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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던 선배가 있었다. 11월이 되면 어쩐지 긴장하게 되는 느낌이 좋다고 그는 뿌듯한 듯이 말했었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저 참 멋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십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 11월이 주는 긴장감이라는 것은 아마 아무리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즐길 수 있는 경지를 말하는 것 같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농담을 던지듯 한 차원 높은 경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올해 나는 한 친구 덕에 그 감각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나의 이십대를 함께 보낸 사람이었고 주위 사람들에게 언제나 유쾌한 웃음을 주던 철없는 어른이었다. 세월호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호탕한 웃음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가혹한 봄이었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수용할 줄 아는 것이 어른의 자세라는 것을, 나는 배우고 싶지 않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했다.

  

정확히는 배우고 싶지 않았음에도 배우려 했지만,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너무나 의미 있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일 뿐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절망을 주는지를 배웠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나 역시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걸 결코 잊지 않으려고 했다. 기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일방적인 무의미의 강요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세월호를 교통사고나 보상금문제로 축소하려는 데서 우리는 그러한 폭력을 마주한다. 죽어라 일한다고 해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600만 비정규직에게 노동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간다. 시간강사는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지옥 같은 입시를 통과하자마자 취업준비생 취급을 받는 대학생들은 배우는 것의 의미를 빼앗겨버린다.

함부로 존재 이유를 부정당한 이들은 말할 기회조차 잃어버린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삶을 ‘무효’로 만들어버리려는 것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인 것만 같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진정한 문제는 안전 불감증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의미를 강요함으로써 무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얻어내려는 것은 아닌가. 대의가 옹호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전태일이라는 한 청년의 죽음에 비해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은 얼마나 푸대접을 받고 있는가. 옳은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이념은 이제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의미를 발견하려 했던, 이제는 폐기처분된 낡은 가치 앞에 남은 건 무엇인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것 같다는 공허함은 아닌가.

다시 11월이다. 아니, 11월도 이제 다 지나갔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일들에 지치거나 그 세상의 높은 벽 앞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무의미마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찮아 보이는 일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절망조차도 농담처럼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겐 절실하다. 지치면 지는 거니까, 그래서 세상은 자꾸만 무의미를 강요하며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를 위해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 그러니까 그 없이도 이 삶을 즐겁게 살아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즐겁게, 2014년을 보내주자. 우리는 2015년에도 함께 할 테니.

2014.11.23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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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는 형식이 지닌 비밀스러움을 좋아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듯 써 내려간 독서일기 『행복한 책읽기』라든가 롤랑 바르트가 유난히도 각별한 사이였던 어머니를 잃고 나서 쓴 『애도일기』 같은 것들이 그렇다. 물론 일기라는 매우 자유로운 형식의, 게다가 대체로 짧은 분량의 단편적인 기록들에서 정제되고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형식 없음을 통해, 삶이란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우며 파편화된 채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정리되지 않을 것만 같은 삶의 조각들을 모아놓은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며 우리는 사소한 일상들이 실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일기를 쓰는 것은 삶에 대한 일종의 애도작업이라고까지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애도가 죽은 이에 대한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처럼, 일기 역시 이미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기록으로서 자신이 상실한 삶의 일정 부분을 애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도란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것이자 그 상실이 주는 고통을 잊고 다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디 일기만 그렇겠는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긴 분량의 소설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 역시 그러한 애도작업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시간에 대해, 그 시간동안에 사라지고 있고 사라질 소중한 많은 것들에 대해 그는 그다지도 기나긴 애도사를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 애도는 개인적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슬퍼한다는 것은 그 자신들의 삶 역시도 무의미하지 않음을 배우는 공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공적인 사건에 대해 함께 슬퍼하고 그 슬픔을 나누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인식하고, 나아가 그러한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그 고통을 유발하는 폭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불충분한 애도는 함께 슬퍼할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그 사회에 우울증과 무기력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불확실한 삶』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한 것이 그러한 지점이다. 그녀는 9.11사태에 대해 슬퍼하는 것을 억압함으로써 국가적 우울증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죽은 자들의 이름, 이미지, 서사가 공적 재현에서 삭제된 결과,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겪은 상실에 대해 애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200여 일이 지났다. 유족들은 여전히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할 기회조차 박탈 당한 채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세월호 유족들만의 싸움일까. 도대체 세월호를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이 사회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삶’이 가능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시정연설에서 ‘경제’를 59차례나 언급했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이 “저도 부모님을 다 흉탄에 잃어 가족을 잃은 마음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통감하고 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세월호를 악몽으로 기억하게 하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그 심정으로 유가족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닐까. 애도해야 할 죽음과 애도하지 않아도 되는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2014.11.2 대학신문

