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시와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를 혐오한다.”

워싱턴 DC 어느 술집에서 들려온 말

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 중에서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라면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한다. 그가 정의하는 에로스는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실행하여 자기 계발적 주체가 따르고 있는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에서 벗어나 타자의 아토피아(atopia)와 만나는 것이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란 강요되는 기존의 선택항에서 벗어나 소유하고 붙잡을 수 없는 새로운 관계항을 만드는 행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에로스(eros)의 속성과 연결된다. 동일자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은 타자와의 관계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할 수 있음의 절대적 긍정성을 벗어버리고 타자의 시간으로서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병철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안전한사랑, 그러니까 타자의 결여에 응답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부의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마저 보장되지 않는 헬 조선에서는 조건부의 사랑마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n포 세대수저계급론과 같은 신조어의 출현이 함의하는 것은 사랑 따윈 필요 없게된 현실에 대한 극도의 절망과 냉소이다. 신자유주의가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을 통해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상태에 빠뜨린다는 한병철의 해석이 불충분한 것은, 이 성과주체를 소진상태에 빠뜨리는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에 대한 물음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체들은 지나친 긍정성에 노출되어 있는 동시에 그에 버금가는 부정성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은 강요되는 긍정성이 거짓이며 기만임을 그 자신이 누구보다 알고 있으며, 매일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과정에서 할 수 있음이 아니라 할 수 없음을 체험한다.

이러한 와중에 자신의 찌질함을 방패삼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여성, 장애인, 호남, 성소수자,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혐오 발언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을 약자로 위치시킨다. 억눌려왔던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자신과 같이 용기 있는행동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겁쟁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자기에 대한 혐오를 타자에 대한 공격적 혐오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이들의 행태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로서의 헤테로포비아(heterophobia)를 연상시킨다. 미지의 타자가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위험과 불안을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2. 시의 종말과 시인의 존재론

혐오는 한국문학에도 나타나고 있다. 신경숙 사태가 벌어지고 인터넷 댓글 중에는 그래서 나는 한국 소설(혹은 문학)을 읽지 않는다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취업이 되지 않는문과 출신이어서 죄송하다는 의미의 신조어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돌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이를 문학에 대한 혐오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쓰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시단의 기이한 구조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패배적인 냉소적 발언에 자기 혐오적인 측면마저 엿보인다는 것이다.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분노(anger)와 분개(indignation), 그리고 혐오(disgust)를 구별하면서, 혐오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라면서 이러한 감정이 주체를 대상과 가능한 멀리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주체와 대상을 마주치게 하는 분노나 분개와는 달리 혐오는 대상에 대한 개입을 방해하여 도피와 방기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에 대한 찬사가 드높아지고 시의 자유가 결사적으로 주장될수록 오늘날 시는 점점 더 아무것도 아니게 되거나, 심지어 (가장) 손쉬운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면서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2010년대의 시들을 시인이라는 존재의 위상과 관련해 징후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들이 던지는 에 대한 물음은 곧 에 대한 물음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신해욱은 일찍이 생물성(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에서 얼굴이 없는 불행”, 분열된 주체의 발견 이후 나타난 병든 말()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동시에 두 개의 말이 나와 말의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의 무력감이란 턱을 움직여 음식물을 씹을 수도없는, 자신의 얼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주체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의 모습은 둘이라는 혀를 가진 나”(박성준, 혀의 묘사, 몰아 쓴 일기, 문학과지성사, 2012)와 연결된다. “서로에게 혼잣말로 같이 가자라는 이 시에서의 제안에서 알 수 있듯이 소통 불능에 상황에서도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주면서 타자를 붙잡는다.

타자들과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계속해서 이인칭의 의 이름을 부르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황인찬의 발화(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와 안웅선의 발신(發信)(문장웹진, 20116월호)이 그러하다. 두 작품 모두 이인칭(‘’, ‘당신’)을 호명하지만 발신될 뿐 영원히 수신되지 않”(발신)는 혼잣말의 세계가 이어진다.

 

혼잣말을 하는 누이에게, 누이야. 그만 그쳐라.

