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

고영민, 개가 사라진 쪽부분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은 사람들을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한다. 주인공 사내의 어머니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읽은 책으로는 싸구려 통속소설을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책에 파묻혀 사는 아들을 비난한다. ‘너도 아버지처럼 책 속으로 들어가려는 거구나.’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는 커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어머니가 했던 말을 기억해낸다. 문자의 세계에 매혹되어 고전문헌학자가 된 사내는 어머니의 이 말에 담긴 쓸쓸함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로 사랑하는 자들이 떠나버리는 것에 대한 외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그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우쳤고, 또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어머니의 외로움을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했을 것임을 안다. 사내 역시 자신의 외로움을 감당하기에 벅차서 문자의 세계를 탐닉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리라.

고영민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리에서 갑자기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의 시적 여정에도 급작스러운 전환 같은 것이 목도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최근 펴낸 구구(문학동네, 2015)가 그렇다. 이 시집이 기존 시집들과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그가 자기 삶에서 어떤 불일치를 발견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 스스로의 삶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고영민의 시에서 이는 그림자에 대한 발견으로 표면화된다. 사실 고영민의 세 번째 시집을 읽을 때만 해도 그가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를 궁금해 하는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위악적인 제스처를 일부러 내세우는 듯 보였던 첫 번째 시집 악어(실천문학사, 2005)를 거쳐 죽음 앞에 공손해지는 인간의 유한함을 보여준 공손한 손(창비, 2009), 그리고 그러한 한계가 극치에 달한 순간들을 모아놓은 사슴공원에서(창비, 2012)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시에는 유기적 세계관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혹자가 지적하듯 서정시에 대한 고집이나 일관된 아비뛰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구에 이르러 유기적 세계관에 균열이 확연히 나타난다. 은유를 대신해서 환유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 그 징후를 보여준다. 고영민이 병치의 방식으로 유년에 대한 향수를 사물에 대한 열린 감수성으로 변환시킬 때 은유는 빛을 발했다. 그의 은유는 시적 주체의 울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이는 사물의 텅 빈 자리를 울음으로 채우려는 기획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듯 보이지만 그 죽음을 제대로 된 울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는 한정돼 있다. 이때 고영민은 누군가를 대신해 울어주기를 자청하는 자였다. 그는 울음을 제대로 된 음()으로 진동시키기 위해 악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몸을 악기로 만들었다(우륵). 그리고 이 악기를 통해 미처 이야기되지 못했던 슬픔들이 온전한 음을 지닌 채 세계에 흘러나왔다. 다음과 같은 시가 그러하다.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울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울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뿌리 속에 한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부분, 공손한 손

 

저녁의 시간도, 사랑도 한 그루의 나무속으로 들어간다. 나무는 삶과 동반되는 비애와 서러움을 그 자신 안에 담아낸다. 비애와 서러움을 언제까지 자기 안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눈물이 중력에 의해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질 때도 그는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이라고 말할 뿐이다. 인간은 사랑으로 인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숙명론적 존재다. 허나 그는 그 어떤 고통 앞에서도 겸허하다. “사랑은 우리의 비참함을 말해 주는 표시이다. 신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중력과 은총)라 했던 시몬 베유의 말이 떠오른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자는 사랑을 비참함의 표시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비참함은 온전히 한 그루의나무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표현될 수 있는 고통은 그나마 참을 만한 것이 되니 말이다.

그렇게 형용 불가능한 사랑의 비참함을 하나의 사물로 변용시킴으로써 그는 이 세계가 저물어간다는 사실을 오롯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와 같이 아름다운 연가를 부를 수 있었다. “우리는 뒤돌아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바람이 잠잠해질 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나는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그때 너와 나의 머리칼과 눈썹, 털옷에는/눈가루가 얹혀 빛나고 있었다.” 이 시에서 이름도 알지 못했던 거대하고 의연한 나무의 은총 아래 시적 주체는 사랑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있다. 이 믿음은 영혼에 대한 신화를 작동시키고 있으며 그의 시 세계가 죽음을 환한 어둠”(누우면 눈이 감기고 일어서면 눈이 떠지는 인형처럼)으로 인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그리하여 그는 땅속으로 새들이 날고/그 푸른 허공으로 빗줄기가 쏴, 하고 쏟아질 때에도/나는 몇 번씩이나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라고 말한다. 죽음 이후 영혼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영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죽음을 인식하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자의 평온은 얼마나 부러운 것인가.