http://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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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참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도 어떤 방법론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데, 우선 이 세계에 절대적인 진리 따위란 없으며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누군가에는 정의일 수 있다고 전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정당하지 않은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으니 섣불리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세계의 복잡성과 본인의 무지함을 극적으로 대립시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그렇게 명백하게 부당한 사태를 보고도 최대한 복잡하게 생각하면서 별거 아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순간,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감에 불타 괴로워해야 했던 어리석은 자신을 구해낼 수 있다.

이것이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불의에 분노하는 것 자체를 귀찮게 여기거나 아예 불의에 대한 판단기준 자체를 상실하여 어떤 일에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요즘 종편을 위시한 언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런 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식민지 시기는 근대화의 발판을 놓은 시절로, 쿠데타는 혁명으로, 독재는 산업화로 둔갑하는 이 시대에 비상식을 상식으로 수용하는 자세야말로 우리가 갖춰야 할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가령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한 비상식적인 재판 결과 같은 것은 뇌리에서 재빨리 지워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국회를 정상화하자면서 비정상적인 협상태도를 보여주는 자들에게 극도의 피로감을 느낄지라도, 국민의 대다수가 뽑은 국회의원이니 그 상식에 맞추는 것이 국민 된 자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은 갖추기를 권유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불의를 참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 탓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루저’나 ‘잉여’라는 현실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현실부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정의가 아닌 것을 정의라고 우기는 망상의 단계까지 나아간 것이 세월호 피로감 운운하며 폭식투쟁을 벌이고 이를 자랑스레 떠벌리는 몰지각한 일부 세력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불의를 참느라 자존감이 바닥을 칠지라도 자기비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는 정의마저 짓밟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 인간이 되기는 어렵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속물로 가득한 사회가 지옥일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상한’ 제안을 한다. 거룩한 속물이 되라. 고독의 자기의식을 가진, 자폭을 할 줄 아는 속물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고 말이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불의를 참을 수밖에 없는 잉여라는 사실이 아니다. 자기계발 담론이 유포하는 신화와는 달리, 아무리 노력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을 잉여로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불의한 무대에 서 있는 사회자가 아니라 불의한 무대 그 자체를 바꾸라. 물론 당장에 그 일을 할 수 없더라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잉여니까. 자책하거나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 말고 조금씩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하자. 이것은 불의를 견딜 수밖에 없는 잉여이되, 그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들이 이 불의한 세상을 살아나가는 하나의 방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대학신문 201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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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민영화, LG가 인수하기로”라는 제목의 『대학신문』 기사를 기억하는가. 이 기사에는 서울대를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수익을 이 기업에서 대주기로 양자 간의 합의를 마쳤다고 보도되어 있다. 해당 기업체의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등록금은 2배 인상하고 직원은 감원하되 교수들에게는 부장급 대우를 약속했다고 한다. 또한 경영대와 공대, 의대를 집중 육성하고 산학협력을 강화하여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하였다. 이 기사는 약 십 여 년 전인 2002년 4월 1일 자 『대학신문』 만우절 판에 실린 가상기사였다. 당시는 법인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던 시점으로 우려 반 장난 반으로 쓴 것이었겠지만, 서울대가 법인화 되고 한 대기업의 전직 회장이 이사장을 맡게 된 지금, 장난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게 된 듯하다.

