기존 관습과의 불가피한 마찰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자기혐오를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허나 이는 조미지가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조미지는 자기혐오의 원인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남들과 자신을 구분해주는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변태취급을 받는 취향을 가진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남들과 대별되는 감수성을 지닌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의 취향은 차이가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여주며 조미지가 자살을 고민할 정도로 극심한 갈등의 원인이 된다. 개인의 상징자본의 차이가 취향의 편차를 낳는다는 가설에서 조미지는 예외적 개인이다. 이러한 예외성으로 인해 조미지는 자신의 출신배경뿐만 아니라 계급과 맞지 않는 자신의 취향에 대한 혐오를 표출한다. 그런 점에서 미지의 세계는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이다. 조미지의 비정상성은 이 세계에 속해있으면서도 세계와 불화한다. 그런데 바로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자신이 아닌 것처럼 객관화시킬 수 있다. 즉 취향을 통해 그녀는 자기 안의 타자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신이 혐오하는 자신의 타자성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미지와 희지의 세계의 시적 주체의 태도의 공통성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 취향과 현실의 불화를 유지하며 자기혐오를 지속시킨다. 취향으로 인해 자신의 결핍이 두드러지고 그로 인해 자신이 혐오 대상이 될지언정 이들은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 실천 사이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취향을 향유함으로써 누구보다 고통 받는 존재들이다. 이렇게 이들이 자기 존재를 극단적으로 혐오하면서도 고통 속에서 그 취향을 포기하지 않을 때, 계급과 취향의 불일치가 문제시됨으로써 이데올로기에 대한 폭로 효과는 극에 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중성이야말로 취향을 존중해 달라는 요구보다 취향을 존중받을 수 있는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가 혐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자기를 존중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자신이 비루하고 혐오스러운 존재임을 상기하면서도 그 원인으로서의 취향을 지닌 타자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불안이나 공포를 해소하지 않되 동시에 그것을 향유하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일베에서 작동하는 혐오의 차이다.

 

아직도 나는 망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쯤 망할까? 그것이 언제나 가장 궁금했다 사람들은 세상이 망하기를 언제나 바라고 누군가 망하기를 언제나 바라지만

 

개가 태어나고 나무가 자라고 건물은 높아지고 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운석은 충돌하지 않는다

 

어느 날인가 너무 어린 나는 망해 버린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꿈이었는데

 

거기서도 할머니는 하고 계셨다 깨끗이 씻고 계셨다 늙고 늙은 몸을 거대하고 축 늘어진 가슴을 들어올리며

 

우리 할머니는 아직도 하신다 백 년 동안 움직여 온 그 입술로 내게 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자꾸만 하신다

 

나는 망하지 않는다 살아서

있다

― 「종의 기원부분

 

이 시에서는 세계가 망하는 것을 바라는 가 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데 대한 묘한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세상이 망하기를 언제나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만 살아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의 제목이기도 한 실존하는 기쁨이다. 황인찬이 미지의 세계희지의 세계라고 착각한 것은 아님()’이라는 부정을 그러함이라는 기쁨()으로 변주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모든 게 안 좋다는 것을 다 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미지(未知)의 세계 속에서 그러한 알지 못함을 다는 사실을 기쁜것으로 바꾸려한다. 이것이야말로 취향을 향유하는 자의 기쁨이라 할 수 있으며, 이때의 시인의 취향은 아갈마,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오브제 a’가 된다. 시는 미지(未知)의 것이기에 향유()를 가능케 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에 대한 시인의 태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시집의 첫 페이지에 배치된 멍하면 멍에서 그는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건 그냥 시예요라고 무덤덤하게 밝힌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A는 그저 A’인 것이라는 식의 내용 없는-반복적인 말인 것은 아니다. 이 시에 인용된 김수영의 시 절망을 마이너스의 방식으로 변주하고 있는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고/곰팡이 곰팡을 반성하고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무능함을 달관하는 듯한 태도로서 실은 절망을 향유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절망)라며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시인의 존재론으로 삼았던 김수영과 달리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멍하면 멍)라며 끊임없이 사과한다. 그렇게 그는 반성을 반성한다.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면서 시인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기를 강요하는 폭력이 있음을 고발한다.

혐오의 메커니즘에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할 때, 그 공포는 실은 주체를 구성하는 일부이기도 하다. 이 공포를 제거하려고만 한다면 주체는 동일성의 감옥에 갇혀 헤테로포비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에로스는 그 공포를 극복하고 공포의 대상에 자기 공간의 일부를 내어줄 용기를 내게 한다. 자기가 혐오하는 대상에게조차도 자기를 열어 내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해서 시인은 시의 무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기혐오적인 상황에서 시를 쓴다. 누군가가 혐오하는 시를, 무기력을 강요하는 시를. 사람들이 시를 혐오하게 만드는 시의 본래적 속성을 유지/회복해야만 시는 망하지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

고영민, 개가 사라진 쪽부분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은 사람들을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한다. 주인공 사내의 어머니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읽은 책으로는 싸구려 통속소설을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책에 파묻혀 사는 아들을 비난한다. ‘너도 아버지처럼 책 속으로 들어가려는 거구나.’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는 커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어머니가 했던 말을 기억해낸다. 문자의 세계에 매혹되어 고전문헌학자가 된 사내는 어머니의 이 말에 담긴 쓸쓸함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로 사랑하는 자들이 떠나버리는 것에 대한 외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그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우쳤고, 또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어머니의 외로움을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했을 것임을 안다. 사내 역시 자신의 외로움을 감당하기에 벅차서 문자의 세계를 탐닉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리라.