그런데 사슴공원에서에서부터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불편함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의 영혼이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온전한 위안이 되지 못한다. 애도하는 자들은 그렇게 허무주의자가 된다. 헤어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함을 연습해둔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중얼거리기도 한다(오지). 그럼에도 끝내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가 출현하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나도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사랑이 식기 전에/밥이 식기 전에”(사슴공원에서)라는 구절이 안타까움을 주는 것은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그가 당신에게 도달하는 것은 너무 늦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들은 평생을 그들을 애도하는 데 바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조금 더 빨리 당신에게갔어야 한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더 이상 죽음이 남의 것이 아니게 될 때 죽음의 의미는 그 전과 사뭇 달라진다.

 

태어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습니까

비춰보지 않고서는 귀와 입과 코를 보지 못하는 눈과 같이 나는 영원히

단풍을 보지 못합니다

― 「단풍을 말하기 전부분, 사슴공원에서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공은 끝끝내 발견되지 않고 한 명씩 두 명씩 날 저문 얼굴로 숲을 나와 낡은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버리면 공은 그제야 숲의 덤불 속에서 또르르 굴러나와 한참을 웃다가, 웃다가 다시 숲의 덤불 속으로 천천히 기어들어가 우리가 어른이 될 때까지 비 맞고 눈 맞고 그 자리에 꼭꼭 숨었다네……숨는다네

― 「부분, 구구

 

고영민은 자기 존재의 기원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그것에 대한 물음을 찾기만 하면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리라. 그는 태어나기 전의 자신을 찬란했던 시절을 지나치고 있는 단풍에 비유한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독경, 사슴공원에서)라고 말하며 이 생이 천천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태도와 닮아 있다. 그는 귀와 입과 코를 보지 못하는 눈처럼 자신의 생이 저물어가는 풍경을 조망하지 못하는 피조물임을 깨닫는다. 삶의 의미는 어딘가로 굴러가다가 끝끝내 발견되지 않는 공처럼 어딘가에 숨어 버린다. 오롯이 자신의 삶이 아닌 것 같은 이물감을 고영민은 숨어 버린 공에 비유한다. 그런데 끝내 공을 발견하지 못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이들 만큼이나 한참을 웃는 공 역시 외로워 보인다. 그렇게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 더 꽁꽁 숨어버리는 공이 된 기분으로 시인은 위악의 가면을 쓰고 자신이 처한 삶의 한계를 잊고자 하는 제스처를 취하거나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며 해소되지 않는 물음들을 정리해보려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울음으로 가득 채워진 시적 대상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구구라는 시집의 제목에서 쓸쓸한 울음소리를 연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인은 비둘기가 울 때마다 비둘기가 생겨난다구구의 구절은 울음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존재의 영역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비둘기가 울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영역이 열리는 이 순간은 세계와 존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불일치의 순간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숨죽인 채 쌍둥이 사내애를 낳고 있는/여고생빈 유모차를 밀며 공중화장실 옆을 지나는/할머니 머리 위에서 비둘기는 운다. 여기서 비둘기의 울음은 세계와 존재 사이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징표임을 보여준다. 불일치는 기실 인간사의 온갖 비극과 관련된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간절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끔찍한 일로 기억되기도 한다. 가령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혼신의 힘으로 창문을 향해 기어간 그녀의 마지막 간절함이 구더기가 되어 떨어지는 아픈 순간을 고영민은 기어코 그려낸다(구더기). 봉천동엔 비가 내리는데 장승배기엔 눈이 온다와 같은 시의 제목은 시인이 불일치의 순간 빚어지는 비극적 장면들에 주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영민이 포착한 이러한 불일치의 비극에는 얼마만큼의 냉소와 얼마간의 연민이 동시에 배어있다.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구구) 삶의 비극들을 저만치 밀어놓고 관찰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적인 시선은 그동안 고영민 시에서 작동해왔던 은유가 나타나는 것을 방해한다. 기의를 매개로 하여 사물을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은유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을 현상학적 시선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구구에서 사물의 이면에서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를 대신하여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물들의 그림자에 대한 탐구가 나타나고 있다. 고영민은 어째서 이러한 변화를 보이게 된 것일까. 익숙한 삶과 결별하려는 인간에게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고영민이 영혼도 육체도 아닌 그림자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거기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불붙은 개의 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