 

그런데 이 기사의 예지력은 이번에 서울대 이사장이 된 박용현 두산그룹 전 회장이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는 중앙대의 사례를 통해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중앙대는 두산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구조조정 덕분에 대학 서열체계에서 이전보다 상위권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기업이 보기에 시민센터에서 들어도 무방한 것으로 간주된 교양과정은 차근차근 정리되어 나갔다. 만우절 판에서 예상했던 것처럼 경영대를 키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전교생의 경영대생화를 도모해 <회계와 사회> 수업을 듣지 않으면 졸업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교수들의 ‘철밥통’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교수들 사이에도 등급제가 도입됐고계속해서 낮은 등급을 받는 교수에게는 안식년 금지와 연봉 동결, 정직 등의 철퇴가 내려질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만우절 판의 빈곤한 상상력을 질타하듯 두산의 중앙대 개혁은 보다 거침이 없었다. 개혁에 반발하는 이들에게는 퇴학이나 무기정학 등의 징계는 물론이고 사회에 나가기 전에 자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도록 손해배상청구의 위엄을 경험하게 했다. 현실 정치의 냉정함을 가르치는 것도 그들의 교육 방침이었다. 재단과 총장을 비판한 교지는 예산이 전액 삭감되어 폐간되었다. 내 편과 네 편을 효율적으로 가르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순응하는 학생에게는 각종 특혜를, 순응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기업의 직원을 동원해 사찰이 내려졌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인재철학을 내세우고 있는 기업인만큼 학교를 기업형 인재 양성소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서울대는 만우절 판에서 보도한 것이나 중앙대의 경우와는 달리 기업체에 의해 직접 인수된 것은 아닌 만큼,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자본주의 논리가 대학에도 통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서울대만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하지만 아직 속단은 금물이다. 법인화 반대투쟁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 학생들이 비상총회를 열든 정문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벌이든 단식을 하든 학교 측 방침은 굳건하리니, 우리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있어라. 그러면 거짓말 같은 현실이 당신의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대학은 기업의 미래고, 기업은 대학의 미래다.

 

대학신문 201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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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라는 말이 있다. 열아홉, 스물아홉처럼 나이에 아홉수가 들면 결혼이나 이사와 같은 일을 꺼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그저 불길하게만 여길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변화의 때가 왔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가령 비유적인 의미에서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그리고 그동안의 자기 삶을 뒤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전환점의 순간에 대해 ‘아홉수’가 찾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엄청난 무게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디로 가려 하는지에 대한 거대한 물음표가 떠오르는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어떤 사회에나 찾아오는 것이니 말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5년 도쿄에서 일어난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사건을 일본의 정신사를 말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이정표로 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본 사회에 찾아온 아홉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법적인 처리가 끝난 이후에도 이 사건을 망각하지 않는다. 사린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한 책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는 정의와 악이라는 이항대립 속에 묻혀 버린 피해자 개개인의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옴진리교는 악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넘어, 실은 그 악이라는 것이 실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것이 사실 자기 이미지의 부정적 투영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묻는다. 옴진리교의 교주 이사하라 쇼코가 만들어낸 ‘쓰레기’ 같은 환영을 떨쳐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이야기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이러한 지적은 괴로운 것이다. 더구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당연한 요구조차 선동으로 받아들이는 미개한 정치인을 가진 나라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세월호 문제로 소비심리가 위축된다”고 말하는 대통령을 둔 나라의 국민으로서,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떠도는 가운데 돈보다 생명이 우선이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얼마나한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절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외면해서는 안 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며 서둘러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비극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월호의 죽음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베도, 그 ‘일베충’들이 세월호에 타고 있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 역시 우리의 이웃일 수 있다. 어쩌면 애써 의식적으로 배제하려고 하는 이 혐오스런 이야기들이 모여 세월호라는 비극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에선 이런 일도 일어난다. 부당한 발언에 대한 사과를 받겠다고 찾아간 방송사에서 폭도로 취급을 받고,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려고 청와대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그 누구보다 차분하게 “저희는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모든 사람의 안전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국가에 대한 믿음과 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싶습니다”라고 호소문을 쓴다. 유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작 보험금 액수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천박함에 맞서, 이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식에게 “내 아들이 되어 주어서 고맙다”고 뒤늦은 고백을 한다. 이들의 경이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무엇을 하면 되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얻는다. 그러니 어찌 이들의 이야기를 잊을 수 있겠는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의 이 가슴 아픈 이야기를.

 

2014.5.18 대학신문

http://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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