고영민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리에서 갑자기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의 시적 여정에도 급작스러운 전환 같은 것이 목도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최근 펴낸 구구(문학동네, 2015)가 그렇다. 이 시집이 기존 시집들과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그가 자기 삶에서 어떤 불일치를 발견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 스스로의 삶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고영민의 시에서 이는 그림자에 대한 발견으로 표면화된다. 사실 고영민의 세 번째 시집을 읽을 때만 해도 그가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를 궁금해 하는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위악적인 제스처를 일부러 내세우는 듯 보였던 첫 번째 시집 악어(실천문학사, 2005)를 거쳐 죽음 앞에 공손해지는 인간의 유한함을 보여준 공손한 손(창비, 2009), 그리고 그러한 한계가 극치에 달한 순간들을 모아놓은 사슴공원에서(창비, 2012)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시에는 유기적 세계관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혹자가 지적하듯 서정시에 대한 고집이나 일관된 아비뛰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구에 이르러 유기적 세계관에 균열이 확연히 나타난다. 은유를 대신해서 환유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 그 징후를 보여준다. 고영민이 병치의 방식으로 유년에 대한 향수를 사물에 대한 열린 감수성으로 변환시킬 때 은유는 빛을 발했다. 그의 은유는 시적 주체의 울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이는 사물의 텅 빈 자리를 울음으로 채우려는 기획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듯 보이지만 그 죽음을 제대로 된 울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는 한정돼 있다. 이때 고영민은 누군가를 대신해 울어주기를 자청하는 자였다. 그는 울음을 제대로 된 음()으로 진동시키기 위해 악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몸을 악기로 만들었다(우륵). 그리고 이 악기를 통해 미처 이야기되지 못했던 슬픔들이 온전한 음을 지닌 채 세계에 흘러나왔다. 다음과 같은 시가 그러하다.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울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울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뿌리 속에 한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부분, 공손한 손

 

저녁의 시간도, 사랑도 한 그루의 나무속으로 들어간다. 나무는 삶과 동반되는 비애와 서러움을 그 자신 안에 담아낸다. 비애와 서러움을 언제까지 자기 안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눈물이 중력에 의해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질 때도 그는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이라고 말할 뿐이다. 인간은 사랑으로 인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숙명론적 존재다. 허나 그는 그 어떤 고통 앞에서도 겸허하다. “사랑은 우리의 비참함을 말해 주는 표시이다. 신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중력과 은총)라 했던 시몬 베유의 말이 떠오른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자는 사랑을 비참함의 표시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비참함은 온전히 한 그루의나무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표현될 수 있는 고통은 그나마 참을 만한 것이 되니 말이다.

그렇게 형용 불가능한 사랑의 비참함을 하나의 사물로 변용시킴으로써 그는 이 세계가 저물어간다는 사실을 오롯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와 같이 아름다운 연가를 부를 수 있었다. “우리는 뒤돌아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바람이 잠잠해질 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나는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그때 너와 나의 머리칼과 눈썹, 털옷에는/눈가루가 얹혀 빛나고 있었다.” 이 시에서 이름도 알지 못했던 거대하고 의연한 나무의 은총 아래 시적 주체는 사랑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있다. 이 믿음은 영혼에 대한 신화를 작동시키고 있으며 그의 시 세계가 죽음을 환한 어둠”(누우면 눈이 감기고 일어서면 눈이 떠지는 인형처럼)으로 인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그리하여 그는 땅속으로 새들이 날고/그 푸른 허공으로 빗줄기가 쏴, 하고 쏟아질 때에도/나는 몇 번씩이나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라고 말한다. 죽음 이후 영혼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영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죽음을 인식하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자의 평온은 얼마나 부러운 것인가.

그런데 사슴공원에서에서부터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불편함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의 영혼이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온전한 위안이 되지 못한다. 애도하는 자들은 그렇게 허무주의자가 된다. 헤어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함을 연습해둔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중얼거리기도 한다(오지). 그럼에도 끝내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가 출현하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나도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사랑이 식기 전에/밥이 식기 전에”(사슴공원에서)라는 구절이 안타까움을 주는 것은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그가 당신에게 도달하는 것은 너무 늦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들은 평생을 그들을 애도하는 데 바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조금 더 빨리 당신에게갔어야 한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더 이상 죽음이 남의 것이 아니게 될 때 죽음의 의미는 그 전과 사뭇 달라진다.

 

태어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습니까

비춰보지 않고서는 귀와 입과 코를 보지 못하는 눈과 같이 나는 영원히

단풍을 보지 못합니다

― 「단풍을 말하기 전부분, 사슴공원에서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공은 끝끝내 발견되지 않고 한 명씩 두 명씩 날 저문 얼굴로 숲을 나와 낡은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버리면 공은 그제야 숲의 덤불 속에서 또르르 굴러나와 한참을 웃다가, 웃다가 다시 숲의 덤불 속으로 천천히 기어들어가 우리가 어른이 될 때까지 비 맞고 눈 맞고 그 자리에 꼭꼭 숨었다네……숨는다네

― 「부분, 구구

 

