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기형도에 대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80년대와 90년대를 이전과는 다르게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을 가져와서 2000년대 초반 일어난 근대문학의 종언 관련 논쟁의 의미를 기형도와 관련해서 새롭게 짚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기원을 썼을 때 이미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것과, 근대문학의 기원이 네이션의 탄생과 관련된 것처럼 근대문학의 종언은 근대적 주체를 만들어냈던 네이션의 붕괴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2000년대 초반의 논쟁을 김홍중 선생님이 말한 '진정성의 종언'과 관련지어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김홍중 선생님이 진정성의 종언을 다소는 우려스럽게 진단하셨다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면서, 진정한 '나'를 추구하려는 80년대 문학의 가능성이 문을 닫는 그 순간 기형도 문학이 출현했다는 그 우연성의 의미를 밝혀보고 싶었다.

 

'기형도 신화'라는 걸 만들어낸 김현의 죽음과 기형도 자신의 죽음이 '80년대는 끝났다'라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 상승 작용을 만들어냈다는 점, 그래서 '기형도 신화'에 대해 당시 '운동권'들이 가졌던 불편함을 이해해보고 싶었다. '운동권'을 비판하면서 공적 주체의 차원을 소거시킨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이들과도 다른 맥락에서 '기형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형도가 호이징아의 <중세의 가을>을 읽으면서 꿈꾸었던 '중세'가 무엇이었는지를, 김현이 말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개념과 연결지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 스스로 해결되지 않는 물음들이 발표문의 요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기형도의 시적 주체는 '진정성의 주체'가 아닌가, 기형도 문학이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닌다면 그 가능성의 의미란 무엇인가? 기형도 문학을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으로까지 보는 것은 과장이 아닌가?

 

그러다가 오늘 김정근의 <그림자들의 섬>을 보았다. 충북대에서 수업을 마치고 5시 버스를 타고 길이 막혀서 영화가 시작하는 7시 반을 훌쩍 넘긴 43분에야 영화관에 겨우 들어갔다. 숨을 고르고 영화를 보는데, 영화는 80년대부터 시작했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조선소 노동자들이 어떻게 민주노조를 만들게 되고, 노조위원장이 의문사를 당하고 시신을 탈취당하고, 다시 싸우고 일어나 형편이 나아지니 한때는 동지였던 이가 대통령이 되어 탄압에 앞장서고 그리하여 또 다른 동지를 잃고, 그 동지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가 없어서 누군가는 다시 크레인에 올라가고, 하지만 뜻하지도 않게 희망버스라는 전환의 순간이 생기고 다시 싸울 힘을 얻었다가는 그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는 절망의 깊이로 인해 누군가는 또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그렇게 80년대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억압적인' 80년대에서 '자유로운' 90년대로 설명되어왔던 것에 대해 86 아시아게임, 88올림픽, 조용필의 유행, 애마부인의 시대 등을 이야기하며, 기존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80년대의 분위기에 주목하는 것은, 90년대의 급작스러운 분위기 변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그림자들의 섬>을 보면서 이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적인 것'이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함께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선행연구들에서 이런 점을 지적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리석은 내가 미처 그 중요성을 깨우치지 못했을 뿐이다). 영화에서 김진숙 위원이 말하는 것처럼 '나'와 '너'의 잘못이 아닌데 서로 죄책감을 가지게 만드는 그 자본과 권력은 건재하다. 하지만 그 권력에 맞서싸웠던 연대의 힘은 갈수록 그 기반이 줄어들고 있다. 80년대 노동자들의 연대가 짐승과도 같은 삶을 인간의 것으로 바꿔왔다면, 이제는 인간의 삶이 짐승의 그것으로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를 말하기란 어렵다. 다만 적어도 무엇이 진정한 것일까, 무엇이 옳은 것일까를 고민하는 삶, 그것이 '너'와 '나'를 연대하게 하는 다리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은 권태에 빠지기 쉽다. 죽은 자들은 우리의 발목을 가끔씩 부여잡고 무엇을 잊고 살아가지는 않는지를 묻는다. 그 자들이 그리워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일 때,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생각하며 흥얼거려볼 때, 그래, 이런 것이었지, 우리가 같이 만들려고 했던 세상은 이런 것이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는 현재의 발목을 잡고 그가 다른 미래를 걸어가게 해 준다. 여전히 먹먹할 수 있어서, 그래도 웃으면서 다시 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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