혼자라는 성질만 가지고 가서 스스로 벼랑이 되어라. 하고

둘이라는 혀를 가진 나에게

내가 그토록 그리워한 것이 다른 네가 아니라 입속 다른 형식인

나라는 것을 중얼거리다 보면

건강한 묘지로 가 무덤을 핥아대는 입은

나처럼 내 입인가, 나와 멀어질, 나 같은 네 입인가.

― 「혀의 묘사부분

 

찌개가 혼자서 넘쳐흐르고 있다

불이 혼자서 꺼지고 있다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지나친다

― 「발화부분

 

당신, 흔적이 아닌 적 있었던가 웃거나 화내지 않음으로 야만의 박동이 된다 간신히 무채색을 꿈꿀 수 있다 덧칠을 덜어낸 화가의 자리 웃자란 가지들이 시야를 벗겨내고 있어요 입술이 붙었다가 간신히 떨어지는 순간을

새벽의 공중전화 숨어 울기 좋은 크기로 일어나세요 나도 사람입니다 여름이란 참 눈에게 많은 무늬를 주는군요 이제 길거리에 팔리는 이야기들이 늘어 가지만 당신, 그것은 발신될 뿐 영원히 수신되지 않아

― 「발신부분

 

2000년대 미래파 시인들이 를 분열시키거나 우연한 를 발명하는 방식으로 이질적인 것을 환대하는 양상을 보여주었을 때 이는 에 대한 심급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만큼은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미래파가 비평가들의 승인을 받아 그 의의를 인정받을수록 아방가르드 시학의 파괴성은 가감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였다. 미래파 시가 이질적인 것을 도입함으로써 끌어냈던 파괴성이 급격히 낡은것이 되어 버린 것은 그것이 일종의 유행으로 인식되었다. 아방가르드를 유행으로 인식하는 낡은현실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이들의 호전성은 현실 안에서 파괴력을 가지기는 힘들었다.

김수영은 전위적인 예술과 낡은 현실 사이의 분열에 대해,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서시)라고 통탄한 바 있다. 여기서 첨단의 노래첨단의 노래가 불리는 현실과 불화한다. 김수영이 지지한 노래를/더러운 노래를 생기 없는 노래를부르겠노라고 역설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김수영의 절망은 첨단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이 낙후해 있다는 데 있다. 시와 현실의 분열에 그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김수영이 말한 지지한 노래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첨단의 노래와 불화하고 있는 낙후한 현실을 끊임없이 소환해냄으로써 시와 현실의 간극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는 시인에게만 주어진 명령은 아닐 것이다. 작품이 완성되면 시인의 존재와 무관한 해석의 장에 놓이게 된다는 데서 이 간극은 생산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비평가는 이 텍스트가 현실과 불화하면서 일으키는 생산성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미래파의 전위성은 시와 (시가 읽히지 않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적극적으로 상기시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는 이런 맥락에서 주목된다. 신해욱이 강박적으로 를 탐구하며 “‘잃어버린 나, 더 나아가면, ‘잃어버린 나를 잊어버린 나’”를 탐구한다면, 황인찬은 잃어버린 시, 나아가 잃어버린 시를 잊어버린 시에 대한 애도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다시, 에로스의 종말