고영민은 자기 존재의 기원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그것에 대한 물음을 찾기만 하면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리라. 그는 태어나기 전의 자신을 찬란했던 시절을 지나치고 있는 단풍에 비유한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독경, 사슴공원에서)라고 말하며 이 생이 천천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태도와 닮아 있다. 그는 귀와 입과 코를 보지 못하는 눈처럼 자신의 생이 저물어가는 풍경을 조망하지 못하는 피조물임을 깨닫는다. 삶의 의미는 어딘가로 굴러가다가 끝끝내 발견되지 않는 공처럼 어딘가에 숨어 버린다. 오롯이 자신의 삶이 아닌 것 같은 이물감을 고영민은 숨어 버린 공에 비유한다. 그런데 끝내 공을 발견하지 못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이들 만큼이나 한참을 웃는 공 역시 외로워 보인다. 그렇게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 더 꽁꽁 숨어버리는 공이 된 기분으로 시인은 위악의 가면을 쓰고 자신이 처한 삶의 한계를 잊고자 하는 제스처를 취하거나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며 해소되지 않는 물음들을 정리해보려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울음으로 가득 채워진 시적 대상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구구라는 시집의 제목에서 쓸쓸한 울음소리를 연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인은 비둘기가 울 때마다 비둘기가 생겨난다구구의 구절은 울음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존재의 영역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비둘기가 울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영역이 열리는 이 순간은 세계와 존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불일치의 순간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숨죽인 채 쌍둥이 사내애를 낳고 있는/여고생빈 유모차를 밀며 공중화장실 옆을 지나는/할머니 머리 위에서 비둘기는 운다. 여기서 비둘기의 울음은 세계와 존재 사이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징표임을 보여준다. 불일치는 기실 인간사의 온갖 비극과 관련된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간절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끔찍한 일로 기억되기도 한다. 가령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혼신의 힘으로 창문을 향해 기어간 그녀의 마지막 간절함이 구더기가 되어 떨어지는 아픈 순간을 고영민은 기어코 그려낸다(구더기). 봉천동엔 비가 내리는데 장승배기엔 눈이 온다와 같은 시의 제목은 시인이 불일치의 순간 빚어지는 비극적 장면들에 주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영민이 포착한 이러한 불일치의 비극에는 얼마만큼의 냉소와 얼마간의 연민이 동시에 배어있다.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구구) 삶의 비극들을 저만치 밀어놓고 관찰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적인 시선은 그동안 고영민 시에서 작동해왔던 은유가 나타나는 것을 방해한다. 기의를 매개로 하여 사물을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은유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을 현상학적 시선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구구에서 사물의 이면에서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를 대신하여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물들의 그림자에 대한 탐구가 나타나고 있다. 고영민은 어째서 이러한 변화를 보이게 된 것일까. 익숙한 삶과 결별하려는 인간에게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고영민이 영혼도 육체도 아닌 그림자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거기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불붙은 개의 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

 

댓잎이 나오는 지금쯤

어린 장어는 강에 나오고

열세 명이나 들어가던 늙은 팽나무엔 연초록 새잎이 돋고

발목에 가락지를 채워 보낸 새는

다시 돌아오고

 

누가 개에게 불을 붙였나

달려도 달려도 떨어지지 않고 개는

무작정 또, 달리고

 

나는 언제부터 지루해졌을까

차량 정비소로 뛰어든 개는

결국 건물 한 동을 홀라당 다 태울 텐데

그사이 봄은 여름에게 저녁은

밤에게 몸을 내어주고

 

개가 전속력으로

개로부터 빠져나가는 저녁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위한 몸은 없다고

모든 그림자는 가장 길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나는 우두커니

개가 사라진 쪽을

― 「개가 사라진 쪽전문, 구구

 

고영민에게 일어난 변화는 삶과 죽음, 몸과 영혼의 이분법적 세계에 혼란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푸코는 영혼이 몸의 슬픈 위상학을 지워버릴 수 있는 가장 끈질기고도 강력한 유토피아를 서구 역사의 시초 이래 우리에게 제공해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14). 영혼은 생명의 유한함을 보여주는 몸을 가진 슬픔을 간단히 제거해버린다. 영혼은 순수하고 아름답고 순결하다. 그것은 육체가 사라진 다음에도 본래의 순수함을 복원할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진다. 유기적 세계관을 견지한 서정시들이 주는 행복함이란 영혼과 육체로 이분법의 세계에서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전달된다. 유한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의 무한함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데 영혼에 대한 은유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

그러고 보면 거울 속 제 모습을 두고 짝이라고 생각하는”(거울, 공손한 손) 새 한 마리는 시인의 분신이자 근원적 결핍을 상상적 동일시로 해소하고자 하는 안간힘을 보여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서라도 해소하고자 했던 존재론적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출현한 불타는 개와 같은 예측 하지 못한 사건이 겨우 고정해 두었던 기표와 기표 사이의 의미를 뒤흔들어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위한 몸은 없다는 선고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이 시에서 고영민의 불타는 개로 변신한다. 구슬픈 울음을 울면서 거울을 보고 외로움을 달래려는 시도가 타자에 의해 좌절된 후 그의 울음은 그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혼돈의 몸부림으로서 잠시 출현했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서 영혼을 대신한 자리에 그림자에 대한 물음이 들어선다. 영혼과 육체의 안전한 이분법 안에서 조화로웠던 세계를 대신하여 불일치와 엇갈림 속에 고통 받는 그림자의 세계가 그려진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따름이다. 돼지고기가 그냥 돼기고기일 뿐”(돼지고기일 뿐이다)인 것처럼. 거기에 어떠한 의미를 덧댄다고 해도 들판이 불이 번졌던 자국처럼 죽음은 자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고영민은 불안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사물의 불일치를 응시한다. 이는 죽은 자의 손”(차가운 손)처럼,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입술들”(붉은 입술)처럼 낯선 사물에 그가 주목하는 까닭이 아닐까. 그렇게 불안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눈을 열어줄 것이다. 시인 덕분에 한 그루의 저녁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그림자가 한없이 길어진다.

 

<시인동네> 2016 봄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롤랑 바르트는 동질적인 것 속에서 비동질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찌르는세부요소로서의 푼크툼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무언가(something else)이다. 바르트는 상처를 주고 동요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푼크툼이 없는 사진은 아무런 갈등도 교란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는 시도 마찬가지다. 푼크툼이 없는 시는 동질적인 시간에 머물러 있다. 명확한 목적의식과 단일한 주제 의식 아래 구성되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할수록 그것은 실패한 것이다. 좋은 시들에는 분명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 시의 순간에 머물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비록 그것이 자기 안의 상처를 아프게 건드릴지언정 그것은 어떠한 깨달음을 준다.

