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가 든 유명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보이세요?”라는 죽은 아들의 비난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에 대한 일화이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실제로 아들의 시신은 옆방에서 불타고 있었고,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난 덕분으로 가까스로 (이미 죽었으나) 불타는 아들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일화를 들으면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은 아들이 보낸 메시지를 들은 것이라며 이 꿈을 신비화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 꿈을 욕망의 이미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 꿈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은밀한 비밀을 환기시키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이 꿈은 아들이 죽은 것을 자기의 탓으로 여기는 아버지의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즉 아버지-주체로서의 자신을 부정하는 태도가 그를 악몽에서 깨어나 불타는 아들을 구할 수 있게 했다. 만일 그가 자신이 아버지로서 불충분했음을 인정하고 아버지-주체로서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면, 그는 결코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자신 역시 아들의 시체와 함께 재가 되어 버렸으리라.

그리고 여기 다섯 명의 소설가-주체가 있다. 선택은 양진채, 이경희, 정태언, 조현, 허택 등 5인의 소설가가 함께 펴낸 중편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에서 이들은 그야말로 ‘2008이라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은 이 젊지 않은신인들이 소설가로서 등단한 해이고, 이후 이들은 소설가로서 좋은 소설을 써야 한다는 부채의식에 시달렸으며, 이 소설집은 그 결과물이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아등바등 기를 썼던 이들은 소설가-주체로 인정받기 위해 꿈에서도 자판을 두들겼다”(책머리에).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소설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는지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모색의 결과가 이 소설집에서 2008년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왔다. 그들 자신이 소설가로서 느끼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은 무엇보다 악몽에서 깨어나 그들 자신의 현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그들을 다시 그들의 기원으로 이끌었다. 그러니 이 소설집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얼마나 외상적인가.

이들이 소설가-주체로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양진채의 플러싱의 숨 쉬는 돌은 페트락(pet-rock)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다룬다. 한때 미국에서 유행한 페트락 사업을 하러 한국에 돌아온 삼촌은 돌에도 숨 쉬는 돌이 있다고 믿으며, 돌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다룬다. 하지만 이는 당시 한국의 상황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그것이 유행했을 미국의 당시 맥락과도 다른 것이었다. 삼촌은 실패하고 돌아가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으며, ‘는 그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그런데 2008년 촛불집회에서 사랑했던 여인과 우연히 해후한 후 는 삼촌의 실패를 다른 방향에서 이해하게 된다. 삼촌의 실패를 세계와의 불화에서 찾으며 그의 미숙함을 지적하기보다, 그의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리하여 그의 사랑 역시 미완성으로 끝나게 하였던 세계의 실패가 문제임을 알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 소설은 이 유머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어디서든 꿋꿋이 트위스트를 추는 사내가 있다는 것, 이것은 숨 쉬는 돌의 존재만큼 믿기 어려운 것임에도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비록 실패한 농담이 될지라도, 유머는 계속되어야 한다.

한편 이경희의 달의 무덤2008년의 악몽이 잠재되었다가 현재에 다시 소환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고로 누군가는 목숨을, 누군가는 정신을, 또 누군가는 양심을 잃었다. 갯벌에서 시체로 발견된 막달이와 그 막달이를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 시어머니 중지 씨, 그리고 숨진 막달이의 죽음을 담보로 금전적 보상을 노리는 인물들이 각 항에 대입된다. 갑작스럽게 닥친 재앙을 인생을 역전시키기 위해 기회로 탈바꿈하려는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은 죄책감 따위는 과감히 내던져 버린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재앙으로 일어난 일에 괴로워하는 이들이야말로 미친사람 취급을 받고 인생역전의 기회 앞에 트라우마가 될 만한 기억은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만다. 보상금을 받기 위해 거짓 분노와 양심을 버린 대가로 얻은 재산에 대한 집착이 이들의 정신을 마비시킨 것이다. 누군가 죄를 추궁하기 전까지 이들은 자신들이 괴물이 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2008년의 재앙은 이들의 내면에 숨겨진 괴물을 도발시켰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괴물들 앞에 괴물이 나타난다. 끝내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자들의 최후랄까.