황인찬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2012년 이후 가장 많이 팔린 시집으로 꼽힌다. 이 시집으로 최연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황인찬의 펴낸 차기작에 대한 기대는 희지의 세계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졌다. 우선 박상수는 황인찬을 “‘몰락하는 중간계급의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으로 꼽으면서 그가 감각의 귀족주의자라고 명명한 이장욱, 김행숙, 이근화, 하재연 등의 시인과 구분 짓는다. 타자와 세상에 대한 기대 자체가 사라져버린 황인찬을 비롯한 몰락하는 중간계급의 시에는 ‘A는 그저 A’인 것이라는 식의 내용 없는-반복적인 말이 중얼거려질 뿐이라는 것이다. 황인찬의 시에서는 어쩔 수 없는 미니멀리즘’”이라고 할 만한 시어의 단순화가 두드러지면서 여기서 비롯되는 기묘한 아름다움이 발생하는데, 박상수는 이것이 하강하는 중간계급의 정서를 미적 형상으로 반영하는 과정에서 눈앞의 현실 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관점을 통해 중간계급의 집단적 불안과 두려움을 차단하고 위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박상수를 비롯해 황인찬의 시에서 달관의 태도를 발견하는 이들은 현실을 포기함으로써 주체가 얻는 안락한 깨달음의 상태를 미니멀리즘이라는 미적 전략의 형상화로 이해한다. 박상수는 황인찬의 시적 주체를 사토리 세대와 유사한 것으로 규정짓고 있다. 한편 황인찬의 시에서 히키코모리적인 세계”(장이지)를 발견하는 태도라든가 황인찬 시에 나타난 정치적 무의식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파시즘으로 치달을 수조차 있는 피할 길 없는 시()의 냉담함”(이강진)을 지적하는 이들 역시 황인찬의 시적 주체들이 지닌 고립적 속성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희지의 세계만 해도 결핍이 없는, 모든 것이 충족된 듯한 가상의 세계가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희지의 오래된 생활은 혼자 산다는 한 마디로 규정된다. “짧게 사랑을 나눈 뒤라는 구절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희지가 사랑을 나누는 대상의 소재는 불분명하다. 타자의 부재는 희지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타자에게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누군가 문을 두드렸지만 열지 않았다―「풍속) 황인찬의 시에서 타자는 와의 물리적정서적 거리가 분명하게 유지된다.

그 결과 그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해 그는 재잘거리기를 좋아하는 평균 신장과 체중의 한국인이다 그는 내 품에 안겨서 멍청한 표정을 짓는 사랑스러운 서울 출신의 이십대 남성이다”(동시대 게임)라고 제시하는 데 그칠 뿐 그 어떤 주관적인 묘사도 자제한다. 타자는 환대의 대상도 혐오의 대상도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거리감이다. ‘에로스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태가 황인찬의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그가 나르시시즘적 성과 주체’(한병철)이기 때문일까. 다시 말해,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할 줄 모르는 성과주체들이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황인찬의 시적 주체의 우울은 성공에 대한 추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황인찬을 비롯해 2010년대 시에는 나르시시즘적 에고가 철저히 거세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거세의 배경에 자기애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세계가 버티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황인찬은 그렇게 써 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거나 나무는 기다린다 나무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해 본 적이 없다”(서정2)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해 본다고 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로 인한 절망은, 자신이 죽기만을 바라는 천사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는 섬뜩한 상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기록). 이와 같은 총체적인 무력감은 황인찬 뿐만 아니라 2010년대 시인들의 시에서 공통적인 속성으로 지적된 바 있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무력하다는 것과 무력하다고 토로하는 텍스트를 쓰는 것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황인찬은 무력감에 대해쓴다. 김수영의 절망이 세계가 시시하고 지겨운 것이라는 데 대한 것이라면, 황인찬은 자신의 절망이 시시하고 지겹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래서 그는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씩씩하다. “오늘은 죽어야지, 생각하면서/씩씩하게 잘 걷습니다”(영원한 친구)라는 구절 같은 데서 발견되는 위악적인 태도 같은 것을 보라. 시시하고 지겨운 자신이 싫어서 죽어야지 생각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씩씩하게 살아가고, 또 그런 자기가 시시하고 지겨워서 죽어야지 생각하는 것의 반복이 바로 인 것이다.