밝은 방에서 바르트는 푼크툼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포르노 사진을 든다. “포르노 사진보다 더 동질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천진하고, 의도도 계산도 없다. 조명이 비춰진 단 하나의 보석만을 보여주는 진열창처럼, 그것은 단 하나 오로지 섹스라는 것의 제시를 통해 전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포르노 사진은 감추거나 주의를 흩트리는 세부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동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동질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주는 시가 가능한가. 문제는 이러한 세부요소가 작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거나 최소한 완전히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푼크툼은 특정한 의도를 넘어서는 의미의 잉여의 부분에서 발생한다. 다만 이 혼란을 작가가 고유의 방식으로 풀어낼 때 거기에는 특유의 명명이 발생한다. 가령 이 글에서 함께 읽어볼 이현승, 송재학, 김수복의 시에서 그것은 생활’, ‘검은색’, 그리고 하늘이라는 기표로 나타난다.

생활이라는 생각(창비, 2015.9.)은 이현승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현승은 첫 시집에서부터 일상이라는 사태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당시 일상은 속속들이 구획되고 등록되어 투명하지만 친밀성의 땀내를 잃어버린 곳”(정한아, 거기 수심이 얼마나 됩니까?, 친애하는 사물들, 문학동네, 2012)이었다. 문명의 뒤편에 자리한 야수성이라는 은폐된 기원을 폭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던 이 시집에는 기지 넘치는 공격적 유머가 빛을 발했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을 거치면서 그의 시에는 내성적인 관찰자의 시각이 분명해졌고 비루하고 무서운 삶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활이라는 생각에도 이현승 특유의 블랙유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는 황폐한 진실을 마주한 자의 고독과 참담이 짙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다음 시에서 확인된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들이 갑작스러운 눈발에

하나같이 낭패감으로 허둥대는 길에서

나는 큰아이가 다니는 병원의 소아과 선생을 지나쳤다.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넣은 버니지아 울프처럼

그녀는 잔뜩 앞으로 쏠린 채 걸어가고 있었다.

 

()

 

우리는 좁은 인도를 황급히 지나쳤다.

한줄기 불빛이 시력을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시력을 회복하는 동안 나는

망자의 뜬 눈처럼 열린 채 닫힌 눈으로

잿빛으로 지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 「갑자기 시작된 눈부분

 

전문을 인용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 시는 예기치 않았던 순간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갑자기 내린 눈으로 허둥대면서 돌아가던 거리에서 시적 주체는 큰아이가 다니는 병원의 소아과 선생을 지나친다. 아픈 아이로 인해 그녀에게 다급하게 매달리며 희망을 갈구했던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동시에 시적 주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당시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구르던 자신을 차갑게 다독여주던 그녀에게서, 시적 주체는 무섭게 일렁이는 강물을 앞에 두고 죽음을 생각하는,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넣은 버니지아 울프를 상기한다. 그녀의 지폐처럼 피로한 낯빛이 잠깐 비친다. 시적 주체는 그녀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지를 상상해본다. 혹시 자신이 그러했듯이 다급하고 성마른 사람들이 하루종일그녀를 붙잡고 괴롭혔기 때문은 아닐까.

시적 주체는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시달렸다고 한 들 그것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피로한 낯빛은 푼크툼이 된다. 그녀의 이미지가 시적 주체에게 푼크툼으로 작용했음이 시의 마지막 연을 통해 분명해 진다. “한줄기 불빛이 시력을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이현승은 이를 망자의 뜬 눈에 비유한다. 눈을 뜨고 있지만 그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만일 그 눈이 무언가를 본다면 그것은 비어 있음()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시적 주체에게 한줄기 불빛이 되어 시력을 앗아가 버리는 존재다. 시적 주체는 그녀에게서 측정 불가능한 허무를 본다. 마치 죽음을 앞둔 버지니아 울프를 마주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낯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타인일 뿐이다. 그녀의 피로한 낯빛에서 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했을 때의 무력함을 직감한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현승이 미망으로만 붙들 수 있는 사물이 있다”(롤러코스터)라고 말하거나 터널과 터널 사이 구간의 운전자처럼/백일에 눈이 아프다”(인정도 사정도 없이)라며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사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징후적이다. 그는 무언가를 결정적으로 놓친 자들은/물고기에게 눈을 파먹힌 얼굴로 남겨진다”(사라진 얼굴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그가 심연을 응시하며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무언가를 놓쳤기 때문에, 볼 수 없음을 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현승의 시적 주체는 눈이 파먹힌 얼굴로 허공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뚫어지게 본 것을 시로 쓴다(“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람은 역시 쓰는 사람이다―「천국의 아이들2).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생활이라는 생각) 삶에서 참으로 모자란 것이 생활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절망을 그는 순간적인 눈멂의 체험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이현승이 운명론적 허무주의를 절망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데 반해 송재학의 경우(검은색, 문학과지성사, 2015.10.)에는 허무주의를 존재에 본질적인 것으로 상정하면서 그것을 긍정하는 데 이른다. 이는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색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통해서도 짐작되는 바다. 송재학은 시인의 말에서 어둠이라고 적었지만/그건 햇빛이기도 하고 메아리이기도 하고/무엇보다 시선(視線)이기도 하다라고 적었다. 송재학에게 검음은 주체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배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어둠이 무엇보다 시선이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얼룩과 같이 형상조차 분명치 않은 어둠이 무언가를 보는 시선을 가능케 한다. 송재학은 카메라 옵스큐라 중, 고독의 냄새들카메라 옵스큐라 중, 길의 운명과 같은 시에서 풍경을 가능케 하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어둠을 고독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고독은 태어나자마자 죽음과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숙명적인 것이다. 더구나 유난히 죽음의 감각에 민감한 이들은 종종 죽음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물끄러미 정지한 생()

나뭇잎 한 장 날아와서 얼굴을 가렸다

벌레 먹은 흔적 때문에 잎새에도 눈이 생겨

내 시선과 마주쳤다

물결 일렁이고 햇빛 으깨어지면서

송사리 떼 사금파리 하나씩 물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

내 얼굴은 자꾸 어머니 얼굴 닮아가고

한 마장쯤 떠내려가면서도

다북쑥 손바닥 불쑥불쑥 내 생채기 건드린다

어머니 떠내려가면서

다북쑥만으로 내 속은 먹빛 물드는데

― 「물 위에 비친 얼굴을 기리는 노래부분

 