정태언의 성벽 앞에서어느 소설가 G의 하루는 숭례문 화재사건을 소재로 등단한 소설가 G의 하루를 따라 서사가 전개된다. 그는 스스로를 삼류 소설가라고 평할 만큼 자괴감에 빠져있다. 여기저기서 소설집 출판을 거절당하고 처지에 있는 그에게, 산다는 것은 탁발과 같은 것이다. 다만 그는 탁발을 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 그러니까 감사함과 고개 숙임의 마음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탁발에 필요한 고요한 마음가짐을 가져서는 소설을 쓸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전설 속의 아기장수에 자신을 대입시키며 자기만의 성벽을 갖춘 소설을 쓰기를 열망한다. ‘자동화를 거부하면서도 일상을 감성으로 녹여내는 소설을 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참한 일상을 견디기 위해서는 탁발의 자세를 버릴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주인공은 탁발과 아기장수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술자의 분열된 의식이야말로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소설을 쓰기 힘듦에 대한 소설을 쓰면서 소설가-주체가 괴로워하는 곳에 소설이 있다라는 명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의 불안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소설은 끝난다. 하지만 이 물음이 남겨졌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소설가 정태언이 바라는 것은 아닐까.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은 이토록 위태한 것이다. 악몽이 악몽인 것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현의 선택을 읽어볼 수 있겠다. 이 소설은 프로이트의 주체 이론이 기반하고 있는 데카르트적 명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프로이트가 분열된 주체가 있는 곳에 가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해 조현은 주체를 인공적으로 분열시키는 프로그램이 출현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STPI(상황부여형 심리검사)라는 이중으로 교묘하게 프로그램 된 이 심리검사를 마친 사람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테스트 받는 과정에서 충성심을 세뇌당하는 부작용을 얻게 된다. 세뇌는 현실에 대한 의심을 기반으로 한다. “어느 상황이 시험의 순간인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순간을 테스트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겹겹의 액자형 서사가 연속되는 방식으로 이뤄진 이 소설은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진짜인 줄 알았던 것이 가짜일 수도 있겠지만 가짜 속에도 진짜, 그러니까 뭔가 삶을 자극하는 이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을 언급하고 있는 결말부를 보면 다시 현실이 가상을 압도하는 인상을 준다. 조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려는 것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선택할 수 없는 문제지를 받아놓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 역시 작가의 의도이려나.

허택의 대사증후군은 소설집의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세계 금융 위기로 소위 잘 나가던상류층에서 노숙자로 전락하게 된 가장의 비화를 통해 이 소설은 한국의 현대사의 몰락을 알레고리화 한다. 작가는 각 장의 제목에 시기별 혈당지수, 혈압, 병명을 기입하여 주인공이 대사증후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한국 중산층의 몰락과 중첩시킨다. 그의 몰락은 주인공의 그칠 줄 모르는 허기에 의해 추동되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그에게 성장신화는 영원히 깨어나지 말아야 할 꿈이었다. 이 꿈 속에 2008년이라는 파국이 도달하기까지 그는 자신이 자본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가리던 환상이 파국으로 인해 산산이 깨지고 난 후 현실은 악몽이 되었고, 그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살아있는 송장이 되었다. 이러한 처지를 자각하게 된 그가 남긴 유언이 자신의 시체를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해달라는 것이라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는 죽음으로써만 자신이 생전에 저지른 죄를 갚을 수 있는 것이다.

허택의 소설에서 다뤄진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다룬 영화 빅쇼트는 다음과 같은 마크 트웨인의 말로 시작한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선택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그처럼 뭔가를 안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곤란함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은 독자뿐만 아니라 소설가들 스스로에게도 향해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소설가로서 등단한 2008년의 사건들을 다루면서 2008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와 더불어 그 사건들에 대해 소설을 쓰는 그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하였다. 이들은 불 타는 아들의 애원에 잠에서 깨어났던 아버지가 그러했듯, ‘암중의 와중에도 모색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이 소설집을 내놓았다. 문학의 역할이 그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케 하고 내적인 갈등을 조장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면, 이들이 온몸으로 문학을 수행하고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소설에 대한 이들의 불안은 그들이 여전히 소설가임을 증명하는 징표이다.

 

<문학나무> 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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