 

아직도 시를 쓰고 있군요 어깨가 움직이고 있군요 시가 싫어서 미치겠는데도 지겹다고 자꾸 새처럼 짖으면서도 왜 쓰는지도 모르는군요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머리 있으니까 더 머리 있으니까

 

누군가 말을 걸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는군요 혹시 시인 아니시냐고 묻는 사람이군요 굳이 못 알아듣는 척을 하다 맞다는 말을 하는군요

 

그 사람은 알겠다고 하고 바로 떠나는군요

그래요 압니다

 

다 압니다

모든 게 안 좋아요 언젠가 좋아질 테지만

― 「머리와 어깨부분

 

무력한데 무력하지 않다고 쓸 수는 없다.’ 그래서 황인찬은 시가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해 쓴다. “아직도 시를 쓰고 있군요라는 말에는, 무기력과 무능감에도 불구하고 시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의 열등감, 패배감 등이 녹아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우울함, 왜 쓰는지도 모르면서 시를 쓰고 있는 자신에 대한 혐오 같은 것이 시집 후반부로 갈수록 짙어진다. 그런데 황인찬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고 또 쓴다. 이 무기력과 무능감이 로 발화됨으로써 그것은 문제로서 인식된다. “언젠가 좋아질 테지만그것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모든 게 안 좋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오지 않을 과거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패배이다. 이것이 그가 명확한 것, 좋지 않지만 너무나 명료한 현재에 대해 이야기할 뿐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조건적인 현재에 대한 수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건부의 현재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를 쓰는 한에서 존재하는 현재이다.

 

4. 취향의 헤테로토피아

여기서 취향이 중요해진다. 시를 읽거나 쓴다는 것은 취향의 문제다. 영화를 보거나 미술 전시회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택 가능한 여러 문화적 체험 가운데, 그것도 소수에 의해 향유되는 문화적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또한 동시에 지하철 승강장 안전문의 여백을 심심치 않게 해주는 애매한 대중성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는 지나치게 소수에 의해 향유되는 마니아 혹은 오타쿠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카페인 없는 커피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황인찬은 이러한 현실에 분노하거나 절망한다는 것이 부질없으며 시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시를 쓰는 자신의 취향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하거나 그것이 단순한 취향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소극적인 물러남의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시를 쓰거나 읽는 것을 취향이라고 말하는 그의 태도에는 다소 복잡한 뉘앙스가 있다.

이와 관련해 희지의 세계와 연관된 한 웹툰이 주목된다. 시집의 제목으로도 쓰인 희지의 세계이자혜의 만화 미지의 세계에서 제목을 빌려 시를 쓰려다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라고 황인찬은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이자혜의 만화 미지의 세계는 대학생 조미지의 일상을 담은 웹툰이다. 이 만화는 병맛 만화의 여성판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드코어한 조미지의 욕망을 가감 없이 그려낸다. 그런데 황인찬이 이 만화의 제목을 일부러 강조하면서 특히 자신이 착각을 하고 말았다는 단서를 붙인 정황은 무엇일까. 그는 이 착각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를 하기보다, 의도적으로 이 착각을 시집에까지 유지하면서 이 착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만화에서 제목을 빌려왔다고 하는 희지의 세계가 만화 미지의 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는 점이 이 착각의 의미를 묻게 한다.

만화에서 주인공 미지의 이름은 미지(未知)’이다. 그녀는 게이 포르노를 즐겨보며 자위를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중증 변태로 피해의식, 열등감, 자기혐오 등으로 자살을 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조미지의 이상과 현재적 삶의 비루함은 극단적 대조를 이루며, 이러한 격차가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독자들에게도 공유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분명한 자기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향유할 때에는 자살할 기미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 만화에 나타난 조미지의 독특한 취향은 기존 관습과의 불가피한 마찰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자기혐오를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허나 이는 조미지가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조미지는 자기혐오의 원인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남들과 자신을 구분해주는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변태취급을 받는 취향을 가진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남들과 대별되는 감수성을 지닌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의 취향은 차이가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여주며 조미지가 자살을 고민할 정도로 극심한 갈등의 원인이 된다. 개인의 상징자본의 차이가 취향의 편차를 낳는다는 가설에서 조미지는 예외적 개인이다. 이러한 예외성으로 인해 조미지는 자신의 출신배경뿐만 아니라 계급과 맞지 않는 자신의 취향에 대한 혐오를 표출한다. 그런 점에서 미지의 세계는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이다. 조미지의 비정상성은 이 세계에 속해있으면서도 세계와 불화한다. 그런데 바로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자신이 아닌 것처럼 객관화시킬 수 있다. 즉 취향을 통해 그녀는 자기 안의 타자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신이 혐오하는 자신의 타자성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미지와 희지의 세계의 시적 주체의 태도의 공통성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 취향과 현실의 불화를 유지하며 자기혐오를 지속시킨다. 취향으로 인해 자신의 결핍이 두드러지고 그로 인해 자신이 혐오 대상이 될지언정 이들은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 실천 사이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취향을 향유함으로써 누구보다 고통 받는 존재들이다. 이렇게 이들이 자기 존재를 극단적으로 혐오하면서도 고통 속에서 그 취향을 포기하지 않을 때, 계급과 취향의 불일치가 문제시됨으로써 이데올로기에 대한 폭로 효과는 극에 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중성이야말로 취향을 존중해 달라는 요구보다 취향을 존중받을 수 있는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가 혐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자기를 존중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자신이 비루하고 혐오스러운 존재임을 상기하면서도 그 원인으로서의 취향을 지닌 타자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불안이나 공포를 해소하지 않되 동시에 그것을 향유하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일베에서 작동하는 혐오의 차이다.