파리하게 머뭇거리는 얼굴이 물결 위에 일렁인다. 그것이 물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분히 죽음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죽은 후의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심정으로 시적 주체는 거기에서 지치고 피로한 생의 몰골을 맞닥뜨린다. 이때 분위기를 전환해주는 것은 어디에선가 날아온 나뭇잎 한 장이다. 그것은 시적 주체가 죽음과 마주하는 것을 유예시킨다. 그런데 나뭇잎에 새겨진 벌레 먹은 흔적으로 인해 다시 잎새에도 눈이 생겨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갑작스런 시선의 마주침으로 인해 시적 주체는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며 세계가 으깨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는 세계 도처에 깔려 있는 사물들의 어둠과 마주한 데서 나타나는 현기증이다. 그런데 이 현기증을 달래주는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 윤곽과 같은 낮달이다. 시적 주체는 파리한 자신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하고 아마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얻었던 상처를 다시 감각하게 된다. 허나 그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아득한 슬픔으로 전환시키면서 어머니라는 부재하는 존재와의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송재학이 이번 시집에서 반복해서 발견해내고 있는 먹빛은 먹먹한 슬픔을 상기시키는 한편으로 사물들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여 공통감각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풍경들은 결코 시인의 외부에 있다고 할 수 없겠다. 경계를 공글러서 고독의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시인은 사물과 인간 간의 이진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를 상상하게 만든다. “사람과 나무가 윤곽 없이 생을 이룬 시절”, “나무는 사람으로부터 돋아 나오고 사람은 나무 속에서 죄를 고백했다”(나무가 비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한 시절에 인간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진리였으리라. 송재학은 그 전설 속에나 남아 있는 시공간을 재현한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탁본을 하듯이 사물의 고독한 윤곽을 부드럽게 두드리면서 말이다. 주체와 세계가 결국 중첩된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 그러니까 일종의 월식의 순간을 그는 기다린다(“다시 살살 두들기고 부드럽게 문지르고 공글리자, 먹을 서 말쯤 삼킨 시커먼 월식(月蝕)이다―「습탁).

마지막으로 김수복의 시집 하늘 우체국(서정시학, 2015.11)을 읽는다. 자연과의 일체감을 확인하는 1부와 2부의 시집들도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고통의 꽃”(수평선)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참회하고 있는 시들에서 코드화되어 있지 않은 찌르는 어떤 것(푼크툼)을 발견하게 된다. 쇠백로를 바라보며 하늘의 열쇠를 잃어버린 천사”(문밖에서)의 이미지를 발견한다든가, “그냥 오랜만에 첫사랑 연인이 죽도록 보고 싶어 그만 그 옛날집 골목으로 끌려가는 마음”(연인)에 대한 묘사들은 아득하고 저릿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서둘러 자리를 뜬 이후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나와 마주앉아인연에 대한 원망 대신 고마움을 이야기하는 시에서는 연륜이 묻어난다(예순 살 즈음에). 하지만 이 시집에서 무엇보다 반짝이는 것은 어머니에 대해 읊고 있는 시편들이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재개발 아파트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지난겨울 터진 보일러를 새로 놓아드린다 해도

다 허물텐데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하신다

 

환절기 조심하시라 해도

차분 데서 있다가 차분 데로 가는 거는 감기 안 걸린다

너거는 밥 제때 애들하고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기라

― 「동백꽃부분

 

아들이 걱정할까봐 안심시키려는 어머니의 마음은 코드화된 것(스투디움)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그러한 관습화된 의미를 넘어서는 한 구절이 있다. 보일러를 놔드리겠다는 아들에게 차분 데서 있다가 차분 데로 가는 거는 감기 안 걸린다라고 말하는 구절이 그렇다. ‘차가운이 아니라 차분이라는 사투리에서는 친근감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촉각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은 죽음의 감각이다. 이 말에는 어머니 혹은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죽음을 예감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삶 자체가 차분 데서 있다가 차분 데로 가는것이 아니던가. 시집의 표제시인 하늘 우체국에서 어머니가 여기가/천당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라든지, 염소 두 마리의 눈에서 아주 오래된 할머니의 눈빛으로 나를 읽고 있는 것”(경전)을 발견하는 데서도 죽음의 그림자는 얼핏 스친다. 죽음에 대한 예감이야말로 인간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경전이 되며 죽음이 드리운 음영을 담담히 바라보는 이의 텅 빈 시선은 두려움이 아니라 처연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읽는 이를 침묵하게 만드는 이 고요한 고통의 순간에 시는 고통의 꽃이 된다. “, 틀어막혔던 입을 열고 피는 꽃들”(봄꽃)이여.

 

서정시학 2016 봄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로이트가 든 유명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보이세요?”라는 죽은 아들의 비난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에 대한 일화이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실제로 아들의 시신은 옆방에서 불타고 있었고,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난 덕분으로 가까스로 (이미 죽었으나) 불타는 아들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일화를 들으면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은 아들이 보낸 메시지를 들은 것이라며 이 꿈을 신비화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 꿈을 욕망의 이미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 꿈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은밀한 비밀을 환기시키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이 꿈은 아들이 죽은 것을 자기의 탓으로 여기는 아버지의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즉 아버지-주체로서의 자신을 부정하는 태도가 그를 악몽에서 깨어나 불타는 아들을 구할 수 있게 했다. 만일 그가 자신이 아버지로서 불충분했음을 인정하고 아버지-주체로서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면, 그는 결코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자신 역시 아들의 시체와 함께 재가 되어 버렸으리라.