 

댓잎이 나오는 지금쯤

어린 장어는 강에 나오고

열세 명이나 들어가던 늙은 팽나무엔 연초록 새잎이 돋고

발목에 가락지를 채워 보낸 새는

다시 돌아오고

 

누가 개에게 불을 붙였나

달려도 달려도 떨어지지 않고 개는

무작정 또, 달리고

 

나는 언제부터 지루해졌을까

차량 정비소로 뛰어든 개는

결국 건물 한 동을 홀라당 다 태울 텐데

그사이 봄은 여름에게 저녁은

밤에게 몸을 내어주고

 

개가 전속력으로

개로부터 빠져나가는 저녁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위한 몸은 없다고

모든 그림자는 가장 길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나는 우두커니

개가 사라진 쪽을

― 「개가 사라진 쪽전문, 구구

 

고영민에게 일어난 변화는 삶과 죽음, 몸과 영혼의 이분법적 세계에 혼란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푸코는 영혼이 몸의 슬픈 위상학을 지워버릴 수 있는 가장 끈질기고도 강력한 유토피아를 서구 역사의 시초 이래 우리에게 제공해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14). 영혼은 생명의 유한함을 보여주는 몸을 가진 슬픔을 간단히 제거해버린다. 영혼은 순수하고 아름답고 순결하다. 그것은 육체가 사라진 다음에도 본래의 순수함을 복원할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진다. 유기적 세계관을 견지한 서정시들이 주는 행복함이란 영혼과 육체로 이분법의 세계에서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전달된다. 유한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의 무한함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데 영혼에 대한 은유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

그러고 보면 거울 속 제 모습을 두고 짝이라고 생각하는”(거울, 공손한 손) 새 한 마리는 시인의 분신이자 근원적 결핍을 상상적 동일시로 해소하고자 하는 안간힘을 보여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서라도 해소하고자 했던 존재론적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출현한 불타는 개와 같은 예측 하지 못한 사건이 겨우 고정해 두었던 기표와 기표 사이의 의미를 뒤흔들어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위한 몸은 없다는 선고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이 시에서 고영민의 불타는 개로 변신한다. 구슬픈 울음을 울면서 거울을 보고 외로움을 달래려는 시도가 타자에 의해 좌절된 후 그의 울음은 그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혼돈의 몸부림으로서 잠시 출현했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서 영혼을 대신한 자리에 그림자에 대한 물음이 들어선다. 영혼과 육체의 안전한 이분법 안에서 조화로웠던 세계를 대신하여 불일치와 엇갈림 속에 고통 받는 그림자의 세계가 그려진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따름이다. 돼지고기가 그냥 돼기고기일 뿐”(돼지고기일 뿐이다)인 것처럼. 거기에 어떠한 의미를 덧댄다고 해도 들판이 불이 번졌던 자국처럼 죽음은 자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고영민은 불안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사물의 불일치를 응시한다. 이는 죽은 자의 손”(차가운 손)처럼,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입술들”(붉은 입술)처럼 낯선 사물에 그가 주목하는 까닭이 아닐까. 그렇게 불안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눈을 열어줄 것이다. 시인 덕분에 한 그루의 저녁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그림자가 한없이 길어진다.

 

<시인동네> 2016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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