 

아직도 나는 망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쯤 망할까? 그것이 언제나 가장 궁금했다 사람들은 세상이 망하기를 언제나 바라고 누군가 망하기를 언제나 바라지만

 

개가 태어나고 나무가 자라고 건물은 높아지고 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운석은 충돌하지 않는다

 

어느 날인가 너무 어린 나는 망해 버린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꿈이었는데

 

거기서도 할머니는 하고 계셨다 깨끗이 씻고 계셨다 늙고 늙은 몸을 거대하고 축 늘어진 가슴을 들어올리며

 

우리 할머니는 아직도 하신다 백 년 동안 움직여 온 그 입술로 내게 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자꾸만 하신다

 

나는 망하지 않는다 살아서

있다

― 「종의 기원부분

 

이 시에서는 세계가 망하는 것을 바라는 가 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데 대한 묘한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세상이 망하기를 언제나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만 살아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의 제목이기도 한 실존하는 기쁨이다. 황인찬이 미지의 세계희지의 세계라고 착각한 것은 아님()’이라는 부정을 그러함이라는 기쁨()으로 변주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모든 게 안 좋다는 것을 다 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미지(未知)의 세계 속에서 그러한 알지 못함을 다는 사실을 기쁜것으로 바꾸려한다. 이것이야말로 취향을 향유하는 자의 기쁨이라 할 수 있으며, 이때의 시인의 취향은 아갈마,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오브제 a’가 된다. 시는 미지(未知)의 것이기에 향유()를 가능케 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에 대한 시인의 태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시집의 첫 페이지에 배치된 멍하면 멍에서 그는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건 그냥 시예요라고 무덤덤하게 밝힌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A는 그저 A’인 것이라는 식의 내용 없는-반복적인 말인 것은 아니다. 이 시에 인용된 김수영의 시 절망을 마이너스의 방식으로 변주하고 있는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고/곰팡이 곰팡을 반성하고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무능함을 달관하는 듯한 태도로서 실은 절망을 향유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절망)라며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시인의 존재론으로 삼았던 김수영과 달리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멍하면 멍)라며 끊임없이 사과한다. 그렇게 그는 반성을 반성한다.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면서 시인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기를 강요하는 폭력이 있음을 고발한다.

혐오의 메커니즘에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할 때, 그 공포는 실은 주체를 구성하는 일부이기도 하다. 이 공포를 제거하려고만 한다면 주체는 동일성의 감옥에 갇혀 헤테로포비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에로스는 그 공포를 극복하고 공포의 대상에 자기 공간의 일부를 내어줄 용기를 내게 한다. 자기가 혐오하는 대상에게조차도 자기를 열어 내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해서 시인은 시의 무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기혐오적인 상황에서 시를 쓴다. 누군가가 혐오하는 시를, 무기력을 강요하는 시를. 사람들이 시를 혐오하게 만드는 시의 본래적 속성을 유지/회복해야만 시는 망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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