그리고 여기 다섯 명의 소설가-주체가 있다. 선택은 양진채, 이경희, 정태언, 조현, 허택 등 5인의 소설가가 함께 펴낸 중편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에서 이들은 그야말로 ‘2008이라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은 이 젊지 않은신인들이 소설가로서 등단한 해이고, 이후 이들은 소설가로서 좋은 소설을 써야 한다는 부채의식에 시달렸으며, 이 소설집은 그 결과물이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아등바등 기를 썼던 이들은 소설가-주체로 인정받기 위해 꿈에서도 자판을 두들겼다”(책머리에).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소설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는지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모색의 결과가 이 소설집에서 2008년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왔다. 그들 자신이 소설가로서 느끼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은 무엇보다 악몽에서 깨어나 그들 자신의 현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그들을 다시 그들의 기원으로 이끌었다. 그러니 이 소설집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얼마나 외상적인가.

이들이 소설가-주체로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양진채의 플러싱의 숨 쉬는 돌은 페트락(pet-rock)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다룬다. 한때 미국에서 유행한 페트락 사업을 하러 한국에 돌아온 삼촌은 돌에도 숨 쉬는 돌이 있다고 믿으며, 돌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다룬다. 하지만 이는 당시 한국의 상황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그것이 유행했을 미국의 당시 맥락과도 다른 것이었다. 삼촌은 실패하고 돌아가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으며, ‘는 그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그런데 2008년 촛불집회에서 사랑했던 여인과 우연히 해후한 후 는 삼촌의 실패를 다른 방향에서 이해하게 된다. 삼촌의 실패를 세계와의 불화에서 찾으며 그의 미숙함을 지적하기보다, 그의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리하여 그의 사랑 역시 미완성으로 끝나게 하였던 세계의 실패가 문제임을 알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 소설은 이 유머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어디서든 꿋꿋이 트위스트를 추는 사내가 있다는 것, 이것은 숨 쉬는 돌의 존재만큼 믿기 어려운 것임에도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비록 실패한 농담이 될지라도, 유머는 계속되어야 한다.

한편 이경희의 달의 무덤2008년의 악몽이 잠재되었다가 현재에 다시 소환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고로 누군가는 목숨을, 누군가는 정신을, 또 누군가는 양심을 잃었다. 갯벌에서 시체로 발견된 막달이와 그 막달이를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 시어머니 중지 씨, 그리고 숨진 막달이의 죽음을 담보로 금전적 보상을 노리는 인물들이 각 항에 대입된다. 갑작스럽게 닥친 재앙을 인생을 역전시키기 위해 기회로 탈바꿈하려는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은 죄책감 따위는 과감히 내던져 버린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재앙으로 일어난 일에 괴로워하는 이들이야말로 미친사람 취급을 받고 인생역전의 기회 앞에 트라우마가 될 만한 기억은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만다. 보상금을 받기 위해 거짓 분노와 양심을 버린 대가로 얻은 재산에 대한 집착이 이들의 정신을 마비시킨 것이다. 누군가 죄를 추궁하기 전까지 이들은 자신들이 괴물이 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2008년의 재앙은 이들의 내면에 숨겨진 괴물을 도발시켰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괴물들 앞에 괴물이 나타난다. 끝내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자들의 최후랄까.

정태언의 성벽 앞에서어느 소설가 G의 하루는 숭례문 화재사건을 소재로 등단한 소설가 G의 하루를 따라 서사가 전개된다. 그는 스스로를 삼류 소설가라고 평할 만큼 자괴감에 빠져있다. 여기저기서 소설집 출판을 거절당하고 처지에 있는 그에게, 산다는 것은 탁발과 같은 것이다. 다만 그는 탁발을 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 그러니까 감사함과 고개 숙임의 마음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탁발에 필요한 고요한 마음가짐을 가져서는 소설을 쓸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전설 속의 아기장수에 자신을 대입시키며 자기만의 성벽을 갖춘 소설을 쓰기를 열망한다. ‘자동화를 거부하면서도 일상을 감성으로 녹여내는 소설을 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참한 일상을 견디기 위해서는 탁발의 자세를 버릴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주인공은 탁발과 아기장수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술자의 분열된 의식이야말로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소설을 쓰기 힘듦에 대한 소설을 쓰면서 소설가-주체가 괴로워하는 곳에 소설이 있다라는 명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의 불안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소설은 끝난다. 하지만 이 물음이 남겨졌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소설가 정태언이 바라는 것은 아닐까.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은 이토록 위태한 것이다. 악몽이 악몽인 것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현의 선택을 읽어볼 수 있겠다. 이 소설은 프로이트의 주체 이론이 기반하고 있는 데카르트적 명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프로이트가 분열된 주체가 있는 곳에 가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해 조현은 주체를 인공적으로 분열시키는 프로그램이 출현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STPI(상황부여형 심리검사)라는 이중으로 교묘하게 프로그램 된 이 심리검사를 마친 사람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테스트 받는 과정에서 충성심을 세뇌당하는 부작용을 얻게 된다. 세뇌는 현실에 대한 의심을 기반으로 한다. “어느 상황이 시험의 순간인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순간을 테스트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겹겹의 액자형 서사가 연속되는 방식으로 이뤄진 이 소설은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진짜인 줄 알았던 것이 가짜일 수도 있겠지만 가짜 속에도 진짜, 그러니까 뭔가 삶을 자극하는 이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을 언급하고 있는 결말부를 보면 다시 현실이 가상을 압도하는 인상을 준다. 조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려는 것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선택할 수 없는 문제지를 받아놓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 역시 작가의 의도이려나.

