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의 정치와 증오의 정치

헌재 앞 태극기 집회 현장을 지나치다가 느꼈던 공포에 대해 말하자 C는 그들이 젊었을 때부터 '깡패'였을 것이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 반응 역시나 무섭다고 말하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분노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말했다. 자신은 그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해 보려는 것이라고. 나는 그건 '이해'가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그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을지 어려웠다. 그의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증오처럼 느껴졌던 그건 냉소일 뿐이지 않냐고 나중에서야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적절한 반응이 무엇인지. 그저 무섭다고 느끼는 것만도 능사는 아닐 터인데.

 

#말과 활 2016 겨울호를 읽다가

내 세계관의 터무니없이 좁음을 한참 깨닫고 있는 요즘,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글들을 닥치는 대로 사서 구해서 읽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 논점들을 정리하는 중. 그 중에 하나는 '미러링'. '미러링'이 뭐고 그것의 효과를 설명하다보면, 그것이 발화의 차원에서 되돌려 준다는 사실에 국한해서 설명하게 되는데(너네도 해왔는데 왜 우리는 안되냐), '여혐' 발화와의 불균등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수행 효과까지를 엄밀히 구별해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 즉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함의하는 것은 '미러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희진 선생님이 남혐은 불가능하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 그런 점에서 지속적으로 제도적 차원에서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필요한데, 90년대의 과오(제도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인식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 때의 '반발(backlash)')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운동'차원의 움직임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최근 '페미니즘'을 주제로 내세운 학회, 토론회에 몰리는 인파와 자발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독서모임 등은 주목할 만한 것 같다.

다만 '미러링'과 관련해서는 오카 마리가 지적한 것처럼, '유슬림'이라는 표현에서 무슬림을 비하하게 되는 것과 같이 '미러링'이라고 주장되는 일부 표현에서 '비하'되는 타자가 발생한다는 점은 어떤 식으로든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점에서 말과 활에 실린 글의 제목을 패러디하자면, 페미니즘은 항상 급진적인가, 라는 물음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 반성을 좀더 덧붙이면, 나는 어째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을 이론으로만 이해했는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여성으로서 차별을 '당연시' 해온 것인지, 페미니즘을 내 '삶'의 문제와 관련지어보지 않았던 이유가 지금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다.

 

#'사랑'

라깡과 관련된 강의를 듣다가, 드라마 <도깨비>에 나왔던 대사처럼, 모든 사랑이 첫사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했다. '사랑'도 주체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사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사랑이었고, 또 지나고 보니 그 전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었어서 사랑을 시작하는 자에게는 그 시절 시절의 사랑이 '첫' 사랑이게 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 '특수한' 인간이고 그와 하는 '사랑' 역시 특별한 것일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그 한 사람을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사랑의 언어를 발명해 내야만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하셨고, 나는 그 언어가 진부해지는 순간 그 사랑은 끝난 것이라는 말에 무엇보다 공감했다.

안티고네를 비혼주의자로서 주목하는 해석 역시 흥미로웠는데, 비혼주의자로서의 여성이 '국가'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예외적 존재인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안티고네는 햄릿과 유사한건가. 자기 운명의 주사위가 결정된 후 '결혼'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결혼'에 대한 거부와 '국가(법)'에 대한 거부는 무슨 관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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