허택의 대사증후군은 소설집의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세계 금융 위기로 소위 잘 나가던상류층에서 노숙자로 전락하게 된 가장의 비화를 통해 이 소설은 한국의 현대사의 몰락을 알레고리화 한다. 작가는 각 장의 제목에 시기별 혈당지수, 혈압, 병명을 기입하여 주인공이 대사증후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한국 중산층의 몰락과 중첩시킨다. 그의 몰락은 주인공의 그칠 줄 모르는 허기에 의해 추동되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그에게 성장신화는 영원히 깨어나지 말아야 할 꿈이었다. 이 꿈 속에 2008년이라는 파국이 도달하기까지 그는 자신이 자본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가리던 환상이 파국으로 인해 산산이 깨지고 난 후 현실은 악몽이 되었고, 그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살아있는 송장이 되었다. 이러한 처지를 자각하게 된 그가 남긴 유언이 자신의 시체를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해달라는 것이라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는 죽음으로써만 자신이 생전에 저지른 죄를 갚을 수 있는 것이다.

허택의 소설에서 다뤄진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다룬 영화 빅쇼트는 다음과 같은 마크 트웨인의 말로 시작한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선택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그처럼 뭔가를 안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곤란함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은 독자뿐만 아니라 소설가들 스스로에게도 향해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소설가로서 등단한 2008년의 사건들을 다루면서 2008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와 더불어 그 사건들에 대해 소설을 쓰는 그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하였다. 이들은 불 타는 아들의 애원에 잠에서 깨어났던 아버지가 그러했듯, ‘암중의 와중에도 모색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이 소설집을 내놓았다. 문학의 역할이 그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케 하고 내적인 갈등을 조장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면, 이들이 온몸으로 문학을 수행하고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소설에 대한 이들의 불안은 그들이 여전히 소설가임을 증명하는 징표이다.

 

<문학나무> 2016년 봄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유원지에서 가지고 온 풍선을 방 안에 띄워 놓고 천천히 가라앉는 풍선을 지켜볼 때의 기분이란 어떠한 것일까(식욕). 어쩌면 그것은 비어 있는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볼 때의 막막한 느낌이라든가, 모든 배우들이 사라진 후에도 눈부신 조명이 가득한 무대를 바라볼 때의 쓸쓸한 기분 같은 것은 아닐까. 유계영의 시를 읽으며 모호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그녀의 시는 이열 종대의 해골들 사이”(묻고 답하다)의 어떤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독자를 모호한 기분에 잠기게 한다. 풍선은 완전히 가라앉은 것도 완전히 떠 있는 것도 아니다. 낮과 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그러한 이분법에 의해 세계는 구획되고 인식의 틀 속으로 안정적으로 안착한다. 착각과 오해를 이해와 확신으로 변화시키는 인식의 폭력적 힘은 그것이 안정적으로 기능하는 바로 그만큼 우리 삶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때 유계영의 시는 공중으로의 도약과 동시에 바닥으로의 뚝 떨어짐이라는 지그재그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마치 초월과 몰락의 쉼 없는 반복을 통해 정신과 영혼의 근육을 팽팽하게 단련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춤이 허공에 기록되는 텍스트라고 했을 때 그 텍스트는 다분히 시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모호하고 압축적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허공을 가르며 일련의 동작들이 흘러갈 때 그 동작들은 몸이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언어가 있음을 보여준다. 종이에 고정되어 있기를 거부하며 의미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스텝들, 연속과 정지에 의해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일련의 제스처들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 하며 사물에 내재해 있는 해석적 잠재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이는 해석의 대상으로서조차 취급받지 못했던 사물들을 구원해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했던 것들을 감각하게 되는 충격에 의해 행위 주체들은 주체의 분열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건을 겪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분열상은 유계영의 첫 번째 시집 온갖 것들의 낮에 대한 해설들에서 생각하는레이디의 탄생이라는 맥락에서 다뤄진 바 있다. 누군가는 이 생각하는레이디의 탄생에서 씩씩한 명랑함을 발견하고(양경언), 누군가는 우울한 천사의 모습을 읽어낸 바 있다(박슬기). ‘생각한다는 행위에서 지난한 반복을 부정하는 행위의 역동성에 방점을 둔다면 명랑함을, ‘생각한다는 행위가 바뀌지 않는 세계의 고정성과 마찰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결국 우울함으로 귀결될 것이다. 다만 유계영의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녀 자신이 우울한 명랑함, 혹은 명랑한 우울함이라고 할 수 있는 역설적 위치에 스스로를 놓으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분열증적인 위치에 두고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지 않는 불안정한 위치에 자신을 붙잡아두려는 의지의 발현일 수 있다.

유계영은 이를 빛과 비가/함께내리고 각각 쏟아”(식욕)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보여준다. 혹은 죽을 뻔한 이야기 속에서/웃음거리를 찾아내는 심정”(묻고 답하다)같은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정보 속에서 전망이 부재한 현실은 연기가 자욱한 방안의 풍경으로 제시된다. 그럼에도 유계영은 종말론적인 시각과 함께 그러한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생각이란 것을 하는 주체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생각은 이동성 혹은 전염성이 강하다. 하나의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며, 곧 다른 생각은 잊히고 만다. 생각들은 가벼워지고 지나치게 많은 생각들이 연달아 일어날 것에 대한 무서움을 불러일으킨다. 생각이 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정신병적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서, 유계영은 이를 전염병에 비유하기도 하는데(니진스키), 이 전염병이야말로 의 존재감이 옅어지면서 우리우리이도록 하는 도래해야 하는 병이라는 관점을 보여준다는 데서 유계영의 독특한 병리학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병의 전염성과 관련해 유계영이 쓴 천재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에 대한/바친 시를 조금 더 읽어보자. 니진스키에는 분열증적인 예술에 대한 지향이 나타난다. 니진스키의 춤을 직접 본 사람들은 그에게 중력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공중에서 날아올랐다. 그 불가사의할 정도의 날아오름’(엘레바시옹)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의 발이 인간과 새의 혼합인 해부학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자기도 모르게 믿어 버렸다. 그의 춤은 환영을 만들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려는 한 무용수의 의지가 관객들을 집단 최면 상태로 이끌었다. 허나 니진스키의 삶은 여느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불행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그는 자신의 영혼이 병들었다고 생각했다(“의사들은 내 병을 모른다. 내 정신은 건강한데 내 영혼이 앓고 있다. 내 병은 너무나 위중해서 곧 치유될 수 없다.”바슬라프 니진스키, 이덕희 옮김, 영혼의 절규, 푸른숲, 2002). 날아오르고자 하는 무용수의 의지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데 대한 자각에서 촉발되었을 지도 모른다.

니진스키는 자신의 일기에 , , , 라고 노래하는 어린 딸을 보며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 아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은 ! 공포가 아니고 기쁨인 것을깨닫는다. 그의 정신은 새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약한 영혼을 지닌 자들이 합리적인 일상 세계와 부딪혔을 때 받게 되는 상처는 그들의 정신을 분열증적인 것으로 만든다. 허나 그들은 초월적인 세계를 주시할 수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몸이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개체로서의 좁은 시공간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를 엿볼 수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삶을 생기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것이 명확한 의미로 파악되지 않더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기쁨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는 명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초월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분열증을 앓으며 분열증을 앓기 위해 초월적인 것을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초월적인 것이 분열증이 일으키다가 초월적인 것과 맞닿는 순간을 유계영은 이렇게 묘사한다. “오른손은 왼손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른손은 왼손을 맞잡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오른손은 왼손을 맞잡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나는 공중에서 머물다가

내려오고 싶을 때 흩어져 내렸다

― 「니진스키부분

 

니진스키는 무용수가 아니라 -되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에게 환영(vision)을 제공했다. 그는 자신이 공중에서 머물다 내려오고 싶을 때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유계영은 이를 내려옴이라기보다 흩어짐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데, 이는 그가 공중에서 내려오는 순간 더 이상 니진스키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니진스키라는 개체는 이미 흩어지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니진스키는 우리라고 하는 모호한 범주에 들어가 버렸다. 여기서의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이들, 그들이 부재하는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지러운 빛을 본 적이 있는 자의 영원체험에서 비롯한다. 유계영이 한 산문에서 죽음으로부터 삶을 위협받지 않는 천진난만한 표정의 빛, 실어증에 걸린 유령처럼 투명을 떠다니는 빛”(환상의 빛, 세계의 문학, 2015 겨울호)에 대해 쓴 것을 읽으며 새가 되어 날아올랐다가 흩어진 무용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처럼 시인의 앓고자 하는 분열증에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의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경험한 적이 있는 자가 느낄 법한 모호한 동경 혹은 연민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스라한 빛 하나를 잡기 위해 허공에서 흩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분열증의 전염병을 앓고 나서 탄생하는 우리라는 주체성은 독무를 마침내 두 사람이 함께 추는 춤, 그러니까 파드되로 변형시킨다. 묻고 답하다에서 당신의 긴 혀에 나를 묶고” “당신을 흉내 낸 목소리로뚝 떨어지면서 독무인 줄 알았던 그의 춤이 실은 파드되였음을 알게 된다. 이때 낮과 밤이 뒤엉켜” “모든 사물이 하나로보이는 증상의 정점에서 섬망을 비집고 쏟아진다(). 하지만 니진스키가 공중에서 아무리 오래 머물렀어도 결국은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였던 두드려도 텅 빈/나만 남은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얌전히 있으라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살지 말라는 그런 가르침들과 학교에 가고 구걸을 하라는, 우울과 중독에 대해 떠들라는 요구가 중력의 장을 형성한다. ‘그러나를 중얼거리며 빛에서 멀어지는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슬프다. 그리고 끝까지 미안하다. ‘는 그저 공중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바늘 끝에 올라 춤추는 가장 작은 발을 가진 를 본다. 그리고는 이열 종대의 해골들 사이에 그렇게 묵묵히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묻고 답하다). ‘우리가 되는 데 실패한 의 절망은 대관람차에도 나타난다.

 

막다른 벽이라 생각하세요

결국 빠져나갈 것이라면 최대한 긴 과정을 출구 앞에 펼칠 것입니다

 

들어가서는 나오지 못한 수인들처럼

귓속에 이름이 쌓여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잠자코 기다리던 그들이

일제히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 「대관람차부분

 

분열증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 있었던 자의 기쁨은 절망으로 쏟아진다. 미친 자는 우울하지 않다. 죽은 자는 절망하지 않는다. 고통과 절망은 초월적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막다른 벽을 마주하고 만 모든 자들의 몫이다. 해서 그는 세계를 폐쇄되어 있고 자신은 텅 비어 있다고 여긴다. 다만 독특하게도 유계영은 자신의 몫이 되어버린 절망이나 우울 대신 미안함을 갖는데, 이는 우리에서 로 돌아와 버린 무거워져버린 자신에 대해 그 자신에게 느끼는 쑥스러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유계영은 막다른 벽을 앞에 놓고 명랑할지 우울할지에 대해 과묵하게 생각하는 중인 것 같다. 그러니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좋다라고 말했다고 해서(내일의 처세술, 온갖 것들의 낮)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녀는 아무 것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무언가를 계속하면서 공중에서 머무르다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자신을 터뜨려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쩐지 몹시 강단이 있을 것 같은 이 덤덤하고도 단단한 시인에게서 무용수의 유연하고도 탄탄한 몸매를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녀가 보았다던 그 빛, 현기증이 날 만큼 압도적이었다는 그 빛이 언젠가 그녀의 시에서 터져 나오리라. 호주머니를 뒤집었을 때 흩어지는 먼지들처럼 쌓여 있던 이름들이 빛이 되어 춤을 출 것이다. 그때까지 그녀의 내면의 텅 빈 구조가 세계의 고유한 이름과 질료들로 채워지기를. 그것들은 자칫 우울 쪽으로 경사될 수 있는 그녀의 시를 명랑과 유머 쪽으로 이끌어 그녀에게 경계에 조금 더 머무르면서 생각할 수 있는 여력을 주지 않을까. 레이디의 다음 스텝을 기다린다.

 

<시로 여는 세상> 2016 봄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